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회색빛 하늘 아래 도시를 쓸고 지나갔다. 지우는 익숙한 골목 어귀에 서서 숨을 골랐다. 얇은 목도리가 바람에 펄럭이며 뺨을 스쳤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그보다 더 시린 무언가가 잔잔히 일렁이고 있었다. 늦은 오후의 햇살은 힘없이 빌딩 숲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가 이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곳은 하준과 그녀의 추억이 고스란히 봉인된, 그래서 더욱 발길이 닿기 어려웠던 도시의 오래된 동네였다.
어릴 적, 우리는 언제나 겨울을 기다렸다. 첫눈이 내리는 날은 세상이 온통 순수한 백지처럼 변하는 마법의 순간이었으니까. 그 백지 위에 우리는 새로운 약속을 쓰고, 서로의 이름을 새겼다. 그러나 그 약속은 언제나 ‘미완성’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지우의 시간을 맴돌았다. 하준이 사라진 후, 매년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지우는 홀로 그 약속의 장소에 섰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그의 그림자를 찾으려는 듯 허공을 헤매곤 했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첫눈이 내릴 것 같은 예감이 그녀의 발걸음을 그곳으로 이끌었다.
지우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동네 뒷산 언덕배기에 숨겨진 작은 정자였다. 낡고 오래된 나무 기둥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고, 한때 빼곡하게 심겨 있던 장미 넝쿨은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곳은 오직 하준과 지우만이 아는 비밀 장소였다. 한겨울 눈이 소복이 쌓이면, 우리는 이곳에 앉아 서로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곤 했다. 미래의 우리를 상상하며, 시답잖은 이야기에도 까르르 웃던 어린 날의 웃음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지우는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 정자 안으로 들어섰다.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멀리서 빛을 발하는 도시의 불빛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시린 바람이 한 차례 불고 지나간 자리에, 그녀의 시선이 정자 기둥 아래 쌓인 눈 더미 어딘가에 박혔다. 무언가 작고 검은 점이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을 뻗어 눈을 헤치자, 차가운 손끝에 닿는 익숙한 감촉. 그것은 작은 나무 조각이었다.
지우가 조심스럽게 눈을 털어내자, 새의 형상을 한 작은 나무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렵한 날개와 동그란 눈, 그리고 정교하게 조각된 꼬리까지. 분명 하준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가 언제나 품에 지니고 다니던 작은 조각칼로 깎아 만들었던, 그녀만을 위한 작은 선물. 마지막으로 그를 만났던 날, 하준이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다음에 다시 만나면, 이걸 내 손에 돌려줘. 그때까지는 이걸 보며 나를 기억해줘, 지우야” 라고 말했던 바로 그 새였다. 하지만 그 새는 왜 여기에, 이렇게 홀로 눈 속에 묻혀 있었을까.
손안에 든 차가운 나무 조각이 지우의 기억을 거센 파도처럼 흔들었다. 눈을 감자, 아련한 옛 풍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
그 해 겨울, 첫눈이 내리던 날
“지우야! 첫눈이야! 얼른 나와 봐!”
하준의 목소리는 온 동네가 떠나가라 울렸다. 창밖을 보니, 하늘에서 솜털 같은 눈송이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얀 세상 속에서 하준은 두 팔을 벌리고 빙글빙글 돌며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코끝이 빨개지도록 밖에서 하준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나는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하준은 내 손을 잡고 언덕 위의 정자로 달려갔다. 우리의 발자국이 눈 위에 고스란히 새겨졌고, 씩씩거리며 내뿜는 하얀 입김은 하늘로 흩어졌다. 정자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눈밭에 벌렁 드러누워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송이들을 바라봤다. 차가운 눈이 얼굴에 닿는 감촉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의 벅찬 설렘이 내 온몸을 감쌌다.
“지우야, 약속 하나 할까?”
하준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진지하게 느껴졌다.
“무슨 약속?”
“응. 매년 첫눈이 내리는 날, 우리는 여기에 다시 모이는 거야.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도, 이 세상이 우리를 잊어버려도, 우리는 이 약속만은 꼭 기억하는 거야, 지우야.”
