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준은 익숙한 지옥문 같았다. 열쇠를 돌려 현관문을 열면 텅 빈 고요함과 함께 에어컨 냄새가 아니라, 그저 싸늘하고 퀘퀘한 공기가 먼저 코끝을 스쳤다. 열여덟 층 높이, 제법 괜찮은 금액을 주고 얻은 새 아파트 1804호. 고층이라 소음도 적고 야경도 나름 근사했다. 적어도 처음엔 그랬다.
“하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현관에 구겨진 구두를 벗어 던졌다. 퇴근 후의 일상은 언제나 비슷했다. 피곤에 절은 몸을 이끌고 거실 한가운데 놓인 카펫 위로 쓰러지듯 앉아 벽걸이 TV를 틀었다. 뉴스는 세상이 여전히 지옥임을 알려주고 있었고, 드라마는 뻔한 연애담을 지껄였다. 그는 그 모든 것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 한 캔을 꺼냈다. 시원한 금속 캔이 손에 닿는 순간, 작은 의문이 스쳤다. 분명 어제 맥주를 꺼내 마시고 남은 한 캔은 가장 안쪽에 넣어두었는데, 지금 꺼낸 캔은 가장 바깥쪽에 놓여 있었다. ‘내가 어제 취했었나?’ 민준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캔을 땄다. ‘쉬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탄산 기포가 올라왔다. 한 모금 들이키자 쌉쌀한 맛이 혀를 적셨다.
맥주를 마시며 대충 저녁을 때우고 샤워를 마쳤다. 거실로 나왔을 때, 그는 무심코 책상 위를 봤다. 어제 읽다 만 소설책이 분명 책상 가운데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책상 모서리 끝에 위태롭게 걸쳐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건드린 것처럼.
“뭐야… 내가 이렇게 칠칠치 못했나.”
피곤한 나머지 착각했을 거라 여기며 책을 제자리에 옮겨놓았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고개를 돌렸다. 거실의 작은 스탠드 조명이 스스로 꺼졌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스탠드는 분명 고장 난 적이 없었고, 스위치도 건드리지 않았다.
“뭐지? 전등 나갔나?”
그는 애써 침착한 척 스탠드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불이 들어왔다. 다시 ‘딸깍’, 불이 꺼졌다. 마치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민준은 헛웃음을 지었다. 층간 소음 같은 건 몰라도, 전압 불안정 같은 건 있을 수 있다고 들었다.
그날 밤, 민준은 잠자리에 들었지만, 왠지 모를 불안감에 뒤척였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 때문이었다. ‘쿵, 쿵…’ 규칙적인 소리는 아니었다. 마치 어딘가에서 물건을 떨어뜨리는 듯한, 혹은 무언가에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베개로 귀를 막았지만, 소리는 더욱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민준은 눈 밑이 검게 드리워진 채 거실로 나왔다. 어젯밤의 소동 때문이었다. 그런데, 거실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식탁 위의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고, TV 리모컨은 소파 등받이에 박혀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벽에 걸린 그의 유일한 가족사진 액자가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단순히 떨어진 것이 아니라, 벽에 비스듬히 걸린 채로.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민준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도둑? 그럴 리 없었다.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도둑이라면 이렇게 물건을 부수기만 하고 값나가는 건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는 손을 떨며 휴대폰을 꺼내 경비실에 전화했다.
“1804호인데요… 밤사이에 누가 침입한 것 같습니다. 집안이 난장판이 됐어요.”
“1804호요? 저희 순찰 돌 때 별다른 이상은 없었습니다만… CCTV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시 후, 경비실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CCTV에는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다고 했다. 민준이 아파트를 나선 후부터 다시 돌아올 때까지, 18층 복도에는 어떤 사람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고.
그날부터 민준의 삶은 지옥이 되었다.
사건은 점점 더 기괴하고 대담해졌다. 처음에는 단순한 물건 이동이나 소음이었다면, 이제는 직접적인 위협으로 변해갔다.
어느 날 저녁, 그는 샤워를 하고 있었다. 따뜻한 물줄기가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순간, 욕실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문이 잠겨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에서 잠긴 것처럼.
“이봐! 누구야! 장난치지 마!”
그는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정적뿐이었다. 문이 안에서 잠겨 있는데,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그를 공포에 떨게 했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 간신히 문을 열 수 있었다. 욕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불안정한 숨소리만이 벽을 울렸다.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 누우면, 발치에서 ‘슥슥’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가 침대 밑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이불을 걷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제발… 제발 사라져 줘…”
그는 중얼거렸다. 그러자 침대 밑에서 ‘크르르릉’ 하는, 마치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밤새도록 눈을 감지 못했다.
