가상현실 게임 (VRMMO) 독립적인 단편 소설

이진우는 눈을 떴다. 아니, 감았던 눈을 다시 한 번 깜빡였다. 현실에서는 낡고 좁은 원룸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던 시야가, 순식간에 끝없이 펼쳐진 에메랄드빛 초원과 머리 위로 쏟아지는 찬란한 이중 달로 바뀌었다. VR 헤드셋이 완벽하게 차단한 현실의 소음 대신, 나뭇잎 스치는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야수들의 울음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젠장, 이게 낙원이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진우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아바타는 ‘황금 사자의 발톱’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빛나는 금색 갑옷을 입고, 거대한 양손 검을 등에 메고 있었다. <에테르 넥서스>. 가상현실 기술의 정점이라 불리는 이 게임은 진우에게 유일한 안식처였다. 현실의 팍팍한 삶은 잊고, 이곳에서는 누구보다 강하고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었다.

오늘은 길드원들과 함께 미개척 던전 탐사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퀘스트 마커가 손목에 달린 가상 패드에 반짝였다. 서둘러 집결지로 향하며 진우는 문득, 현실의 방에 두고 온 컵라면 국물 냄새를 맡은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피식 웃었다. 헤드셋은 냄새까지 차단해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한참을 몰이사냥에 몰두하며 거대한 트롤 떼를 쓸어버리던 그때였다.

콰당!

진우의 심장이 철렁했다. 동시에 눈앞의 가상현실 화면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현실에서 지진이 난 것처럼. 하지만 트롤들은 아무렇지 않게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이건 게임 속 진동이 아니었다. 진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우님? 왜 그러세요? 집중 안 하고!” 길드장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진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분명, 그 소리는 자신의 현실 방에서 들린 소리였다.

황급히 가상현실 패드를 조작해 접속을 종료했다. 틱, 하는 소리와 함께 헤드셋이 벗겨지자 익숙한 원룸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수선한 책상, 며칠째 빨지 않은 빨래 바구니, 그리고…

바닥에 나뒹구는 냄비. 식탁 위에 놓여있던 것이다.

“젠장, 뭐야?”

진우는 벌떡 일어났다. 분명 아침에 냄비를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라면을 끓여 먹고 씻어서 그대로 두었다. 그런데 지금은 식탁 바로 아래,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설마, 내가 벗다가 건드렸나?’

하지만 헤드셋은 침대에 누워서 벗었고, 냄비는 식탁에서 떨어졌다. 꽤나 큰 소리가 났는데, 그 정도면 힘줘서 떨어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거리였다. 진우는 찜찜함을 애써 무시하며 냄비를 주워 식탁 위에 도로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헤드셋을 착용했다. 아까 그 찜찜함이 가시지 않아 사냥에 집중하기 어려웠다.

며칠 뒤, 비슷한 일들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소했다. VR에 접속해 있는데, 책상 위 펜이 스르륵 미끄러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무심코 헤드셋을 벗었고, 펜은 침대 바로 옆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 뒤로는 게임 중에도 현관문이 삐걱거리는 소리, 주방에서 컵이 부딪히는 소리 같은 현실의 소음이 미세하게 들려왔다. 헤드셋의 외부 소리 차단 기능은 완벽하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말이다.

점점 더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

어느 날 진우는 게임 속 퀘스트 아이템인 ‘낡은 열쇠’를 찾기 위해 가상현실 속 어두운 골목을 뒤지고 있었다. 열쇠가 놓여있어야 할 벽돌 틈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짜증을 내며 주변을 뒤적거리던 그때, 문득 현실의 열쇠고리가 떠올랐다. 분명 어제 현관 선반 위에 던져두었는데.

무심코 헤드셋을 벗었다.

현관 선반 위에 있어야 할 열쇠고리는 보이지 않았다. 진우는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선반을 봤다. 없었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내가 어디에 뒀더라….’

식탁 위를, 책상 위를 뒤졌다. 침대 옆 협탁 위를 뒤졌다. 없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그때, 진우의 시선이 화장실 문고리에 닿았다. 거기에, 자신의 열쇠고리가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

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히, 어제는 현관 선반에 던져두었다. 그는 맹세할 수 있었다. 게다가 화장실 문고리에 걸어둘 이유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장난이라도 친 것처럼.

진우는 그날 밤 잠을 설쳤다. 밤새 삐걱거리는 소리, 웅얼거리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이제는 그게 환청인지, 아니면 정말로 나는 소리인지 구분조차 어려웠다.

다음날, 그는 결심했다. 무언가 단서를 잡아야 했다. 스마트폰의 동영상 녹화 기능을 켜고, 자신의 방이 잘 보이도록 책상 위에 세워두었다. 그리고 다시 헤드셋을 착용했다.

오늘 진우의 아바타는 던전 깊숙한 곳에서 거대한 골렘과 싸우고 있었다. 묵직한 공격을 피하고 반격하며, 게임패드를 든 손가락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정신없이 게임에 몰입하던 그때였다.

탕!

명확하고 강렬한 소리. 이번에는 헤드셋을 뚫고 들어올 정도로 선명했다. 진우는 헤드셋을 냅다 벗어던졌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조각들이었다. 식탁 위에 놓여있던 유리컵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진우가 게임패드를 내려놓았던 자리에 펜 몇 자루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마치 컵을 떨어뜨린 주체가 펜을 건드린 것처럼.

“너, 너 누구야!” 진우는 절규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열린 문도, 창문도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 녹화 영상을 재생했다. 영상 속의 자신은 헤드셋을 쓰고 격렬하게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우의 게임패드가 테이블에 부딪히는 순간, 컵이 갑자기 허공으로 튀어 오르더니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진우의 게임패드 충격이 컵에 직접적으로 가해진 것처럼.

