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여명이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스며들 때, 윤서는 익숙한 아련함에 눈을 떴다. 꿀처럼 달콤하고 비단처럼 부드러운 꿈의 잔상이 혀끝에 감돌았다. 그 꿈속에서 지훈은 언제나처럼 다정했고, 그녀의 손을 잡은 온기는 현실보다 생생했다. 잊고 싶었던 과거의 한 조각, 지우려 애썼던 상실의 아픔은 꿈을 파는 상점에서 사들인 조각 덕분에 매일 밤 완벽하게 재현되었다. 하지만 이제 그 완벽함은 윤서의 삶을 갉아먹는 독이 되고 있었다.
머리맡의 시계는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옆자리는 싸늘하게 비어 있었다. 꿈속의 지훈은 그녀의 곁에 영원히 머물렀지만, 현실의 지훈은 이미 오래전 그녀의 곁을 떠났다. 윤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허공에 손을 뻗어보았지만, 잡히는 것은 차가운 공기뿐이었다.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찾아오는 상실감은 이제 꿈이 주는 위로보다 더 깊은 고통으로 그녀를 잠식했다.
현실의 지훈은, 이제는 이름만 남은 그림자였다. 꿈을 꾸기 시작한 후로, 윤서는 현실의 지훈과 점점 더 멀어졌다. 아니, 그녀 자신이 현실의 지훈으로부터 도망쳤다. 현실의 지훈은 바빴고, 지쳐 있었으며, 때로는 차가웠다. 하지만 꿈속의 지훈은 늘 그녀를 향해 웃었고, 그녀의 모든 슬픔을 이해했다. 어느새 윤서는 현실의 지훈이 아니라, 꿈속의 지훈을 사랑하고 있었다.
잊혀가는 현실의 조각들
거실로 나온 윤서는 텅 빈 집안을 둘러보았다. 어제 지훈이 남겨두었던 쪽지를 발견했다. “회사 일이 늦어져서 저녁은 못 먹을 것 같아. 먼저 자.” 지훈의 필체는 점점 더 성의 없어지는 듯했다. 혹은 그녀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에는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던 글씨였는데, 이제는 무미건조한 활자일 뿐이었다.
“윤서 씨, 요즘 좀… 피곤해 보여요.”
며칠 전, 회사 동료가 건넨 말이었다. 윤서는 거울 속 자신을 보았다. 푸석한 피부, 어딘가 초점 없는 눈빛. 꿈속에서는 언제나 생기 넘치고 행복한 모습이었는데, 현실의 그녀는 마치 생기를 빼앗긴 인형 같았다. 밤마다 꿈속에서 모든 감정을 소진하고 나면, 낮에는 껍데기만 남아 겨우 숨 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커피를 내렸다. 향긋한 커피 향이 집안을 채웠지만, 윤서의 마음속 공허함을 채우지는 못했다. 문득, 꿈을 파는 상점의 환상 씨가 처음 그녀에게 꿈을 건네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 꿈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줄 겁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죠.” 그 대가가 무엇인지, 그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때는 그저 아픔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뿐이었다.
윤서는 이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현실과의 단절, 지훈과의 균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 불안감. 꿈속의 지훈이 점점 더 선명해질수록, 현실의 지훈은 윤서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의 목소리, 그의 표정, 그의 습관들이 꿈속의 완벽한 이미지에 덮여 사라지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손
그날 저녁, 지훈은 평소보다 일찍 퇴근했다. 현관문이 열리고 익숙한 발소리가 들리자, 윤서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의 진짜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다. 꿈속의 그와 너무도 달랐기에.
“윤서야, 왔어.”
지훈의 목소리는 피곤함이 묻어 있었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윤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손이었다.
“열은 없는데, 얼굴이 왜 이렇게 창백해?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거야?”
그의 걱정스러운 눈빛 속에는 답답함과 함께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섞여 있었다. 윤서는 고개를 숙였다. ‘아니, 나는 잠을 너무 잘 자. 꿈을… 너무 생생하게 꾸거든.’ 그러나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이 비밀은 그녀만의 것이었으며, 동시에 그녀를 좀먹는 비밀이었다.
“그냥 좀 피곤해….”
윤서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다. 지훈은 조용히 그녀의 곁에 앉았다. 한때는 그가 옆에 앉기만 해도 세상의 모든 위로를 받은 듯했는데, 이제는 어색함과 거리감만이 느껴졌다. 꿈속의 그와 현실의 그는 너무나 다른 존재가 되어버렸다. 꿈속의 지훈은 그녀의 모든 것을 받아들였지만, 현실의 지훈은 그녀의 이런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윤서야, 우리… 요즘 대화가 너무 없는 것 같아.”
지훈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윤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가 그녀의 꿈에 대해, 그녀의 변화에 대해 눈치챘을까? 하지만 지훈의 다음 말은 그녀의 예상과는 달랐다.
