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하늘을 찢고 솟은 천공봉(天空峰)은 언제나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 아래, 수십 리에 걸쳐 펼쳐진 영혼의 숲은 설산의 냉기와는 사뭇 다른 기운을 품고 있었다. 나무들은 사람의 키를 아득히 넘는 거목들이었고, 그 사이를 지나는 바람은 마치 살아있는 혼령처럼 웅웅거렸다. 강호의 무림인들은 이곳을 ‘죽음의 장막’이라 불렀다. 숲의 깊은 곳에는 이종족, 인간과는 다른 피를 가진 존재들이 산다는 끔찍한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었다.
련은 숲의 초입에 자리한 작은 오두막에서 홀로 살았다.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천공봉의 기운을 담은 검술을 익히며 고요히 수련하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그는 스물도 채 되지 않은 나이였으나, 검을 쥐는 순간 그의 눈빛은 늙은 고수의 그것처럼 깊어졌다. 오늘 또한 그러했다. 새벽녘, 안개가 자욱한 숲길을 따라 낡은 도복 자락을 휘날리며 걷던 그는 적당한 공터를 찾아 섰다.
싸늘한 아침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련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검집에서 흑철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 새벽빛 아래 검날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곧이어 그의 몸에서 잔잔한 내공이 흘러나왔고, 손목 스냅 한 번에 검이 허공을 갈랐다.
촤악! 휙! 쉬이익!
검의 궤적은 마치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유려했다. 때로는 잔잔한 물결처럼 흐르다가도, 때로는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검 끝에서 터져 나오는 기세는 주변의 나뭇가지들을 흔들고, 바닥에 쌓인 낙엽들을 흩뿌렸다. 련의 검술은 ‘천공검(天空劍)’이라 불렸는데, 이는 그가 직접 만들어낸 독자적인 경지였다. 천공봉의 높고 거대한 기상과 영혼의 숲이 품은 고요하면서도 섬뜩한 신비를 담아낸 검이었다.
그의 검이 마지막 궤적을 그리며 멈췄을 때, 련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가늘게 떨리는 손목을 풀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멀었다. 스승은 늘 그렇게 말했다. ‘하늘을 베고, 영혼을 꿰뚫으려면 아직 멀었으니, 네 검은 오직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야 한다.’
갈증이 밀려왔다. 련은 근처의 맑은 계곡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숲의 신비로운 정기가 느껴졌다. 이곳은 비록 인간에게는 금지된 영역이나 다름없었지만, 련에게는 세상의 모든 시름을 잊게 하는 안식처였다.
계곡에 다다르자, 맑은 물줄기가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렸다. 련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물가 옆,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 아래에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새하얀 비단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은 마치 계곡물 위에 피어난 구름 조각 같았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흘러내렸고, 햇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났다. 무엇보다 련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달무리처럼 희고 투명한 피부, 붉은 꽃잎처럼 작은 입술, 그리고… 짙은 보랏빛을 띠는 눈동자.
인간의 눈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색이었다.
련은 순간적으로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소문으로만 듣던 이종족의 존재. 영혼의 숲 깊은 곳에 산다는 그들이 지금 제 눈앞에 있었다. 그것도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녀는 계곡물에 손을 담그고 있었다. 물결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이질적이면서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그림이었다. 련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 순간,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련을 향했다.
마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움이 담긴 눈이었다. 그 눈과 마주치자 련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두려움보다는, 알 수 없는 매혹이 그의 의식을 지배했다.
“…누구십니까?”
련의 목소리는 제 귀에도 낯설 만큼 떨렸다.
여인은 아무 말 없이 련을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은 련의 내면을 꿰뚫는 듯했다. 어떠한 적의도 없었지만, 그만큼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입술이 조용히 움직였다.
“인간… 네가 어찌하여 이곳에 발을 들였느냐.”
그녀의 목소리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처럼 청량하면서도, 아득한 옛이야기를 담은 듯 깊었다. 언뜻 듣기엔 차갑게 들릴 수도 있었으나, 그 안에는 미약한 슬픔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저는… 이 근처에 삽니다. 수련을 위해….” 련은 무심코 검이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위기감을 느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오랜 시간 몸에 밴 습관이었다.
여인의 시선이 련의 허리에 찬 흑철검에 머물렀다. 그녀의 표정에는 미세한 변화도 없었지만, 련은 그 짧은 순간 그녀의 눈빛에서 경계심을 읽어냈다.
“무기를 들고… 이곳에 온 이유를 알 수 없으나, 인간은 본래 이 숲의 경계를 넘어설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녀는 물속에 담갔던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색의 영롱한 빛이 피어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곳은 영혼의 숲. 너희가 말하는 이종족의 땅이다.”
련은 그녀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소문으로만 듣던 이종족이 인간을 얼마나 경계하는지, 그리고 인간들 또한 그들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감히 이종족의 땅에 발을 들인 인간은 살아 돌아가지 못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련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 속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혔다.
“저는 당신에게 해를 끼칠 마음이 없습니다.” 련은 검을 칼집에 도로 넣었다. “만약 제가 금지된 땅에 들어온 것이라면, 송구합니다. 허나, 저는… 당신을 해치려 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행동에 여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시선은 련의 얼굴을 훑었다.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간사함과 욕망을 읽어내려는 듯, 깊이 들여다보는 눈빛이었다.
“너는…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기운을 가졌구나.” 그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둡고도 맑은 기운… 마치 천공봉의 눈과 영혼의 숲의 어둠을 동시에 품은 듯하구나.”
련은 그녀의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자신을 두고 그렇게 말한 이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련은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세속의 무림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자라났고, 스승의 가르침 또한 일반적인 무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가 다른 인간들과 다르다는 것이, 당신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련은 조용히 말했다. “다만, 제가 이곳에 들어온 것을 용서해 주신다면… 다시는 오지 않겠습니다.”
