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한복판, 창밖으로는 함박눈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렸다. 세상은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날의 다방’이라는 낡은 간판이 달린 작은 카페 안에서, 하은은 붓 대신 펜을 쥔 채 멍하니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뜨거운 율무차 김이 피어올라 유리창에 맺혔다가 흐르는 것이, 마치 그녀의 눈물 같았다.
매년 이맘때면 그녀는 이곳을 찾았다. 첫눈이 소복하게 쌓이던 날, 그와 약속했던 장소와는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이곳은 그와의 모든 기억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처럼 느껴졌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는 틱, 톡, 소리 없이 시간을 재촉했고, 켜켜이 쌓인 먼지 속에서 빛바랜 사진들이 지난 세월을 증명하고 있었다.
“또 오셨네요, 아가씨. 오늘도 지후 아가씨를 기다리시는 건가요?”
다방 할머니의 온정 어린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끌어냈다. 하은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따뜻한 율무차 한 잔을 새로 내밀며 덧붙였다.
“세월이 강물처럼 흘러도, 마음속에 굳게 박힌 약속은 돌멩이처럼 단단한 법이지요. 언젠가는 꼭 돌아올 겁니다.”
그녀의 말에 하은은 가슴 한구석이 아릿했다. 그날, 눈꽃이 만발했던 언덕 위, 둘만의 비밀스러운 자작나무 아래서 지후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하은아, 어떤 일이 있어도,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겨울 눈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날, 이 나무 아래서 다시 만나자. 그때는 우리, 함께일 거야.”
그 약속 하나로 그녀는 기나긴 세월을 버텨왔다.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는 동안에도, 지후는 늘 그녀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희미해져 가는 잔상처럼, 현실의 차가운 바람이 그 기억들을 흐트러뜨리는 것 같았다.
오랜 기다림의 끝, 혹은 시작
그때, 다방 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들어섰다. 하은의 유일한 친구이자 오랜 조력자인 세준이었다. 세준은 코트에서 눈을 털어내며 하은의 맞은편에 앉았다.
“이 추운 날, 또 여기서 얼어 죽을 생각이야? 너 이제는 네 그림에만 집중해야 할 때잖아.”
세준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는 그녀의 손에 쥐여 있던 펜을 부드럽게 가져가 내려놓았다.
“강지후 말이야… 정말 돌아왔어.”
그의 말에 하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율무차 잔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소문으로만 듣던 이야기가 세준의 입에서 나오자, 현실로 다가오는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번 주말, 강지후 건축가의 개인전이 열려. ‘겨울 눈꽃의 건축’이라는 주제로 말이야. 오랜 유학 생활을 마치고 국내에서 처음 선보이는 전시회라고 난리도 아니야.”
강지후. 그 이름 석 자가 그녀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건축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고, 그녀의 그림처럼 확고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유학길에 오르며 그들의 세상은 단절되었다.
“너… 가봐야 해, 하은아.” 세준이 진지하게 말했다. “더 이상 도망치지 마. 그 약속의 끝이 어떻든, 직접 확인해야 할 때가 왔어.”
하은은 대답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눈발은 더욱 거세어져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지우려는 듯했다. 그 약속을 직접 마주한다는 것. 그것은 그녀에게 다시 살아갈 용기가 될 수도, 혹은 모든 희망을 앗아가는 절망이 될 수도 있었다.
눈밭 위에서 마주친 그림자
주말, 갤러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온몸을 휘감은 정적 속에서 하은은 조용히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벽에 걸린 건축 모형들과 스케치들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겨울 눈꽃의 건축’. 모든 작품에서 익숙한 그리움과 그들만의 이야기가 느껴졌다.
마치 지후가 그녀에게 보내는 메시지 같았다. 특히 가장 중앙에 전시된 거대한 모형은, 눈꽃이 피어나듯 정교하게 얼음 조각처럼 얽혀 있는 구조물이었다. 그 안에는 어렴풋이 자작나무 숲이 형상화되어 있었고, 그 중심에는 작은 그림이 놓여 있었다. 그녀의 그림이었다. 어린 시절, 그 자작나무 아래서 그렸던 그녀의 첫 그림. 눈꽃처럼 반짝이는 미소가 담긴 그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이었다.
하은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는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돌아왔다. 이 모든 것이 그 약속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그때,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걸어 나왔다. 검은 코트를 입은 그는 더욱 성숙해지고, 깊어진 눈빛을 하고 있었다. 강지후였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전시장을 훑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에게 닿았다. 푸른색 조명 아래, 수많은 인파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했다. 시간은 멈추고, 주변의 모든 소음은 사라졌다.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했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놀라움, 반가움, 그리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슬픔 같은 것들.
지후는 천천히 그녀에게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수년의 기다림이 이 한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하은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얼어붙은 심장이 깨어나는 듯했다. 드디어 그가 그녀에게 닿으려 했다.
그가 바로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하은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지후야…”
하지만 그의 눈빛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뒤편, 홀 한구석에 서 있던 한 젊은 여인에게 닿아 있었다. 그 여인은 환한 미소로 지후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지후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아무런 말없이, 하은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쳐 그 여인에게로 향했다.
하은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그녀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약속. 그 기나긴 겨울의 약속. 그녀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창밖으로는 첫눈이 아닌, 이미 한겨울을 알리는 눈송이들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도 마치 그 눈꽃처럼, 한없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