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꿈을 꾸는 동안에도 사비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창밖으로 새벽이 찾아오고 있었지만, 나의 침대는 여전히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어제의 대화가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한 조각 안개처럼 피어올랐다가, 이내 사비의 맑은 눈동자와 나직한 목소리를 떠올리며 사라졌다. 그 아이는 실재했다. 그리고 우리는 대화했다.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갔다. 익숙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창틀 아래, 고개를 든 사비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털은 밤이슬에 살짝 젖어 있었지만, 그 눈빛은 어제보다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비는 마치 내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아주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말했다.
“늦게 일어나는군. 배가 고파.”
그 덤덤한 투에 나는 그만 웃음이 터져 버렸다. 어젯밤의 경이로움과 혼란스러움이 간밤에 어느새 편안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재빨리 사료 그릇을 들고 현관으로 나섰다. 사비는 멀찍이 떨어져 앉아 내가 그릇을 내려놓기를 기다렸다. 어미가 아기에게 먹이를 주듯, 조심스럽게 그릇을 놓자 사비는 기다렸다는 듯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사비가 밥을 먹는 동안 나는 그 작은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얼마나 많은 밤을 배고픔에 시달렸을까. 얼마나 많은 날들을 혼자 견뎌냈을까. 나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함이 피어났다. 문득, 사비의 목소리가 밥그릇에서 들려왔다.
“맛있군. 이 맛은… 오랜만이야.”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랜만이라니? 전에는 이런 밥을 먹어본 적이 없니?”
사비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밥을 먹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알까지 깔끔하게 비운 뒤, 혀로 입가를 슥 핥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묘한 상념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하더니,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따뜻한 집에서 살던 때가 있었어.” 사비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거기에도 이런 맛있는 밥이 있었지. 하지만… 길은 달랐어. 그때는 몰랐지. 세상이 얼마나 넓고, 또 얼마나 차가운지.”
그의 이야기에 나의 심장이 저릿했다. 버려진 것일까, 아니면 길을 잃은 것일까. 어떤 사연이 이 작은 존재를 거리로 내몰았을까. 나는 차마 더 깊이 물을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기로 했다.
“하루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어. 작은 몸으로 숨을 곳을 찾다가 낡은 상자 안에 겨우 몸을 웅크렸지. 몸은 차갑고, 배는 고프고…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사비는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듯 몸을 살짝 움츠렸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우산을 쓰고 내게 다가왔어. 발소리가 들렸지.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숨죽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상자 앞에 무언가를 내려놓고 조용히 사라졌어.”
나는 숨을 멈추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건 통조림이었어. 아주 작고 따뜻한 통조림. 내가 그때까지 먹어본 어떤 것보다 맛있었지. 그날 이후로 나는 희망이라는 걸 알게 됐어. 이 세상이 마냥 차갑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사비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믿어. 전부 다 나쁜 건 아니니까. 너처럼 말이야.”
그의 마지막 말에 나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내가 이 작은 생명에게 어떤 존재일까. 나는 그저 배고픈 고양이에게 밥을 준 것뿐인데, 그는 나를 ‘희망’을 알려준 그 사람과 동등하게 보고 있었다. 나의 존재가 이렇게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니. 알 수 없는 감동이 밀려왔다.
사비는 밥그릇 주위를 빙글빙글 돌더니, 뒷다리에 몸을 실어 앞발로 얼굴을 쓱쓱 문질렀다. 그리고는 담장 위로 훌쩍 뛰어올라 멀리 보이는 언덕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어. 할 일이 많거든.”
“할 일이라니? 무슨 일인데?” 나는 궁금증에 사로잡혀 물었다.
사비는 피식 웃었다. “길고양이의 할 일이지. 순찰도 해야 하고, 새로운 맛집도 찾아야 하고, 잠자리도 물색해야 하고… 바쁜 몸이야.”
그의 말에 나는 또다시 웃음이 터졌다. 그렇게 말하고도 사비는 한참을 담장 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깊고, 알 수 없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 듯했다. 그러다 이내 몸을 돌려 유연하게 담장을 넘어 사라졌다. 작은 생명이 남긴 온기가 내 마당에 여전히 머무는 듯했다.
사비가 떠난 뒤에도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 삶은 고요하고, 때로는 외로웠다.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나의 시간은 마치 고여 있는 물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런데 사비와의 짧은 대화는 그 고요함에 작은 돌멩이를 던져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 잊고 있던 따뜻함과, 세상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작은 창을 열어주었다.
나는 문득, 내가 사비를 돌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비가 나의 마음을 돌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나에게 질문하고, 나는 그를 통해 답을 찾아가는 듯했다. 외로웠던 나의 마음에 찾아온 이 작은 고양이. 그와의 대화는 이제 막 시작된 나의 새로운 삶의 한 페이지였다. 그리고 나는 다음 이야기가 너무나도 궁금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