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균열

자정 무렵, 지훈은 손에 든 컵 안의 물이 출렁이는 것을 멍하니 바라봤다. 늦은 시간, 고요한 아파트 안에서 물소리마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늦은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지친 몸뚱이를 소파에 파묻고 맥없이 앉아있던 참이었다. 창밖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저 멀리 도시의 불빛들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딱히 할 일은 없었지만, 이 시간에도 잠들지 못하는 건 불규칙하게 찾아오는 묘한 기시감 때문이었다.

“하아…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나.”

지훈은 한숨을 쉬며 중얼거렸다. 며칠 전부터였다. 분명 제자리에 두었던 열쇠가 엉뚱한 곳에 놓여 있다거나, 닫아두었던 창문이 스르륵 열려 있다거나. 처음엔 자신이 깜빡했겠거니 했다. 워낙 피곤한 나날의 연속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어제는 좀 달랐다. 분명 책상 위에 가지런히 쌓아둔 서류 더미가 아침에 보니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누가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너무 민감하게 구는 건가.’

그는 머리를 흔들며 애써 생각을 떨쳐냈다. 그저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고, 잠시 스쳐 지나가는 심리적인 불안감일 뿐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컵을 내려놓으려는데, 그 순간,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컵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얼음물이었던 탓에 차가운 물방울들이 발등에 튀었다.

“젠장.”

지훈은 투덜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컵은 멀쩡했고, 물만 좀 흘렀을 뿐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컵을 잡고 있던 손바닥이 축축하지 않았다. 컵이 미끄러져 떨어졌을 때 느껴지는, 유리와 손바닥 사이의 끈적한 마찰감도 없었다. 마치 컵이 스스로 손에서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었다.

그는 잠시 굳었다. 차가운 물기가 튀긴 발등이 서늘했지만, 그보다 더 오싹한 한기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분명히 꽉 쥐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 없이.

“누구… 있어?”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텅 빈 거실에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적만이 그를 옥죄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었을 때, 지훈의 눈에 들어온 것은 탁자 위 리모컨이었다. 분명 소파 팔걸이 위에 두었던 리모컨이, 탁자 한가운데로 옮겨져 있었다.

아니, ‘옮겨졌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았다. 리모컨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모습은 마치 누군가 그곳에 ‘던져놓은’ 듯이 약간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단순한 착각이나 실수라고 치부할 수 없는 명백한 이질감이었다.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팔걸이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발에 묻은 물기가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거실의 조명은 충분히 밝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눈에는 온통 어둠만이 가득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부엌은 적막했고, 베란다 문은 단단히 잠겨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거실 한쪽 벽에 걸린 대형 액자에 닿았다. 작년 여름, 친구들과 함께 여행 가서 찍었던 단체 사진이었다. 웃고 있는 자신과 친구들의 얼굴이 생생하게 담겨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액자 유리에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손톱만큼 작은, 마치 바늘로 찍어낸 듯한 균열이었다. 어두워서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선명했다. 언제부터 저기에?

지훈은 액자 앞으로 다가섰다. 손가락으로 금이 간 부분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날카로운 유리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이상하다. 이 액자는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물건들이 멋대로 움직이거나 사라지는 현상보다, 이 작은 균열이 더 지훈의 마음을 흔들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자신의 영역에 발을 디뎠음을 알리는 징표 같았다.

그때였다. 귓가에 작게, 아주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 흐읍… 흐읍…

숨 쉬는 소리였다. 마치 누군가 바로 귓가에서 잔뜩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듯한 소리. 지훈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누구야!”

그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소리는… 계속되었다. 더 가깝게, 더 생생하게.

— 흐읍… 흐읍… 흐읍…

소리는 액자 뒤편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지훈은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자마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액자 속 자신과 친구들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착각이라고, 착각일 거라고 자신을 애써 다그쳤다.

덜컥!

그 순간, 부엌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은 깜짝 놀라 부엌 쪽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또 들려왔다.

덜컹! 덜그럭!

마치 누군가 주방 찬장 서랍을 난폭하게 여닫는 소리였다. 지훈의 눈에, 부엌 찬장의 문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스르륵 열리는 것이 보였다. 안에는 식기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찬장 문은 열린 채 멈춰 있었다. 지훈은 숨을 죽였다. 눈을 크게 뜨고 그곳을 응시했다.

콰앙!

갑자기, 열려 있던 찬장 문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충격에 안에 있던 접시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몸이 경직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발이 차갑게 식어갔다.

이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환청도, 환각도 아니었다. 그의 눈앞에서, 그의 집에서,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몸을 움직여 뒷걸음질 쳤다. 거실을 가로질러 현관으로 향하려는데, 그 순간, 뒤에서 차가운 기운이 확! 하고 온몸을 감쌌다. 온몸의 세포가 얼어붙는 듯한 한기였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가 앉아 있던 소파의 등받이 뒤편에서, 어둠이 뭉쳐진 듯한 거무스름한 형체가 스르륵,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검은 그림자였지만, 분명히 그를 향해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자 속에서, 붉은색 점 두 개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눈이었다.

지훈은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인 공포가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는 발버둥치듯 비명을 내지르며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잡아 돌리려 했지만, 손이 땀으로 축축해 미끄러졌다.

“열려… 열려! 제발!”

그가 필사적으로 손잡이를 잡아 돌리는 순간,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수십 명이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그러나 단 하나의 목소리처럼 들리는 기이한 소리였다.

— 가지 마…

그리고 현관문 잠금장치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문이… 잠겼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지훈은 절규했다. 뒤를 돌아볼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는 쿵, 쿵, 쿵, 심장이 터져버릴 듯한 소리만 들으며 문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현관문 너머의 세상은 고요했다. 하지만 그의 아파트 안은, 이제 더 이상 고요하지 않았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서늘한 숨소리가 등 뒤에서 느껴졌다.

— 흐읍… 흐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