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 칙- 콰아앙!
김이 섞인 금속 마찰음이 거대한 지하 공간을 울렸다. 카이는 너비 십여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강철 문 앞에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았다. 코끝을 스치는 습하고 곰팡이 냄새는 익숙했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끈적하게 느껴졌다.
“젠장, 이놈의 문은 정말이지… 온갖 꼼수를 써도 씨알도 안 먹히는군.”
카이는 낡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허리에 찬 공구 주머니를 뒤적였다. 조그만 망치와 렌치, 정체불명의 증기 압력계 따위가 주머니 안에서 서로 부딪히며 짤랑거렸다. 그의 눈은 녹슨 강철 문에 새겨진 정교한 기하학적 문양을 훑었다. 분명 단순한 문이 아니었다. 거대한 톱니바퀴와 연결된, 어떤 동력원을 필요로 하는 장치임이 틀림없었다.
“이게 몇 번째 시도였지, 렌?”
카이가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오렌지빛 증기등을 든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렌이었다. 늘 말쑥한 차림을 고수하는 그는 이런 먼지투성이 폐허에서도 단정한 작업복 차림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온갖 정교한 기계 부품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고, 한쪽 손에 든 증기등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미약하게 ‘칙- 칙-‘ 소리를 내고 있었다.
“카이, 당신이 또 망가뜨리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할 겁니다.”
렌은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의 안경 너머로 빛나는 눈은 정확히 문의 연결 부위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 문은 단순한 물리적 힘으로는 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꼼수’는 이미 3시간 전에 한계에 도달했죠.”
카이는 렌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이제 당신 차례 아닌가? 천재 공학자 렌 씨? 이 문을 뚫고 들어가면, 분명 우리가 찾던 ‘시간의 톱니바퀴’에 대한 실마리가 있을 거야.”
렌은 말없이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시선은 문의 중앙에 위치한, 복잡하게 얽힌 증기 파이프와 톱니바퀴 모형을 훑었다. 섬세한 손가락이 녹슨 구리 파이프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보십시오, 이 기압 조절 밸브는 완전히 고착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저쪽의 주 증기 공급관은 누가 의도적으로 막아놓은 흔적이 있군요.”
“누군가 우리보다 먼저 이곳을 탐사했다는 뜻인가?” 카이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니요, 카이. 어쩌면 이 문을 만들었던 고대인들이 이곳을 봉인하며 취했던 조치일 수 있습니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말이죠. 이 복잡한 기계장치는… 단순히 문을 열기 위함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인 것 같습니다.”
렌의 손이 톱니바퀴 모형에 달린 작은 레버로 향했다. 그는 주머니에서 얇고 정교한 도구를 꺼내 레버 주변의 이물질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젠장, 고대인들은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을까? 그냥 평범한 자물쇠를 쓰면 어디가 덧나나.” 카이가 투덜거렸다.
렌은 피식 웃었다. “그들에게는 이것이 ‘평범한’ 자물쇠였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지식에 미치지 못할 뿐이죠.”
렌은 조심스럽게 레버를 당겼다. ‘딸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레버가 반 바퀴 돌아갔다. 그러자 문의 곳곳에 박혀있던 작은 렌즈들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렌은 재빨리 다음 밸브로 손을 옮겼다. 그의 움직임은 정확하고 빨랐다.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거장처럼 보였다.
“좋아… 이대로라면 주 증기 공급관에 압력을 다시 불어넣을 수 있겠군.”
렌이 허리에 찬 작은 증기 엔진을 꺼내들었다. ‘푸쉬쉬쉬…’ 엔진에서 가느다란 증기 분사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엔진 끝에 달린 호스를 문 옆의 주 증기 공급관에 연결했다.
“자, 카이.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렌이 말했다. “이 밸브를 당신의 팔 힘으로 끝까지 돌려야 합니다. 고착된 압력을 순간적으로 풀어주면서, 동시에 증기를 공급해야 합니다. 타이밍이 중요해요. 10초 안에 끝내야 합니다.”
그가 가리킨 곳은 성인 남성 두 명이 겨우 매달릴 만한 거대한 구리 밸브였다. 녹슬고 묵직해 보이는 그 밸브는 어지간한 괴력이 아니고서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카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겨우 그 정도인가? 그럼 됐어. 내게 맡겨.”
그는 밸브 앞으로 다가섰다. 굵고 단단한 팔뚝의 근육이 꿈틀거렸다. 렌은 뒤에서 초시계를 꺼내들었다.
