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쳤지만, 서연은 이불 속에서 쉽사리 벗어날 수 없었다. 이불의 온기 때문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를 감싸고 있던, 꿈이라는 이름의 따뜻한 환영이 아직 몸에 들러붙어 있는 듯했기 때문이다.
하은이 웃고 있었다. 코를 찡긋거리며 해맑게 웃던 얼굴이 너무나 선명했다. 꿈속에서 하은은 다섯 살, 서연의 품에 안겨 간지럼을 태워달라며 재롱을 부렸다. 통통한 손가락으로 서연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깔깔거리던 그 웃음소리가 아직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햇살이 가득한 거실, 창밖으로는 이름 모를 새소리가 들려왔고, 따뜻한 빵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가 하은과 함께 꿈꾸던, 그러나 현실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었던 평범하고 행복한 한 조각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눈을 뜨는 순간, 모든 마법은 산산이 부서졌다. 창밖은 흐린 회색빛이었고, 방 안에는 눅눅한 냉기가 감돌았다. 빵 냄새 대신 며칠째 비어있는 집안의 쿰쿰한 냄새가 비강을 찔렀다. 하은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고요와 적막만이 서연을 감싸고 있었다.
어젯밤 ‘꿈을 파는 상점’에서 구매했던 꿈이었다. 주인장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작은 유리병 하나를 건네주었다. 병 안에는 마치 은하수 조각처럼 반짝이는 작은 빛들이 가득했다. “당신이 가장 간절히 바라는 순간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줄 겁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깊은 슬픔을 담고 있는 듯했다.
서연은 유리병을 침대 머리맡에 두고 잠들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엄마가 되었다. 살아있는 하은을 품에 안고, 그 아이의 온기를 느끼고, 해맑은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너무나도 생생하여 꿈이라는 것을 의심할 틈조차 주지 않았다.
이제 꿈에서 깨어났으니, 그 환상은 다시 지독한 현실로 변모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꿈이 너무나 달콤했기에, 현실의 쓰라림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마치 뜨겁게 달궈진 칼날이 심장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다시 꿈속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성(理性)은 이미 차갑게 깨어있었다.
며칠 밤낮을 울어 눈물샘이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뜨거운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베개가 축축해질 때까지 울었다. 하지만 이번 눈물은 슬픔만은 아니었다. 꿈속에서 느꼈던 행복, 그 찰나의 기쁨이 역설적으로 그녀를 더 깊은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 ‘왜 하필 그 꿈이었을까? 왜 하필 그렇게 행복했을까?’
오후 늦게야 서연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폐허와 같았다. 붉게 부어오른 눈, 핏기 없는 입술, 푹 꺼진 뺨. 살아있는 송장이 따로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문득, 상점 주인장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꿈은 때로는 가장 잔혹한 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합니다.” 그때는 그저 시적인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말의 의미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꿈은 하은을 다시 데려와 주지 않았다. 오히려 하은의 부재를 더욱 강렬하게 상기시켜 주었다.
서연은 홀린 듯 옷을 갈아입었다. 갈 곳은 정해져 있었다. 다시 ‘꿈을 파는 상점’으로. 그녀는 주인장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행복을 왜 팔았느냐고. 아니, 어쩌면 또 다른 꿈을 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는, 혹은 하은과 다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환상을.
거리는 인파로 북적였다. 사람들은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바삐 움직였고, 서연은 그 속에서 홀로 정지된 시간 속에 갇힌 듯했다. 상점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골목길, 오직 상점의 유리창에서만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낡은 나무 문을 열자, 익숙한 종소리가 맑게 울렸다. 딸랑.
주인장은 카운터 뒤에 앉아 차분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찻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서연이 들어서자, 그는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눈빛은 깊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다시 오셨군요.”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마치 서연이 돌아올 것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서연은 숨을 고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대체… 대체 당신이 파는 꿈은 무엇입니까? 왜 저에게 그런 꿈을 주었나요? 너무… 너무 행복해서 더 아픕니다. 차라리 꿈을 꾸지 않았다면 이토록 고통스럽진 않았을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듯 흔들렸다.
주인장은 책을 덮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서연을 향해 걸어왔다. 그의 그림자가 서연을 덮었다.
“행복한 꿈은 그저 망각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손님. 진정한 목적은… 그 행복이 현실의 그림자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서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현실의 그림자라니요? 하은은 죽었어요! 그게 현실입니다! 꿈속의 하은은… 가짜잖아요!”
“가짜가 아닙니다.” 주인장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것은 당신의 기억, 당신의 사랑, 당신의 희망이 만들어낸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진실입니다. 단지… 당신이 지금 발 딛고 선 현실과는 다른 차원의 진실일 뿐이지요.”
그는 서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꿈은 당신에게 하은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당신에게 물었을 겁니다. ‘이토록 생생한 행복을 맛본 당신은,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라고요.”
서연은 멍하니 서 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녀는 그저 하은을 그리워하며 매일매일을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었다. 죽은 하은의 흔적을 쫓아 살거나, 혹은 하은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당신은 하은이 없는 현실에서, 하은이 준 행복을 어떻게 이어갈지 고민해야 합니다.” 주인장의 목소리는 이제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그 꿈은 당신에게 잠시의 위로를 주었지만, 동시에 당신 안에 잠들어 있던 사랑과 열망을 다시 일깨운 겁니다. 죽은 하은을 붙잡는 대신, 그 아이가 살아있었다면 당신에게 무엇을 바랐을지 생각해 보세요.”
서연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하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환하게 웃으며 “엄마, 행복해야 해!”라고 외치던 하은의 마지막 모습. 그녀는 꿈속에서 다시 만난 하은에게도 같은 말을 들었던 것 같았다. ‘엄마는 웃는 게 제일 예뻐.’
“제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서연은 넋 나간 듯 중얼거렸다.
주인장은 다시 카운터로 돌아가 작은 서랍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는 빈 페이지를 서연에게 내밀었다.
“꿈은 끝났습니다. 이제 당신의 현실을 채울 새로운 ‘이야기’를 써야 합니다. 당신이 하은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하은이 당신에게 보고 싶어 할 이야기를요. 당신의 현실에서, 당신의 삶으로.”
그의 손짓은 서연의 손에 빈 수첩과 펜을 쥐여주었다. 수첩은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였다. 서연은 그 하얀 페이지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가슴이 시리고, 눈물이 차올랐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작은 불씨가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불씨는 그녀가 꿈속에서 느꼈던 하은의 온기처럼, 차갑게 얼어붙었던 심장을 아주 조금씩 녹여주는 듯했다.
“하은이… 바랐을까요?” 서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주인장은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당신이 스스로 찾아야 할 답입니다. 그리고 그 답을 찾았을 때, 이 상점은 더 이상 당신에게 필요 없을 겁니다.”
상점의 문밖으로,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서연은 텅 빈 수첩을 든 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하은의 웃음소리를 떠올렸다. 그 웃음은 이제 더 이상 그녀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칼날이 아니었다. 대신,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그녀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작은 별빛처럼 느껴졌다.
서연은 상점 문을 나섰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발걸음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무엇을 시작해야 할지,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았다. 텅 빈 수첩의 첫 페이지에, 어떤 이야기가 쓰일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확신했다. 그것은 더 이상 슬픔만으로 채워지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라고. 하은이 준 마지막 선물이, 이제 그녀의 삶을 다시 시작하게 할 작은 희망이 되어, 어둠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