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으으… 역시 나한텐 마법 지팡이보다 빗자루가 더 잘 어울리는 건가.”
이한결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마법 지팡이 끝에서 겨우 손바닥만 한 불꽃이 파스스, 하고 꺼지는 광경이란. 젠장, 이러다간 졸업도 못 하고 퇴학당하는 거 아냐?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 모인다는 아카디아 마법 학원에서 그는 언제나 이방인이었다. 특별 장학생이라는 타이틀은 그에게 자랑이 아닌, 언제 떨어져 나갈지 모르는 불안한 꼬리표 같은 것이었다.
“한결아, 너 또 그 모양이냐?”
옆구리를 쿡 찌르는 건 절친 박준형이었다. 준형은 한결보다 마법 실력은 조금 나았지만, 정보력만큼은 학원 내 최고를 자랑하는 자칭 ‘아카디아 소식통’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동정 반, 놀림 반이 뒤섞여 있었다.
“너 저번 달에도 변신 마법 시간에 개구리 발로 수업 들었잖아. 대체 언제쯤 사람 모습으로 제대로 돌아올 건데? 젠장, 그때 네가 붕어빵 먹겠다고 개구리 발로 내 얼굴 때렸을 때 교수님 표정 봤냐?”
“시끄러워. 넌 그거나 조용히 해. 교수님 오신다.”
운명의 장난인지, 불운의 장난인지. 그들의 앞에 나타난 건 서늘한 은발을 휘날리며 완벽한 마법 시연을 막 마친, 학원 수석 서예린이었다. 그녀는 교수의 칭찬에도 일말의 동요 없이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저 완벽한 아우라. 같은 인간이 맞긴 한 걸까. 이한결은 불꽃 마법 연습 중 자신의 머리칼을 태워버린 과거를 떠올리며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교수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예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역시 서예린 양이야. 자네는 다음 마법 논문 주제를 미리 생각해두는 게 좋을 것 같네. 음… 아, 이한결 군!”
젠장. 교수님의 호출은 언제나 불길했다. 예상대로였다.
“이한결, 수업이 끝난 후, 내 연구실로 와라.”
***
“하아… 하필 이맘때 이 재료라니.”
교수님은 낡은 마법 서적을 한 권 건네며 말했다. “망각초 열매. 자네라면 찾을 수 있을 게다. 지하 서고 최하층, ‘폐기 구역’에 있을 테니 잘 찾아와라.”
망각초 열매? 그건 거의 멸종된 재료 아니었던가? 마력 안정화에 탁월한 효과가 있지만, 그만큼 취급이 까다롭고, 이제는 거의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재료라고 들었다. 게다가 ‘폐기 구역’이라니. 학원 지하 서고는 일반 서고, 희귀 서고, 그리고 아무도 발을 들이려 하지 않는 ‘폐기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름 그대로 교수님들도 포기한 실패한 마법 실험의 잔재, 위험한 저주가 담긴 물품, 혹은 단순히 너무 오래되고 쓸모없어진 자료들이 버려진 곳이었다. 소문으로는 그곳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리거나, 없던 물건이 생겨나기도 한다고 했다.
“폐기 구역이라니… 교수님, 거긴 좀… 위험하지 않습니까?”
“걱정 마라. 자네 마력이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게다. 게다가… 자네는 특별 장학생이니, 특별한 임무도 감당해야지 않겠나?”
…젠장, 이 말이 나올 줄 알았다. 특별 장학생이라는 타이틀은 이럴 때 교수님의 완벽한 무기가 되었다. 거절은 불가능했다.
홀로 낡은 램프를 들고 지하 서고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점점 습하고 차가워졌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은 한결의 발걸음에 맞춰 불길한 소리를 냈다. 램프 불빛에 비친 책장들은 마치 이빨을 드러낸 괴물처럼 음산하게 느껴졌다. 이곳은 분명 아무도 오지 않는 곳인데, 어쩐지 미세하게 따스한 공기가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설마… 정말 소문처럼 유령이라도 나오는 건 아니겠지?’
그때였다. 낡은 책장들 사이,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분명 저곳은 벽인데… 착각인가? 발걸음을 옮겨 다가가자, 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빛이 나는 곳에는 낡은 나무 문이 있었다. 아무런 마법적인 장치도, 봉인도 없는 평범한 문. 하지만 왠지 모르게 강렬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주변의 냉기와는 확연히 다른, 불분명한 온기가 문 안쪽에서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문에는 낡은 종이 한 장이 붙어있었다. 먼지에 뒤덮여 글자를 알아보기도 힘들었지만, 희미하게 ‘…진동… 공명… 조심…’ 같은 단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밑에, 작은 글씨로 덧붙여진 한마디.
‘…들어가면, 후회할 것이다.’
