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낭만의 폐허, 식량창고는 내 것

“젠장, 또 닭고기 맛 영양 페이스트잖아!”

침대 아닌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눈앞의 튜브형 식량을 노려봤다. 일용할 양식이자, 내 생존을 책임지는 가장 기본적인 존재. 하지만 벌써 사흘째 닭고기 맛이다. 어제는 소고기, 그제는 치킨 맛이었으니, 사실상 다를 바 없는 단백질 덩어리였다. 입맛이라는 사치스러운 감각은 진작에 잊었어야 했지만, 이놈의 뇌는 여전히 ‘바삭한 돈가스’나 ‘뜨끈한 칼국수’ 같은 환상을 꾸어대는 통에 아침마다 곤욕스러웠다.

창문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널빤지로 겨우 가려진 틈새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었다. 물론 ‘햇살’이라는 표현도 과거의 잔재일 뿐, 사실은 뿌옇고 탁한 대기를 뚫고 들어오는 희미한 빛 줄기에 불과했다. 먼지가 자욱한 방 안은 어제와 다를 바 없었다. 벽에는 넝쿨 식물들이 시커멓게 뒤덮여 있었고, 천장에서는 뚝, 뚝, 빗물이 새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나는 낡은 매트리스를 걷어내고 바닥에 고인 물을 대충 닦았다. 물은 귀했지만, 이 정도는 마실 물 축에도 끼지 못했다.

“오늘도 생존.”

어제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말을 다시 한번 되뇌었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낡은 방탄 조끼를 걸쳤다. 허리춤에는 칼과 호신용 스프레이, 그리고 나름대로 개조한 쇠 파이프를 꼈다. 등에는 내용물은 없지만 언제나 묵직한 배낭을 멨다. 비상식량 한 개와 물 한 병. 그게 오늘 내가 챙길 수 있는 전부였다. 내 이름은 미나. 스물 여섯, 폐허에서 살아남은 지 5년째다.

“오늘의 목표는… 통조림!”

식량창고가 절실했다. 영양 페이스트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더 이상 이런 식으로는 못 살 것 같았다. 지난 주에 들었던 소문이 떠올랐다. 이 근처 버려진 지하 상가 어딘가에 대량의 통조림 창고가 남아있다는 이야기였다. 식량 보존 기술이 극도로 발달했던 재앙 이전 시대의 유물이라면, 아직 먹을 만한 가치가 있을지도 몰랐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축축한 흙냄새, 그리고 어딘가 알 수 없는 금속의 비릿한 내음이 코를 찔렀다. 내가 사는 건물은 한때는 번화가에 있던 주상복합 건물이었지만, 이제는 흉물스러운 폐허가 되어버렸다. 넝쿨 식물들은 시멘트 벽을 뚫고 솟아나 빌딩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고, 깨진 유리창 사이로는 희고 뿌연 안개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발밑에는 깨진 유리 조각과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밟혔다. 쨍그랑, 바스락. 매번 익숙한 소음이었다. 낡은 방탄화는 이미 바닥이 너덜너덜해졌지만, 그래도 발을 보호하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옮겼다. 간혹 보이는 다른 생존자들은 대부분 나처럼 홀로 다니거나, 소규모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눈이 마주치면 피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이 폐허에서는 살아남는 것이 곧 약탈자를 피하는 것이기도 했으니까.

“지하 상가… 이 근처였지.”

나는 낡은 지도를 꺼내 들었다. 재앙 이전 시대의 종이 지도는 이제 물에 젖어 글씨가 흐릿했지만,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할 수 있었다. 거대한 싱크홀이 생긴 도심 한복판을 지나, 앙상한 철근 구조물만 남은 건물들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목적지는 ‘미라클 쇼핑몰’이라고 적힌 폐허였다. 간판은 거의 떨어져 나갔지만, 어렴풋한 글씨는 알아볼 수 있었다.

입구는 거대한 바위와 콘크리트 잔해로 막혀 있었다. 낑낑대며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철근이 뒤틀린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내부 공기는 더 차갑고 습했다. 흙먼지와 부식된 철 냄새가 뒤섞여 역한 악취를 풍겼다. 나는 휴대용 손전등을 켰다. 낡은 쇼핑몰 내부는 마치 거대한 유령선 같았다. 망가진 마네킹들이 듬성듬성 서 있고, 옷가지들은 곰팡이가 슬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통조림, 통조림….”

한 칸 한 칸 조심스럽게 탐색했다. 과거의 식료품 코너는 이미 텅 비어 있었다. 쥐와 다른 소형 동물들이 흔적만 남긴 채 쓸고 지나간 듯했다. 한참을 헤매다, 마침내 지하로 통하는 낡은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은 철근이 드러나 위태로워 보였지만, 희미한 희망이 나를 끌어당겼다.