여인은 련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련을 바라볼 뿐이었다. 련은 그녀의 침묵 속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녀가 언제든 자신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때, 숲 저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여인의 보랏빛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그녀의 표정에는 미미한 긴장감이 스쳤다.
“…이곳을 떠나라.”
그녀의 목소리가 전과는 달리 단호해졌다.
“지금 당장.”
련은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숲의 깊은 곳에서 어렴풋이 몇몇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삿갓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활과 날카로운 창이 들려 있었다.
인간이었다. 영혼의 숲에 발을 들여선 또 다른 인간들.
그들의 등장에 여인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련을 향했다.
“너도 저들과 한패냐.”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의심과 경계심이 명확하게 묻어났다. 련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저들을 모릅니다!”
하지만 여인은 련의 말을 믿지 않는 듯했다. 숲에서 나타난 인간들은 련의 존재를 인식한 듯, 그들을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섬뜩한 사냥꾼의 기색이 역력했다.
“이종족이다! 영혼의 숲에 숨어사는 요물을 발견했다!”
선두에 선 사내가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숲을 울리며 퍼져나갔다. 그의 동료들 또한 흥분한 표정으로 여인에게 활을 겨누었다. 화살촉 끝이 섬뜩하게 빛났다.
련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여인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위험해질 터였다. 그는 여인의 앞을 막아서며 외쳤다.
“멈추시오! 이분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소!”
하지만 사냥꾼들은 련의 말을 무시했다. 그들의 눈에는 오직 이종족을 잡아 공을 세우려는 탐욕스러운 빛만이 가득했다. 이종족은 무림인들에게 큰 공을 세울 수 있는 사냥감으로 여겨졌다. 그들의 정수(精髓)를 취하면 무공이 증진된다는 헛소문까지 나돌았다.
“비켜라, 이놈! 요물과 한패라면 네놈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사냥꾼 중 한 명이 련에게 칼을 겨누었다.
여인의 보랏빛 눈동자가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련의 뒤에서 조용히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련은 그녀의 시선에서 실망감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을 읽어낼 수 있었다.
련은 그녀의 앞을 막아선 채, 검집에서 흑철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그의 검 끝이 사냥꾼들을 향했다.
“돌아가시오!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시오!”
사냥꾼들은 련의 경고에 비웃음을 흘렸다. 고작 어린 무인 하나가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것이 우스웠을 것이다.
“하찮은 놈이 감히 끼어드는구나! 저 요물을 놓치면 네놈 목숨으로 대신할 것이다!”
선두 사내가 명령을 내렸다. “쏴라!”
시위가 당겨지고, 수십 개의 화살이 련과 여인을 향해 빗발치듯 날아왔다. 련은 순간적으로 내공을 끌어올려 흑철검을 휘둘렀다.
쉬이익! 파파팍!
그의 검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내고 베어내며, 련은 여인을 보호했다. 그의 검술은 그 어떤 무림인보다도 빠르고 정확했다. 그러나 숫자가 너무 많았다. 화살은 끊임없이 날아왔고, 사냥꾼들은 포위망을 좁혀왔다.
“이건 너의 일이 아니다, 인간.”
그때, 련의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힘이 담겨 있었다. 련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여인이 천천히 련의 옆을 지나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발걸음은 마치 물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그녀의 손이 허공을 향해 들려졌다.
그녀의 손끝에서 푸른색의 영롱한 빛이 피어났다. 그 빛은 점차 커지더니, 강렬한 광휘를 내뿜으며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번져나갔다. 숲의 모든 나뭇잎들이 일제히 흔들리고, 강렬한 바람이 불어닥쳤다.
사냥꾼들은 그 압도적인 기운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악과 공포가 가득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와 마주했음을 깨달았다.
“물러서라!”
선두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여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빛은 거대한 파도처럼 사냥꾼들을 덮쳤다. 빛은 그들을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그들의 몸을 스치고 지나가자 사냥꾼들의 시야가 뒤틀리더니, 마치 홀린 듯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은 공허했고,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환영에 사로잡힌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영혼의 숲의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갔다.
련은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그녀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림의 그 어떤 고수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무엇을 막아서려 했는지 깨달았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모든 사냥꾼들이 사라지자, 숲은 다시 고요해졌다. 푸른빛은 여인의 손안으로 다시 흡수되었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온함이 찾아왔다. 여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련을 돌아보았다.
“왜 막아섰느냐.”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젠 어떠한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련은 침묵했다. 그 또한 알 수 없었다. 왜 그녀를 막아섰는지. 그저 본능적으로, 그녀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었다.
“나는 네가 알지 못하는 존재다. 인간은 결코 가까이할 수 없는 존재이지.”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슬픔과 함께 경고가 담겨 있었다. “다시는 이곳에 발을 들이지 마라. 인간과 이종족의 경계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잔혹하다.”
그녀는 말을 마친 후, 뒤돌아섰다. 계곡물 위를 떠다니듯, 사뿐한 발걸음으로 숲 깊은 곳으로 향했다. 련은 그녀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존재는 마치 찰나의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그녀의 마지막 모습에서, 련은 처음 그녀에게서 느꼈던 그 알 수 없는 슬픔의 그림자를 다시 보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끌림 또한 강하게 느꼈다.
그녀는 이종족이다. 인간에게 금지된 존재.
하지만 련의 심장은, 그 모든 금기를 무시하고 오직 그녀만을 갈구하고 있었다.
“아린….”
련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여인은 그의 부름에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 갈 뿐이었다.
련은 흑철검을 굳게 잡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결의로 빛났다.
지금부터, 그의 금지된 운명이 시작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