어째서인지 그 경고문은 이한결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후회할 정도라니, 대체 뭐가 있다는 거지? 교수님이 찾는 망각초 열매가 혹시 저 안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폐기 구역에서도 ‘이곳만은 들어가지 마시오’ 하는 느낌의 문이라니. 이건 마치 ‘열지 마시오’라고 쓰인 판도라의 상자 같은 거잖아.
고민 끝에, 한결은 손잡이를 잡았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하지만 책장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중앙에는 알 수 없는 기계 장치가 놓여 있었다. 낡은 금속과 반투명한 크리스탈이 뒤섞인, 복잡하고도 아름다운 기계. 그 주위로는 희미한 마나의 잔광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계는… 정말로 미세한 온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하 서고의 습한 냉기를 뚫고 느껴지던 그 따스함이 바로 이곳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이게 대체… 뭐야?”
기계는 둔탁하게 울리고 있었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기계의 중심부, 가장 큰 크리스탈이 묘한 파동을 내뿜고 있었다. 파동은 주기적으로 주변 공기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한결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이건 일반적인 마법 장치가 아니었다. 무언가 거대하고, 복잡하고, 그리고… 불길한 힘이 느껴졌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
그때, 등 뒤에서 차갑지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서 뭐 하는 거야, 이한결?”
화들짝 놀라 돌아보자, 그곳에는 서예린이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살짝 경직되어 있었다. 늘 침착하던 그녀가 이토록 당황한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 보았다.
“서예린? 네가 여긴 왜…?”
“그건 내가 할 질문이야. 여긴 들어와선 안 되는 곳이야. 어서 나가!”
그녀는 다급하게 한결을 끌어당기려 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한결이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그리고 예린이 뒤따라 들어온 순간부터, 그 기계는 더욱 거세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크리스탈의 파동이 강해지더니, 주변의 아지랑이가 선명한 붉은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기계 장치의 모든 부품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윙-하는 소리와 함께 방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젠장, 서둘러! 문을 닫아야 해!” 예린이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당황을 넘어선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붉은 마나의 파동이 방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한결과 예린은 마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린 작은 배처럼 휘청거렸다. 바닥이 울리고, 공기가 진동했다.
“이게 뭐야? 뭔가… 온몸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야!” 한결이 소리쳤다. 마치 온몸의 세포가 춤을 추는 것 같았다.
“망할, 이 진동은… ‘감정 공명 증폭기’가 폭주하고 있어!” 예린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어서 피해!”
‘감정 공명 증폭기?’ 그게 뭔데? 한결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때, 붉은 파동이 그들을 덮쳤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짜릿하게 반응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마치 쇠망치로 얻어맞는 듯한 격렬한 진동이 온몸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 진동과 함께, 머릿속에 이상한 생각들이 비명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서예린의 차가운 눈빛 아래 숨겨진 열정, 그게 알고 싶다!*
*저 완벽한 옆모습에 키스하면 어떤 느낌일까? 망할, 생각만 해도…!*
*젠장, 서예린이 이렇게 가까이 있다니! 그녀의 비누 향기가… 미치겠네!*
“야! 이한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걸까? 아니면 이 마법 장치가 그의 생각을 읽어낸 걸까? 서예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한결을 노려보았다. 그런데 그 눈빛은 분노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상하리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동요하는 감정을 억누르려는 듯, 입술을 꽉 깨물고 있었다.
“너, 너도… 뭔가 느껴지는 거야?” 한결이 묻자, 예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붉어진 귀 끝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말도 안 돼… 이한결, 이건…!”
그 순간, 붉은 파동이 최고조에 달했다. 징- 하는 소리와 함께 방 전체가 붉은빛으로 물들었고,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붕, 하고 끌어당겨졌다. 마치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피할 틈도 없었다.
“어… 어어?!”
콰당!
그들은 서로의 품에 와락 안겼다. 한결의 얼굴이 예린의 은발 머리카락에 파묻혔고, 예린의 몸은 그의 가슴에 밀착했다. 쿵, 쿵, 쿵. 그녀의 심장 소리가 바로 그의 귀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의 심장이 그렇게 미친 듯이 뛰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붉은 파동은 계속해서 공간을 진동시켰고, 두 사람의 몸은 서로에게 더욱 강하게 밀착되었다. 그리고 한결의 뇌리에는 아까 떠올랐던 충동적인 생각들이 마치 현실인 양 더욱 강렬하게 울려 퍼졌다.
*서예린, 너 정말… 예쁘다!*
이한결의 입술이 저절로 벌어졌다.
“이, 이한결! 너 지금… 대체 뭘 하려…”
예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붉은 파동은 한층 더 강렬한 진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두 사람의 몸은 더욱 강하게 결합되었다. 완벽하게 밀착된 상태에서, 한결은 자신의 얼굴이 그녀의 얼굴로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이건 마법이다! 분명 마법이야!
그때, 그의 입술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