“드디어…!”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자, 갑자기 코를 찌르는 묘한 냄새가 풍겨왔다. 기름 냄새 같기도 하고, 흙먼지 같기도 한… 역겨운 동시에 이상하게 달콤한 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둔탁한 소음. 누군가 이미 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재빨리 쇠 파이프를 움켜쥐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발소리를 죽였다. 복도 끝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틈새로 안을 들여다봤다.

“뭐… 뭐야 저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거대한 창고 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통조림 박스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재앙 이전 시대의 화려한 라벨들이 아직 선명하게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한 남자가 거대한 해머를 들고 통조림 박스를 부수고 있었다.

“야! 이 미친놈아!”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남자는 고개를 휙 돌렸다. 흙먼지로 뒤덮인 작업복 차림에, 기름때 묻은 얼굴. 덥수룩한 머리카락 사이로 날카로운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내가 들고 있는 쇠 파이프를 힐끗 보더니, 거대한 해머를 어깨에 척 걸쳤다.

“누구세요? 여긴 제가 먼저 찾았습니다.”

남자의 목소리는 예상과 달리 차분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뻔뻔함에 어이가 없었다.

“먼저 찾았다고? 박스를 다 때려 부수고 있는데 그게 먼저 찾은 거야? 멀쩡한 통조림이 얼마나 귀한 줄 알아?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아, 이거요? 이 박스들은 내용물이 다 상했어요. 보세요.”

그는 해머로 부서진 박스 하나를 발로 툭 차며 말했다. 박스 안에는 부풀어 오르거나 터진 통조림들이 가득했다. 끈적하고 퀴퀴한 액체가 흘러나와 바닥을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어떤 멍청이가 이런 썩은 걸 가져갔겠어요. 난 멀쩡한 걸 찾는 중입니다. 썩은 건 걸러내고 새 박스를 찾는 게 더 빠르죠.”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해머를 휘둘렀다. 쾅! 쾅! 통조림 박스들이 터져 나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렇게 무식하게 굴다간 멀쩡한 것마저 다 망가지잖아!

“이봐요, 이보세요! 그렇게 할 거면 나한테 맡겨요! 내가 더 효율적으로 멀쩡한 것만 골라낼 수 있다고요!”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무식하게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저 남자보다는 내 섬세한 손길이 훨씬 빠를 것이라고 확신했다.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호기심과 함께 약간의 비웃음이 서려 있는 듯했다.

“효율적? 당신 같은 여자 혼자서 이 많은 통조림을 어떻게 다 검수하는데요? 여기 있는 거 다 부수는 게 훨씬 빠를 텐데.”

“뭐? 당신은 여자 무시해? 재앙 이후에 남녀 구분이 어디 있어! 그리고 당신처럼 무식하게 다 부수는 것보다, 눈으로 식별해서 버릴 건 버리고 살릴 건 살리는 게 훨씬 빠르다고!”

나는 흥분해서 삿대질을 했다. 그는 내 말에 피식 웃더니 해머를 내려놓았다.

“그래요? 그럼 한번 해보세요. 당신이 얼마나 효율적인지.”

그는 팔짱을 끼고 나를 지켜봤다. 나는 그의 도전에 이를 갈았다. 그래, 두고 봐라. 이 미나 님의 눈썰미와 손기술을 보여줄 테니까!

나는 곧장 박스 더미로 달려갔다. 쌓여있는 박스들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살짝이라도 찌그러지거나 부풀어 오른 것은 과감히 버리고, 멀쩡해 보이는 것들만 골라냈다. 간혹 보이는 긁힌 자국이나 녹슨 부분도 놓치지 않았다. 옆에 서 있는 남자는 여전히 팔짱을 낀 채였다.

“이건 버려요. 바닥이 살짝 부풀었어요.”

“이것도요. 옆구리가 찌그러졌어요.”

내가 빠르게 외치자 남자는 별다른 말없이 내가 지목한 통조림들을 해머로 ‘쾅!’ 하고 터트렸다. 그의 해머질은 여전히 위협적이었지만, 이제는 나름의 규칙이 생겼다. 그가 때려 부수지 않고 고이 모아둔 박스들이 제법 쌓였다.

“음, 생각보다 괜찮네요.”

그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칭찬이 흘러나왔다.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하지. 내가 누구게? 살아남기 위해선 이 정도 눈썰미는 기본이지. 자, 이것도 버려요.”

“아, 그건 제가 살리려고 했던 건데.”

남자가 내가 버리려던 통조림 하나를 붙잡았다. 캔 표면은 깨끗했지만, 내가 놓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자세히 봐요. 여기, 미세하게 땀구멍처럼 녹이 슬어있잖아. 이런 건 백이면 백 안에서 부패하기 시작한 거라고.”

나는 그의 손에 들린 통조림을 가리켰다.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통조림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러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해머로 내리찍었다. 콰직! 역시나, 안에서 썩어 문드러진 내용물이 터져 나왔다.

“흥, 이제 내 말이 맞다는 걸 알겠어요?”