가장 끔찍했던 것은, ‘그것’이 자신을 인식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아침, 식사를 하려던 민준은 접시에 놓인 빵 위에 ‘떠오른’ 글자를 보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잼으로 쓰인 글자는 아니었다. 마치 빵가루가 스스로 모여 글자를 이룬 것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단어는 바로 그의 이름이었다.
**’민.준.’**
그는 비명을 지르며 접시를 바닥에 내던졌다. 빵은 산산조각 났지만, 그 글자는 그의 눈에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것’은 그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와 소통하려 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퇴근 후 아파트에 들어가는 것을 극도로 꺼리게 되었다. 집 대신 근처 찜질방을 전전했지만, 찜질방 천장을 보며 누워 있을 때도 ‘그것’이 그의 아파트에서 어떤 기괴한 짓을 벌이고 있을지 상상하며 잠 못 이루었다.
사태가 극에 달한 건, 그가 며칠 만에 용기를 내어 아파트로 돌아갔던 날 밤이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싸늘하고,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는 정체 모를 액체가 흥건했고, 천장에서는 뚝뚝 소리를 내며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물은 아니었다. 붉고 검은, 끈적이는 액체였다.
“이… 이건…”
민준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벽에는 끔찍한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누군가 손톱으로 긁어놓은 듯한 자국은 아니었다. 마치 벽 자체가 스스로 찢어진 것처럼, 가느다란 균열들이 모여 마치 고통받는 사람의 얼굴을 연상시키는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그 얼굴은 입을 크게 벌리고 마치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그는 겨우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뎌 거실로 향했다. 거실은 이미 생지옥이었다. 모든 가구는 뒤집히고 부서져 있었으며, 유리 조각이 박힌 바닥 위로 붉고 검은 액체가 마치 핏자국처럼 번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뼈가 타는 듯한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그때,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던 그의 낡은 소파가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들린 것처럼, 소파는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그대로 벽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콰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소파는 벽에 박혀 산산조각이 났다. 벽에는 소파의 형태가 그대로 찍혀 있었다.
“악!”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현관문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무리 돌려도 열리지 않았다. 마치 문이 벽에 녹아들어 버린 것처럼.
“열려! 열라고!”
그는 미친 듯이 문을 두드렸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숨결이 느껴졌다. 차갑고, 습하고, 섬뜩한 숨결이었다. 마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처럼. 민준은 감히 뒤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누… 누구야… 제발…”
그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그때, 거실 바닥에서부터 검은 그림자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먹물처럼 번져나가는 그림자는 천천히 형태를 갖춰갔다. 키가 크고 왜소한, 그리고 어딘가 뒤틀린 형체. 그것은 인간의 형상과 흡사했지만, 팔다리가 비정상적으로 길었고, 얼굴은 마치 캔버스에 물감을 마구 흩뿌린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것은 천천히 민준에게 다가왔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끈적이는 그림자가 바닥을 타고 미끄러지듯 움직일 뿐이었다. 민준의 심장은 터질 듯이 뛰었고, 온몸의 털은 바늘처럼 곤두섰다.
그림자 같은 존재가 그에게 손을 뻗었다. 길고 앙상한 손가락 끝에는 날카로운 무언가가 달려 있는 듯했다. 민준은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는 있는 힘껏 문고리를 돌렸다.
그 순간, 문고리가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그리고 문이, 마치 스스로 열리듯 안쪽으로 활짝 열렸다.
민준은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18층 복도를 미친 듯이 달렸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몸을 던지듯 안으로 들어갔고, 닫힘 버튼을 연달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직전, 그는 거울 같은 엘리베이터 문틈으로 비친 자신의 아파트 1804호 현관문을 보았다.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점이 마치 사냥꾼의 눈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민준은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경비실에 달려가 사정을 설명했지만, 경비원은 그를 미친 사람 보듯 할 뿐이었다. 그는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이 1804호에 도착했을 때, 아파트는 완벽하게 깨끗한 상태였다. 파손된 가구도, 붉은 액체도, 벽에 새겨진 끔찍한 형상도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는 아파트 계약을 해지하고 도시를 떠났다.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하지만 잊을 수 없었다.
어디를 가든 그는 늘 시선을 느꼈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번화한 거리의 인파 속에서, 심지어 홀로 잠든 그의 방 안에서도.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그는 자신의 손등에 붉은 잼으로 쓰인 듯한 글자를 발견했다.
**’민.준.’**
그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아파트에만 갇혀 있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와 함께 이 도시를 떠났고, 이제는 그의 그림자처럼 영원히 그를 따라다닐 것이다. 그는 도망칠 수 없었다. 단지 그 싸늘한 그림자를 느끼며, 살아갈 뿐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희미한 ‘딸깍’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스탠드 조명이 꺼지는 소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