“준비… 시작!”
렌의 외침과 동시에 카이는 밸브를 잡고 온 힘을 다해 돌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꽈드득!’ 끔찍한 금속 마찰음이 고막을 때렸다. 밸브는 마지못해 천천히 움직였다. 카이의 얼굴은 땀과 함께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5초… 6초… 더 힘껏!” 렌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카이는 이를 악물었다. 온몸의 힘을 쥐어짜냈다. ‘콰아아앙!’ 드디어 밸브가 한 바퀴 완전히 돌아갔다. 동시에 ‘쉬이이이이익…’ 하는 굉음과 함께 렌이 연결한 증기 엔진에서 막대한 압력의 증기가 뿜어져 나와 주 공급관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공입니다, 카이!”
렌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강철 문에서 ‘우우웅… 끽… 끽…’ 하는 소리가 울렸다.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녹슨 구리 파이프를 타고 증기가 흐르면서 ‘칙- 칙-‘ 하는 소리가 거대한 지하 공간을 가득 채웠다. 문의 중앙에 박혀있던 렌즈들은 이제 강렬한 청색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강철 문이 지축을 울리며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먼지와 부서진 암석 조각들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카이는 숨을 헐떡이며 밸브에서 손을 뗐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열린 문 너머로는 또 다른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까지 봐왔던 투박한 통로와는 차원이 다른, 압도적인 규모와 정교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수백 개의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복잡한 증기 파이프와 황동 밸브들이 미로처럼 엮여 있었다. 뿜어져 나오는 증기 때문에 시야가 흐릿했지만, 그 속에서 웅장한 고대 기계 문명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이건…!” 카이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렌의 눈은 경이로움으로 가득했다. “이것이… 고대 기술자들의 정수… ‘기계의 성역’입니다. 우리가 찾던 ‘시간의 톱니바퀴’가 분명 이곳 어딘가에 있을 겁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섰다. 밟을 때마다 ‘끼이익’ 소리를 내는 철제 발판 아래로는 아득한 심연이 펼쳐져 있었다. 그 심연 속에서는 희미한 푸른빛을 띠는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그 액체 위로는 정체불명의 부유물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조심해요, 카이. 이 안의 장치들은 우리가 겪었던 어떤 것보다 복잡하고… 위험할 수 있습니다.” 렌이 경고했다.
“알고 있어. 하지만 이런 곳에 왔는데 위험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카이는 씨익 웃으며 손에 든 증기식 권총의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그들의 발걸음이 옮겨질 때마다, 거대한 기계 장치들 사이에서 ‘딸깍, 찰칵’ 하는 미세한 소음이 들려왔다. 마치 잠들어 있던 거인이 서서히 깨어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들이 통로의 절반쯤 지났을 때였다.
우웅… 콰드드드득!
갑자기 모든 기계들이 동시에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미친 듯이 회전하고, 증기 파이프에서는 엄청난 압력의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발아래 철제 발판이 요동쳤다.
“젠장! 무슨 일이야?” 카이가 외쳤다.
렌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안 돼… 우리가 문을 열면서… 이 시스템 전체를 깨운 겁니다!”
그 순간, 벽면에 박혀있던 수십 개의 톱니바퀴 중 하나가 삐걱거리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기계음과 함께 거대한 강철 팔이 튀어나왔다. 이어서 몸통, 그리고 머리 부분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육중한 강철 몸체, 번뜩이는 붉은색 눈, 그리고 팔 끝에 달린 거대한 회전식 드릴이 달린… 자동 기계 병사였다.
지지직… 목표 감지. 침입자 제거.
기계 병사의 흉갑에서 둔탁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병사의 붉은 눈이 카이와 렌을 향했다.
“젠장! 경비병이었나?” 카이가 황급히 증기식 권총을 겨눴다.
“카이! 저건… 이 고대 시스템의 핵심 방어 기계입니다! 일반적인 총탄으로는 통하지 않을 겁니다!” 렌이 소리쳤다.
기계 병사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그들을 향해 돌진했다. 발아래 철제 발판이 ‘콰아앙!’ 하고 무너져 내렸다.
“피해!”
카이가 렌의 팔을 잡아끌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들이 방금 서 있던 자리는 거대한 드릴에 의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열린 문, 깨어난 고대 방어 시스템, 그리고 눈앞의 거대한 위협.
잊혀진 지하 유적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