“내가 너무 바빠서 미안해. 윤서 너 혼자 많이 외로웠지? 회사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아서… 혹시 나한테 서운한 거라도 있으면 말해줘. 내가 노력할게.”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를 향한 걱정과 미안함이 가득했다. 하지만 윤서는 그 진심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서운한 것은 현실의 지훈이 아니라, 꿈속의 지훈과 현실의 지훈 사이의 간극 때문이었다. 그녀 자신이 만든 환상 때문에, 진심으로 그녀를 염려하는 지훈의 손을 뿌리치고 있었다.
윤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나도 요즘 좀… 생각이 많아서.”
그 순간, 지훈의 얼굴에 드리운 실망감이 그녀의 가슴을 찢었다. 그의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려다가, 이내 멈칫하더니 천천히 떨어졌다. 그 손짓은 마치 현실의 지훈이 그녀에게서 영원히 멀어져 가는 듯한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상점의 부름
그날 밤, 윤서는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꿈속의 지훈은 오늘 밤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지훈의 실망한 표정이 그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가져온 결과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꿈은 그녀에게 위로를 주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삶을 파괴하고 있었다. 환상 씨의 경고가 이제서야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르죠.” 그 대가는 바로 그녀의 현실, 그녀의 사랑, 그리고 그녀 자신이었다.
윤서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꿈속의 완벽한 환상에 갇혀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지훈의 손을 다시 잡고 싶었다. 비록 그 손이 꿈속의 손처럼 따뜻하지 않더라도, 비록 그가 꿈속의 그처럼 완벽하지 않더라도, 현실의 지훈을 다시 마주하고 싶었다.
결심이 서자, 윤서는 벌떡 일어났다. 잠옷 차림 그대로 현관으로 향했다. 발걸음은 저절로 꿈을 파는 상점의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밤늦은 시간, 거리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간판도 없이 어두컴컴한 골목 끝에 자리한 그 상점은 언제나처럼 기묘한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문이 닫혀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상점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마치 그녀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환상 씨….”
윤서는 조심스럽게 상점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묘한 향내가 코끝을 스쳤다. 수많은 꿈들이 담겨 있는 듯한 유리병들이 희미한 불빛 아래 반짝였다. 상점 안쪽, 늘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환상 씨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심했지만, 그의 눈빛은 그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오실 줄 알았습니다, 손님.”
환상 씨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낮았다. 윤서는 그의 앞에 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다.
“이 꿈… 돌려주고 싶어요. 더 이상은… 더 이상은 감당할 수가 없어요.”
환상 씨는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찻잔을 천천히 돌렸다. “꿈은 한 번 팔리면, 돌려받을 수 없습니다, 손님. 당신의 영혼에 이미 깊이 스며들었으니까요.”
윤서는 절망에 빠졌다. “그럼…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이대로 현실에서 도망친 채 살아야 하는 건가요? 지훈을… 지훈을 잃어가고 있어요!”
환상 씨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꿈을 ‘파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꿈을 ‘버리는’ 것은 어렵죠. 특히 당신이 사들인 그 꿈은, 가장 소중한 것을 되살려낸 것이었으니.”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꿈이 당신의 영혼에 스며들었다면, 당신 또한 꿈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완전히 당신의 것으로 만들거나, 혹은… 완전히 거부하거나.”
윤서는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꿈을 완전히 당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현실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 꿈속에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환상이 진실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완전히 거부한다는 것은, 그 꿈이 당신에게 남긴 모든 흔적을 감당하고, 당신의 의지로 그 꿈을 당신의 삶에서 지워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통스럽겠지만, 당신은 당신의 현실을 되찾을 수 있을 겁니다.”
환상 씨의 말은 끔찍한 선택지를 던져주었다. 영원히 꿈속에 갇히는 것, 혹은 고통 속에서 꿈의 잔해를 지워나가는 것. 하지만 윤서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지훈의 잃어가는 손길에서 충분한 고통을 맛봤다. 그녀는 현실을 택할 것이다.
“저는… 지우겠어요. 고통스럽더라도, 지훈에게 돌아갈 거예요.”
윤서의 목소리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환상 씨는 그녀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용감한 선택이군요.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그 꿈을 지우는 과정은 마치 당신의 일부를 뜯어내는 것과 같을 겁니다. 매일 밤 찾아올 환청, 환각, 그리고 당신이 꿈속에서 느꼈던 행복의 잔상이 당신을 유혹할 겁니다. 그것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상점 안의 모든 유리병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는 듯했다. 마치 수많은 꿈들이 그녀의 결정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꿈속의 안락함에 매달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현실의 아픔을 택하고, 그 아픔 속에서 다시 지훈의 손을 잡을 것이다. 설령 그 길이 가시밭길일지라도.
윤서는 상점 문을 나섰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전과는 다르게 무거웠지만, 동시에 단단한 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꿈을 파는 상점에서 얻은 것은 환상이자 고통이었지만, 이제 그녀는 그 고통을 통해 진정한 현실을 마주할 용기를 얻었다. 20번째 밤이 지나고, 윤서는 새로운 새벽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녀의 꿈이 아닌, 그녀의 현실 속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