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장: 벽 뒤의 속삭임
지혜는 익숙한 냄비 속에서 끓고 있는 라면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밤 11시,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늦은 저녁. 딱히 누구를 위해 차리는 식탁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늘 정성스레 식기를 꺼내고 물 한 잔을 준비했다. 어차피 먹고 나면 설거지통으로 직행할 그릇들이었지만, 이 작은 의식만이 혼자 사는 자취방에서의 하루를 조금이나마 ‘삶’처럼 느껴지게 했다.
덜 익은 면발을 후루룩 소리 내며 삼키자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갔다. 창밖은 이미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간간이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만이 살아있는 것들의 증거였다. 텔레비전도 켜지 않은 고요한 방 안에서, 지혜는 오로지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와 자신의 숨소리에만 집중했다.
‘피곤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마감 기한에 쫓겨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웹소설 지망생이라는 명함은 폼만 나는 것 같았다. 쓰는 즐거움보다는 마감의 압박이 더 컸고, 현실의 벽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했다.
라면 국물까지 비우고 빈 그릇을 싱크대에 놓았다. 물컵을 들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 거실 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이 눈에 띄었다. 분명 아까 거실 불을 끄면서 손에 들고 있었는데, 언제 저기에 뒀지? 무심코 생각했지만, 뭐, 원래 정신없는 성격이니 그러려니 했다.
침대에 몸을 눕히고 습관처럼 옆에 놓인 휴대기기를 집어 들었다. 오늘 새로 올라온 연재분을 읽어볼까 하다가, 이내 피곤함에 눈이 감겼다. 그때였다.
*톡.*
작은 소리였다. 마치 손가락으로 가볍게 유리창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 지혜는 눈을 비볐다. 창밖에서 들린 소리인가? 하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게다가 소리는 창문이 아닌, 방 안쪽에서 들려온 것 같았다.
*톡. 톡.*
이번엔 좀 더 분명하게. 침대 바로 옆, 벽에서 나는 소리였다.
지혜는 숨을 죽였다. 이 건물은 꽤 오래된 아파트였지만, 방음만큼은 나쁘지 않았다. 옆집이나 윗집에서 나는 소리가 이렇게 선명하게 들릴 리는 없었다.
“누구… 계세요?”
작게 속삭였다. 답은 없었다. 대신, 싸늘한 공기가 방을 감도는 것 같았다. 에어컨은 꺼져 있었다. 보일러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으스스한 한기가 발끝부터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겁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벽 너머의 소리가 아니었다. 뭔가 *다른* 종류의 감각이었다.
다음 날 아침, 지혜는 어젯밤의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애썼다. 피곤해서 헛것을 들었겠지. 스트레스가 심해서 환청이라도 들렸나 보다. 그러나 그녀의 불안은 오래가지 못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필기도구들이 미묘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자주 쓰는 펜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연필꽂이에 꽂혀 있던 샤프는 뚜껑이 열린 채 뒤집혀 있었다.
“뭐야, 내가 어제 이렇게 해놓고 잤나?”
기억을 더듬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었다. 그녀는 깔끔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작업 공간만큼은 정돈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날 저녁. 지혜는 퇴근 후 식사를 준비하다가 소스병 하나가 없어진 것을 깨달았다. 분명 냉장고 문을 열면 바로 보이는 칸에 두었던 병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새 병을 뜯어 사용하고 나서, 설마 하는 마음에 싱크대 아래 수납장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 어제 사라진 소스병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것도 거의 다 사용한 채로.
“이게… 왜 여기 있지?”
경악했다. 누가 들어와서 그랬을 리는 없었다. 문은 잠겨 있었고, 창문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누군가 이 빈번한 이사에도 살아남은 오래된 아파트에 침입해서 소스병 하나를 옮겨놓는다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날 밤, 지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뒤척이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어둠 속에서 가구들이 거대한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그때였다.
*딸깍.*
작은 소리. 부엌 쪽에서 들려왔다.
지혜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숨소리마저 삼킨 채, 그녀는 소리가 난 쪽을 응시했다. 부엌의 조명 스위치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누군가 불을 켠 것 같았다.
그리고 곧바로, 형광등이 깜빡이며 부엌이 밝아졌다. 아무도 없었다. 텅 빈 공간에, 아까 싱크대 위에 놓아두었던 물컵이 갑자기 *쓰러졌다*. 와장창 하고 산산조각이 나는 대신, 마치 누가 손으로 밀치기라도 한 듯, 천천히 옆으로 기울어지며 싱크대 바닥에 납작하게 놓였다. 멀쩡했다.
지혜는 얼어붙었다. 심장이 귀청이 터질 듯 뛰었다.
이건 환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누구… 누구세요?”
떨리는 목소리가 빈 공간을 맴돌았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부엌 싱크대 위에서, 아까 멀쩡하게 옆으로 누웠던 물컵이 이번에는 바닥을 끌며 움직였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린 듯, 싱크대 끝자락으로 다가갔다.
지혜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니, 차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물컵은 싱크대 끝에 닿자마자, *스스로* 허공에 떠올랐다. 그리고 잠시 멈춰 서 있는가 싶더니, 이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쨍그랑!*
이번엔 정말 산산조각이었다.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그 파편들이 부엌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녀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온몸이 후들거리고,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아니, 이 아파트에, 아주 불쾌한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그때, 거실 한가운데 놓인 작은 탁자 위에서 뭔가가 번쩍였다.
지혜는 떨리는 눈으로 그곳을 응시했다. 탁자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그 흔한 탁상시계조차 올려두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거기 있었다.
낡고 빛바랜 사진 한 장이.
옛날식 종이 액자에 담겨 있는, 오래된 사진이었다.
지혜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홀린 듯 다가갔다.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여인이 웃고 있었다.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이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최소 수십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사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를 전율케 한 것은, 그 여인의 뒷배경이었다.
익숙한 벽지 무늬. 익숙한 창틀.
사진 속 여인이 서 있는 곳은, 다름 아닌 **바로 이 아파트의 거실**이었다.
지혜의 손이 사진에 닿으려는 순간, 문득 어딘가에서 잊고 있던 멜로디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아주 오래된 태엽 인형이 연주하는 듯한, 느리고 애조 띤 선율이었다. 마치 낡은 오르골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그 소리는, 분명히 이 아파트 어딘가, 벽 속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멜로디가 희미하게 잦아들 무렵, 사진 속 여인의 미소가, 섬뜩할 정도로 생생하게 지혜를 향해 번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날 밤, 지혜는 자신의 아파트가 더 이상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얽히고설킨, 어떤 오래된 기억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변모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기억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조용히, 그리고 아주 집요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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