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수상한 주문**
박하늘의 주말 아침은 언제나 같은 패턴으로 시작됐다. 눅눅한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미적지근한 물로 세수를 한 다음, 퉁퉁 부은 얼굴로 주방으로 향한다. 캡슐 커피 머신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에스프레소를 뽑아내는 동안, 하늘은 창밖을 내다봤다. 회색빛 건물들 사이로 답답하게 뻗어있는 도로는 주중이나 주말이나 변함없이 사람과 차들로 가득했다. ‘아, 이번 주도 평범하군.’
그녀의 유일한 일탈이라면 회사 근처에 있는 작은 독립 서점 겸 카페, ‘책향기’에 들르는 것이었다. 주말마다 그곳에 앉아 이름 모를 시인의 시집을 펼치거나, 베이컨과 달걀이 듬뿍 들어간 샌드위치 한 조각에 따뜻한 라테를 곁들이는 시간. 그 찰나의 순간만큼은 박하늘이라는 이름 앞에 붙은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수식어를 떼어낼 수 있었다.
“사장님, 늘 마시던 걸로요!”
낡은 유리문이 짤랑거리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열리자, 카운터에 앉아있던 백발의 사장님이 푸근한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이곳은 그녀의 20대 마지막 안식처 같은 곳이었다. 익숙한 자리, 창가 구석의 제일 아늑한 1인석. 햇살이 잘 드는 곳이라 책을 읽기에도 좋고, 사람 구경하기에도 적당했다.
하늘은 자리에 앉아 가방에서 막 사온 따끈따끈한 신간 로맨스 소설을 꺼냈다. 표지에 그려진 아름다운 남녀의 모습이 그녀의 메마른 감수성에 작은 빗방울이라도 떨어뜨려주기를 바라면서. 쌉쌀한 커피 향과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공간에서, 그녀는 드디어 긴장을 풀고 온전히 자신만의 세상으로 잠수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날은, 그녀의 ‘평범한 주말’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트러지는 날이었다.
“여기, 이 자리 비었습니까?”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바로 그녀의 귓가에서 울렸다. 하늘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코앞에, 아니, 거의 책상에 닿을 듯이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분명히 ‘책향기’의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짙은 검은색 코트에, 목에는 실크 스카프를 단정하게 둘렀다. 보통 사람이라면 답답하다고 느낄 법한 차림이었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우아함이 흘러넘쳤다. 길게 뻗은 다리, 곧게 선 허리,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얼굴.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할 것 같은 비현실적인 잘생김이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고전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한, 마치 현실의 색깔과 명도를 한 단계 높여놓은 듯한 완벽한 이목구비였다.
‘뭐야, 이 남자. CG야?’
하늘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그녀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시선을 마주하며 해사하게 웃었다. 그 웃음에 하늘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위험하다. 이 남자, 아주 위험하다.
“네… 네? 아, 비어있어요. 앉으세요.”
남자는 그녀의 앞에 있는 2인용 테이블의 한쪽 의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늘은 자신의 옆이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얼떨결에 답했다. 그는 다시 한번 싱긋 웃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하늘의 맞은편 의자를 빼고 앉았다.
‘…뭐지? 내가 너무 당황해서 착각했나? 그냥 이 테이블을 통째로 가리킨 건가? 아님… 합석을 제안한 건가?!’
하늘은 혼란스러웠다. 이 자리는 명백히 1인용 테이블이 아닌 2인용 테이블이었다. 하지만 ‘책향기’의 암묵적인 룰은, 혼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에게는 옆자리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저 남자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마치 이 자리가 원래부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앉아버렸다.
“차분한 향이 좋군요. 당신의 모습과 잘 어울립니다.”
남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닿아있었다.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처럼 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응시했다.
‘내 모습…?’
하늘은 그제야 자신의 코트 색깔이 옅은 회색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방금 전 사장님이 내려준 따뜻한 라테가 아직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그는 코트와 커피 향을 칭찬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했다.
“저… 저 말인가요?”
