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새벽 공기가 창문 틈새로 스며들어 지혜의 뺨을 스쳤다. 하지만 그녀의 뺨은 여전히 꿈속의 온기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간밤의 꿈은 마치 오래도록 품어왔던 씨앗이 마침내 눈부신 꽃으로 피어난 듯, 그녀의 메마른 가슴에 벅찬 감동과 함께 쓰라린 현실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어제, ‘꿈을 파는 상점’에서 작은 유리병에 담긴 ‘잃어버린 계절’을 건네받았을 때, 그녀는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기대감에 휩싸였다. 상점 주인은 미소 띤 얼굴로 “그 계절은 당신이 가장 그리워하는 순간의 가장 순수한 형태로 돌아올 겁니다.”라고 속삭였다. 그녀는 잠자리에 들기 전, 주인이 건넨 손바닥만 한 작은 말린 꽃잎을 꼭 쥐었다. 그 꽃잎에서는 희미하지만 익숙한, 흙과 햇살이 뒤섞인 듯한 아련한 향이 풍겼다.
잃어버린 계절의 재회
잠의 문턱을 넘어선 순간, 지혜는 시간의 강물을 거슬러 올라갔다.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어릴 적 살던 낡은 집의 정원에 서 있었다. 무성한 풀잎들 사이로 쏟아져 내리는 황금빛 햇살, 어린 그녀의 키를 훌쩍 넘는 탐스러운 나뭇가지에 걸린 낡은 타이어 그네.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하여 숨쉬는 것조차 아까울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젊고 활기 넘치던 아버지가 서 있었다. 회색빛 작업복 대신 밝은 하늘색 셔츠를 입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오랜 세월 쌓인 오해와 침묵이 만들어낸 두터운 장벽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잔잔한 개울물처럼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지혜야, 이리 와서 아빠랑 같이 그네 탈까?”
지혜는 망설임 없이 달려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여전히 따뜻하고 크고 단단했다. 아버지는 그녀를 그네에 앉히고는 힘껏 밀어 올렸다.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듯한 아찔함, 배시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가 종소리처럼 정원에 울려 퍼졌다. 아버지는 “우리 딸 최고다!”라며 활짝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걱정도, 어떤 근심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오직 순수한 사랑만이 가득했다.
오후 내내 두 사람은 정원에서 보물찾기 놀이를 하고, 나뭇가지로 작은 오두막을 만들었다. 점심으로는 엄마가 싸준 김치볶음밥을 나뭇그늘 아래서 나눠 먹었다. 아버지는 밥알 하나하나가 소중하다는 듯 천천히 씹으며 “우리 엄마가 해준 게 세상에서 제일 맛있지?”라고 물었다. 지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이 모든 순간이, 그녀의 기억 속에서는 파편처럼 흩어져 있던 조각들이 완벽하게 맞춰진 퍼즐 같았다. 아버지의 나직한 목소리, 따뜻한 눈빛,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길.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생생해서,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해 질 녘, 아버지는 지혜를 무릎에 앉히고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림 속 주인공들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지혜는 아버지의 품에 기대어 가슴 가득 채워지는 안정감과 행복에 눈을 감았다. ‘아, 이것이 내가 잃어버렸던 계절이었구나.’ 그녀는 생각했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호 아래, 세상 모든 것이 완벽했던 시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체념했던 그때의 행복감이 고스란히 그녀를 감쌌다.
꿈에서 깨어난 자리
눈을 떴을 때, 낡은 천장과 싸늘한 방 공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베개는 눈물로 축축했지만, 뺨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꿈은 사라졌지만, 그 여운은 마치 진한 향수처럼 그녀의 심장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쥐고 있던 말린 꽃잎은 이제 막 손에 쥐었을 때와 다를 바 없이 평범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았다.
지혜는 서둘러 옷을 입고 다시 상점으로 향했다. 새벽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거리에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다. 상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인은 언제나처럼 찻잔을 들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을 때, 그의 눈빛은 깊은 연못처럼 고요했지만,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잘 다녀오셨군요, 잃어버린 계절에서.” 주인이 나직이 말했다.
지혜는 탁자에 놓인 의자에 주저앉았다. “정말… 그랬어요. 너무나 생생해서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가… 아버지가 그렇게 웃는 걸 오랜만에 봤어요.”
주인은 따뜻한 차 한 잔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꿈은 단순히 과거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억이자, 어쩌면 잊고 있던 사랑의 씨앗이기도 하죠.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그 향기는 남습니다. 그리고 그 향기는 당신에게 새로운 용기를 줄 겁니다.”
지혜는 찻잔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꿈속의 아버지는 지금의 무뚝뚝하고 지쳐 보이는 아버지와는 너무나 달랐다. 하지만 그 꿈은 그녀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지금의 아버지는 세월의 풍파를 겪으며 변해버린 모습일 뿐, 한때 그녀에게 세상 전부였던 그 따뜻한 사랑은 여전히 그의 어딘가에 남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다.
“정말… 그럴까요?” 그녀는 거의 속삭이듯 물었다.
주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씨앗은 심어져야만 싹을 틔웁니다. 잃어버린 계절을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새로운 계절을 만들 수는 있죠. 중요한 건, 당신이 그 잃어버린 계절을 통해 무엇을 얻었느냐입니다.”
새로운 계절을 향하여
상점을 나선 지혜의 발걸음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무언가 단단한 것이 그녀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느낌이었다. 꿈속에서 느꼈던 아버지의 따뜻한 손길, 그의 웃음소리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남아 그녀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더 이상 과거의 오해와 서먹함 속에 머무르지 않겠다고.
집으로 돌아온 지혜는 한참을 망설이다 전화기를 들었다. 저장된 아버지의 이름 위에서 엄지손가락이 떨렸다. 수년 만에, 어쩌면 십수 년 만에 그녀가 먼저 거는 전화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녀는 꿈속 아버지의 환한 미소를 떠올리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발신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 뚜르르…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연결음이 울렸다.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고동쳤다. 이 전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상처받을 수도 있고, 혹은 오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첫걸음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꿈을 파는 상점에서 얻은 ‘잃어버린 계절’이 그녀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이제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뚜르르…
수화기 너머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낯설지만 너무나 그리운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