그의 목소리는 마치 맹세처럼 굳건했다.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마음에 그 약속은 너무나도 쉽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응! 약속!”
나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하준은 활짝 웃으며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어 왔다.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손가락을 걸고 흔들었다. 그때, 하준이 품에서 작은 나무 조각을 꺼냈다. 정교하게 조각된 작은 새였다.
“이건 너 줄게. 이걸 볼 때마다 나를 기억해 줘.”
그는 내 손에 조각을 쥐여주었다. 차갑고 단단한 나무 조각이 따뜻한 마음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그날 저녁, 하준은 갑자기 사라졌다. 그의 할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연락을 받고, 모든 짐을 정리할 틈도 없이 급히 먼 지방으로 떠나야 했다고 했다. 단 한마디 인사도, 제대로 된 작별도 하지 못한 채, 그는 그렇게 내 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 후로, 나는 매년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홀로 정자에 앉아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하준은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
오랜 기억의 파편들이 산산조각 나 지우의 가슴에 박혔다. 손안의 나무 조각은 마치 하준의 온기가 남아 있는 듯 뜨거웠다. 그가 떠나기 전, 정자에 숨겨 두었던 것일까? 아니면 혹시, 그 후로도 그가 이곳에 왔었던 걸까?
지우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정자를 내려왔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눈가를 스쳤고, 멀리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아득했다. 발길이 향한 곳은 동네 어귀에 자리한 낡은 찻집이었다. 하준과 자주 들러 따뜻한 생강차를 마시던 곳.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녀는 찻집 문을 열었다.
“어서 와요, 아가씨. 어휴, 이렇게 추운 날 무슨 일로…”
찻집 주인 이여사님은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셨지만, 여전히 정정해 보이셨다. 그녀는 지우를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했다. 지우가 아무 말 없이 빈 테이블에 앉자, 이여사님은 따뜻한 생강차를 내어주며 물었다.
“또 그 애 때문에 왔나? 매년 첫눈 올 때쯤이면 항상 와서는 혼자 앉아 있다 가고….”
이여사님의 따뜻한 말에 지우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는 겨우 목소리를 내어 물었다.
“이여사님… 혹시, 하준이를… 다시 보신 적 있으세요?”
이여사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소식은 못 들었지. 하지만… 하준이 할머니는 늘 그러셨어. 언젠가 하준이가 꼭 돌아올 거라고. 눈이 내리면 분명히 올 거라고 말이야.”
지우의 심장이 다시 한 번 크게 뛰었다. “하준이 할머니요…?”
“응. 안타깝게도 지난달에 돌아가셨어. 그런데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이걸 맡기셨지 뭐야.”
이여사님은 찻집 안쪽 서랍에서 작은 나무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낡은 천에 싸인 작은 꾸러미를 지우에게 내밀었다. “하준이에게 전해주라고 하셨어. 눈이 오면 꼭 돌아올 거라고 하시면서… 그리고 늘 ‘별빛 차’와 어느 산골 마을 이야기를 하셨는데… 내가 하도 늙어서 그게 어디였는지 통 기억이 안 나네.”
지우는 떨리는 손으로 꾸러미를 받아 들었다. 꾸러미 안에는 빛바랜 편지 한 통과 작은 은색 팬던트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별빛 차’와 산골 마을… 잊혀진 약속의 조각들이 하나둘씩 맞춰지는 듯했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하준이 남긴 흔적이었고, 할머니가 남긴 희망이었다.
지우는 찻집을 나섰다.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더 이상 시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하늘에서 첫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희고 작은 눈송이 하나가 지우의 뻗은 손바닥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차갑지만, 그 어떤 온기보다 따뜻한 약속의 시작이었다. 이번 겨울, 첫눈은 더 이상 쓸쓸한 기다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녀는 품에 안긴 꾸러미를 더욱 소중히 움켜쥐었다. 별빛 차와 산골 마을. 그 안에 하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그녀의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였다. 지우는 눈이 내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속삭였다. “하준아, 이번에는 내가 널 찾으러 갈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