하늘은 어색하게 웃으며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럼요. 이 자리에 앉은 이가 당신 외에 누가 있습니까.”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하늘은 할 말을 잃었다. 아니, 그렇게 당연한 대답을 이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의 시선이 너무 강렬해서, 마치 자신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혹, 불편하셨습니까?”
남자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그의 말투는 조금 고풍스러웠다. 딱딱하거나 격식 있다는 느낌보다는, 마치 시대극에 나오는 인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갑자기 앉으셔서 놀라서요.”
하늘은 애써 침착한 척 말했다. 사실은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 낯선 남자의 정체는 대체 뭐지? 작업 거는 건가? 하지만 작업치고는 너무 정중하고, 또 너무… 뚫어져라 쳐다본다.
그때 사장님이 그녀의 라테를 가져다주며 남자를 발견하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이구, 젊은 총각. 웬일로 여기까지 왔나? 귀한 발걸음 했네!”
사장님의 목소리에는 반가움과 동시에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귀한 발걸음?’ 이 남자가 사장님과 아는 사이였어?
남자는 사장님에게 허리를 살짝 굽히며 인사했다.
“네, 사장님. 잠시 들렀습니다. 인간의 감정은 참으로… 복잡하고도 재미있어서,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인간의 감정…?’
하늘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이 남자, 말하는 뽄새가 왜 이리 이상해? 혹시 연극 배우인가? 아니면 독특한 컨셉의 예술가?
사장님은 어색하게 웃으며 남자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하하, 젊은 총각은 여전히 호기심이 왕성하구먼. 여기 앉은 아가씨한테 너무 부담 주지 말고.”
사장님은 하늘에게 윙크를 한번 하더니 총총히 카운터로 돌아갔다. 남자는 사장님의 경고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다시 하늘을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은 지금 당황과 호기심, 그리고 약간의 경계심을 느끼고 있군요.”
남자의 말에 하늘은 소름이 돋았다. 그의 말은 너무나 정확했다. 마치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뭐… 뭘 그렇게까지 보세요?”
하늘은 저도 모르게 날 선 목소리가 나왔다. 그의 관찰이 너무나 노골적이고 부담스러웠다.
남자는 그제야 조금 민망한 듯 시선을 살짝 피했다. 그리고는 쭈뼛거리며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가 두드린 곳에서 작고 투명한 빛의 조약돌 같은 것이 톡, 하고 솟아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뭐야 방금?’
하늘은 자신의 눈을 비볐다. 분명히 뭔가가 보였다. 환상이었나? 어제의 야근으로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건가?
“아,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인간 세상에 나와 감각이 조금 예민해진 모양입니다. 저도 모르게… 발현이 되어버렸군요.”
남자는 자신의 손가락을 들여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신기함과 약간의 곤란함이 뒤섞여 있었다.
하늘은 벙찐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발현? 인간 세상? 이 남자, 농담하는 건가? 아니면 그냥 미친 사람인가?
“저기요, 혹시… 컨셉이세요? 아니면 혹시… 괜찮으신가요?”
하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갖 종류의 기이한 상상들이 꼬리를 물었다.
남자는 그녀의 말에 푸스스 웃었다. 그 웃음은 서점 안을 가득 메운 햇살처럼 따뜻하고 투명했다.
“저는 김도깨비라고 합니다. 인간의 이름으로. 그리고 저는 ‘괜찮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걱정 마십시오.”
김도깨비. 이름마저 비현실적인 그 남자는, 그렇게 박하늘의 평범한 주말에 기묘한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하늘은 저도 모르게 소설책 대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심장은 쿵, 쿵, 하고 알 수 없는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 그의 존재가 마치 그녀가 꿈꾸던 ‘일탈’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것 같았다.
그리고 김도깨비는 생각했다.
‘박하늘. 참으로… 흥미로운 인간이로군. 역시 이곳에 오길 잘했어. 나의 금기는… 과연 이 인간 앞에서도 온전히 지켜질 수 있을까.’
그의 눈동자 속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오래된 빛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