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남자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빛 속에는 더 이상 비웃음이 없었다. 대신, 뭔가 흥미롭다는 듯한, 혹은 탐색하는 듯한 묘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미나.”

나는 갑자기 들려온 내 이름에 깜짝 놀랐다. 그는 어떻게 내 이름을 아는 거지?

“어… 어떻게 내 이름을…?”

“이쪽.”

그는 손가락으로 내 조끼에 달린 낡은 인식표를 가리켰다. ‘미나, 생존자 등록번호 P-170302’라고 적힌 글씨가 흐릿하게 보였다. 젠장, 저걸 까먹었네.

“제 이름은 강우입니다.”

그는 짧게 자기소개를 했다. 강우. 그의 이름은 그의 무뚝뚝한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다정했다.

“미나 씨의 감별 능력은… 꽤 탁월하네요. 저 혼자서는 이렇게 빨리 못했을 겁니다.”

칭찬이라기엔 무뚝뚝하고, 비꼬는 것 같지는 않은 묘한 어투였다. 그래도 칭찬은 칭찬이었다. 나는 괜히 뿌듯해져서 어색하게 웃었다.

“그럼 이제… 저 통조림들은 내 거야!”

나는 그가 고이 모아둔 멀쩡한 통조림 박스들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강우는 그 박스들을 발로 막아서며 나를 멈춰 세웠다.

“어이, 잠깐만요. 우리가 같이 작업했으니, 이 통조림은 공동 소유가 아닙니까?”

“뭐? 말도 안 돼! 누가 더 많이 일했는데! 내가 없었으면 당신은 저걸 다 박살 내고 있었을걸!”

나는 억울함에 소리쳤다. 내 섬세한 손길과 예리한 눈썰미가 없었다면 저 멀쩡한 통조림들은 이미 썩은 것들과 함께 잿더미가 되었을 터였다.

강우는 한숨을 쉬더니, 멀쩡한 박스 하나를 발로 툭 밀었다.

“그럼, 이 박스 하나는 미나 씨가 가져가세요. 나머지는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박스 하나? 저 산더미 같은 통조림 박스 중에 겨우 하나라고?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뭐라고? 겨우 하나? 이 비열한 약탈자 같으니라고! 저 많은 것 중에 겨우 하나를 내놓으겠다고?”

“약탈자라니, 이 작업은 전적으로 제가 제안했고 미나 씨가 동의한 거 아닙니까? 그리고 애초에 이 창고는 제가 먼저 발견했습니다. 제가 통조림 하나라도 내어주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죠.”

강우는 아주 논리적이고도 뻔뻔하게 말했다.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내가 먼저 이 창고를 찾지 못한 것은 사실이니까.

“치사하다, 치사해! 이렇게 많으면 적어도… 적어도 세 개는 줘야지!”

“하하, 미나 씨. 흥정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강우는 빙긋 웃었다. 그의 웃음은 조금 놀랄 만큼 훈훈했다. 그러나 나는 그 웃음 뒤에 숨겨진 그의 뻔뻔함을 놓치지 않았다.

“두 개. 딱 두 개면 타협하죠.”

나는 마지막 협상 카드를 내밀었다. 눈앞에 쌓인 통조림들을 보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닭고기 맛 영양 페이스트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였다.

강우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두 개. 다음부터는 제 허락 없이 제 구역에 들어오지 마세요. 알겠죠?”

나는 그의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통조림 두 개를 얻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흥, 당신 구역? 이 넓은 폐허에 구역이 어디 있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이곳은 제 구역입니다. 당신은 초대받은 손님이었고요.”

강우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미소는 분명히 나를 놀리는 듯했다. 나는 그에게 삿대질을 하며 이를 갈았다.

“그래! 오늘은 내가 참는다! 다음엔 절대 안 봐줄 거야!”

나는 통조림 두 캔을 겨우 챙겨 들고 뒤돌아섰다. 그의 등 뒤로 들려오는 강우의 능글맞은 목소리가 내 귀를 맴돌았다.

“벌써부터 다음을 기약하시다니, 저에게 반한 건가요?”

“헛소리 작작 해!”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재빨리 폐허 밖으로 뛰쳐나갔다. 통조림 두 캔. 오늘 하루의 수확이었다. 썩은 것들 사이에서 건져낸 작은 보물.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온몸이 땀으로 끈적했지만, 그래도 발걸음은 가벼웠다.

“강우라… 저 미친놈. 언젠가 내가 저놈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말 거야.”

나는 중얼거렸다. 폐허는 여전히 잿빛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오늘 하늘은 좀 더 선명해 보였다. 손에 든 통조림 캔에서 희미하게 고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드디어 닭고기 맛 영양 페이스트 지옥에서 벗어나는 건가! 나는 환호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곧, 또다시 강우와 마주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은 애써 외면했다. 폐허에서의 생존은, 그렇게 예상치 못한 만남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만남은 때로는 낭만적인 개소리가 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