진우는 영상 속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화면 속의 그는 게임패드를 내려치고 있었다. 그는 지금껏 자신이 게임패드를 내려친다는 자각이 없었다. 그저 집중해서 플레이했을 뿐인데.

그때, 또 다른 소름 끼치는 현상이 발생했다.

자신이 게임패드를 테이블에 내려치는 순간, 유리컵이 튀어 오르는 동시에, 영상 속 배경인 자신의 방 침대 위 이불이 스르륵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그 아래에 숨어있는 것처럼.

진우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이불이 들썩거리는 움직임. 그것은 마치… 그의 아바타가 게임 속에서 거대한 골렘의 공격을 회피하며 허공으로 몸을 띄우는 순간의 움직임과 겹쳐 보였다.

‘설마… 내 게임 아바타가…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건가?’

그의 손은 자동으로 헤드셋을 집어 들었다. 게임 속에 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니면 그저 도망치고 싶은 본능이었다. 진우는 다시 <에테르 넥서스>로 접속했다.

여전히 골렘과의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의 눈에는 골렘 따위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이 가상현실 속 공간이, 현실의 방과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게임 속 골목길 바닥에 유리 조각들이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방금 전 현실에서 깨진 유리컵의 파편들과 똑같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바타가 서 있는 자리 옆, 가상현실 속 침대 모형이 흔들리고 있었다. 현실의 이불이 움직였던 것처럼.

“이게 뭐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진우는 게임 속에서 소리쳤다.

그때, 그의 아바타의 시야에 이상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게임 속 메시지창이 아니라, 공중에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텍스트였다.

[현실과의 동기화율… 87%]
[현실의 간섭 강도… 매우 높음]
[접속자 이진우… 존재의 역전 현상 감지.]

그리고 다음 문장이 나타나자 진우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너의 방에 있어.]
[나는 네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
[나는 네가 존재한다.]

텍스트가 사라지자마자, 진우의 게임 아바타는 돌연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바타의 시선이 향한 곳은 가상현실 속 그의 ‘집’이었다. 게임 속 세계에 구현된, 그의 현실 방과 거의 똑같은 모습의 아파트였다.

그의 아바타는 천천히, 마치 누군가 조종하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현실에서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바타는 가상현실 속 자신의 아파트로 들어섰다.

그리고, 가상현실 속 거실 중앙에,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투명한 무언가가 희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뜨거운 공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듯한.

그것은 진우의 아바타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아니, 진우의 현실 속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 순간, 현실 속 그의 방에서도 무언가 움직였다. 책상 위, 오래된 액자가 쿵, 하고 쓰러졌다. 깨진 유리 파편이 튀어 오르고, 그 안의 빛바랜 가족사진이 진우를 향해 엎어졌다.

진우는 헤드셋을 벗지 않았다. 벗을 용기가 없었다.

가상현실 속 투명한 아지랑이가 천천히 그의 아바타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의 아바타의 팔에 손을 얹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 차갑고도 섬뜩한 감각이 가상현실을 넘어 현실의 진우에게까지 전달되는 듯했다.

[나는 네가 원해.]
[너의 몸.]
[너의 세상.]

아바타의 팔에 닿았던 아지랑이가 스르륵 스며드는 것을 진우는 똑똑히 보았다. 마치 아바타의 존재 자체가 그 아지랑이에 흡수되는 것처럼.

동시에, 현실의 진우는 자신의 팔에서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마치 누군가 차가운 손으로 자신의 팔뚝을 움켜쥔 것처럼. 그는 떨리는 시선을 자신의 팔로 내렸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마치 차가운 공기가 그의 살갗을 파고드는 듯한 느낌.

그때, 그의 아바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진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서 와.”

진우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직접 나온 소리는 아니었다. 헤드셋 너머, 게임 속 그의 아바타가 기괴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현실은 재미있지 않아?”

가상현실 속에서 그의 아바타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에메랄드빛 초원과 이중 달, 그리고 그의 방이 겹쳐 보이는 기이한 환상이 아바타의 눈에 서려 있었다.

진우는 헤드셋을 벗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그의 몸 전체가 마비된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그가 지금 아바타가 된 것처럼.

그때, 현실의 그의 방.
스마트폰 녹화 영상 속에서, 그의 침대에 놓여있던 이불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천천히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그 아래에 어떤 존재가 숨어있다가, 이제 막 깨어나는 것처럼.

이진우는 눈을 감았다. 아니, 게임 속 그의 아바타의 눈이 감겼다.
그리고 다시 떠졌을 때, 그는 자신의 방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났다. 평소와 같은, 낡고 좁은 원룸이었다.
방금 전까지의 모든 일들이 꿈이었나?

진우는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녹화 영상은 여전히 재생 중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헤드셋을 쓰고 굳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영상 속에서, 침대 위에 부풀어 오르던 이불이 서서히 꺼지고, 이불 아래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그림자였다. 형체 없는 검은 실루엣이 이불 위로 피어오르더니, 진우가 앉아있는 의자로 향했다. 그리고는 마치 의자에 앉는 것처럼, 진우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영상 속 진우는 여전히 헤드셋을 쓰고,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영상을 다 보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자신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책상 위, 자신이 방금 전까지 쓰고 있던 헤드셋 옆에 놓여 있던 빈 컵라면 용기.
그 용기 안에, 작은 글씨로 무언가가 쓰여 있었다.

[나도 VR을 할 수 있을까?]

진우는 자신의 몸을 보았다. 마치 다른 존재가 그를 빌려 쓰고 있는 듯한 기분.
더 이상,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창밖으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해 볼까.”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깊고, 낮게 울렸다.
마치 두 개의 존재가 하나의 육체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가상현실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그 방 안에서, 기괴한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