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훈은 낡은 다이어리를 다시 펼쳤다. 겹겹이 쌓인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희미해진 기억들, 그 조각들 사이에서 은서를 찾아 헤맨 지난한 날들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다. 찢어진 사진 조각, 흐릿한 손글씨, 그리고 어제 어렵사리 얻어낸 한 통의 전화번호. 정보는 너무나도 파편적이었지만, 지훈은 작은 실마리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절박함으로 그 번호를 부여잡았다.
오늘 만날 사람은 은서와 같은 대학교를 다녔던 김민준이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지훈은 은서의 오래된 졸업 앨범에서 민준의 얼굴을 찾아냈고, 몇 주간의 탐문 끝에 그의 현재 연락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어쩌면 민준은 은서가 사라진 후의 삶에 대한 유일한 목격자일지도 몰랐다. 지훈의 심장은 불안과 기대감으로 뒤섞인 낯선 박동을 이어갔다.
새로운 그림자
오후 다섯 시, 지훈은 약속 장소인 작은 카페 창가에 앉아 김민준을 기다렸다. 거리의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퇴근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에서 피어나는 김이 안경알을 살짝 뿌옇게 만들었지만, 지훈의 눈은 카페 문만을 향해 있었다. 초조함은 어느새 익숙한 감정이 되어버렸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앨범 속 젊은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더한, 서른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지훈과 눈이 마주치자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한지훈 씨 맞으시죠? 김민준입니다.”
“네, 김민준 씨.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지훈은 악수를 청하며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민준은 지훈의 건너편 자리에 앉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연락이 올 줄은 몰라서요. 은서 때문에 저를 찾아오셨다고 들었는데….”
지훈은 망설임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네, 맞습니다. 저는 한은서 씨의 어릴 적 친구이자… 첫사랑입니다. 오랫동안 그녀를 찾고 있습니다. 실례인 줄 알지만, 혹시 은서 씨에 대해 아시는 것이 있으실까 해서….”
민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먼 곳을 응시하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은서… 그녀와는 졸업하고 몇 년 정도 연락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겼어요. 많이 힘들어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힘들어했다고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지훈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잃어버린 시간 속에 은서가 겪었을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듯했다.
민준은 한숨을 쉬었다. “정확히는 저도 잘 모릅니다. 저희가 같이 과외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그 과외 학생 쪽에서 좀 복잡한 일이 생겼던 것 같아요. 은서가 그 일에 휘말려서 많이 힘들어했고, 결국 과외를 그만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을 떠났습니다. 연락처도 바뀌었고요.”
서울을 떠났다. 그 단순한 문장이 지훈의 가슴을 후벼 팠다. 은서가 그에게서 멀어진 것이 단순히 운명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힘들게 했던 어떤 사건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는 알 수 없는 죄책감에 휩싸였다. 자신이 그녀 곁에 있었더라면 막아줄 수 있었을까.
“혹시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지훈은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그의 손은 무릎 위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통화했을 때, ‘잠시 조용한 곳에서 쉬고 싶다’고 했었어요. 아마 작은 도시나 시골 쪽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 했어요. 이름까지 바꿀까 고민했었고요.”
이름까지… 바꾼다고? 지훈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은서는 어떤 고통을 겪었기에 그토록 자신을 지우려 했을까. 그는 은서가 아파했던 시간들을 상상하며 가슴이 저려왔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은서의 모습은… 정말 많이 지쳐 보였습니다. 늘 밝았던 아이였는데, 눈빛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죠. 다시 만나게 된다면… 많이 달라져 있을 수도 있습니다.” 민준의 말은 지훈의 기대감 위에 차가운 물을 끼얹는 듯했다. 은서가 예전의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그에게 또 다른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래도… 그녀가 어디에라도 있다면… 제가 찾을 수 있다면…” 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혹시 마지막으로 들었던 단서 같은 건 없었을까요? 어떤 직업을 가졌을 것 같다거나, 어떤 동네 분위기라거나… 아주 작은 거라도 좋습니다.”
민준은 한참을 망설였다. “음… 정말 희미한 기억인데… 그녀가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는… 어쩌면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그런 일. 그리고 조용한 바닷가 마을을 좋아했습니다. 뜬금없이 ‘바닷바람이 그립다’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확실하지 않습니다.”
바닷가 마을, 예술과 관련된 일. 민준의 파편적인 정보는 지훈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동시에 거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녀는 정말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찾았을까? 그리고 그 삶 속에서 과연 행복했을까?
파도 소리, 낯선 그림자
민준과의 대화가 끝나고, 지훈은 카페를 나와 밤거리로 걸어 나왔다. 정보는 많지 않았지만, 지난 수년간의 막막함에 비하면 실로 엄청난 진전이었다. 그녀가 서울을 떠났다는 것, 아픔을 겪었다는 것, 그리고 바닷가 마을에서 예술과 관련된 일을 찾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지훈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퍼즐 조각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그는 차에 올라탔지만, 곧바로 시동을 걸지 못했다. 운전대 위로 떨어진 시선은 젖어 있었다. 은서가 겪었을 아픔을 상상하자 마음이 너무나 아팠다. 자신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녀의 시간이, 사실은 고통으로 얼룩져 있었다는 사실이 비수처럼 박혔다. 그리고 그녀가 ‘완전히 새로운 삶’을 원했다는 말은, 그를 향한 문을 닫아버린 것만 같아 절망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탐정 한지훈 이전에, 그녀를 잃어버린 시간을 후회하는 한 남자였다.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그녀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를 알아야만 했다. 설령 그녀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설령 그녀가 자신을 원치 않는다 해도, 그는 그녀의 그림자라도 쫓아가야만 했다.
지훈은 스마트폰을 꺼내 전국 지도를 펼쳤다. 수많은 해안 도시와 마을들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까. 그의 머릿속에서는 은서의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파도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차가운 바닷바람이 그녀의 아픈 기억을 씻어냈기를.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가 새로운 행복을 찾았기를. 그는 간절히 빌었다.
탐정 사무실로 돌아온 지훈은 밤늦도록 바닷가 마을과 관련된 자료들을 검색했다. 예술 공동체가 있는 곳, 작은 갤러리나 공방이 많은 곳, 외부인의 유입이 적고 조용한 곳. 수많은 정보들 속에서 그는 은서의 흔적을 찾으려 애썼다.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기 위한 그의 여정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드넓은 바다처럼 막막하지만, 동시에 희미한 등대 불빛이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는 다시 다이어리를 펼쳐 은서의 사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은서야… 네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든,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꼭 찾을게. 이번에는 놓치지 않을 거야.”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파도 소리가 들리는 곳, 그곳이 새로운 시작이 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