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지난번 일기에서 읽었던, 아직 앳된 할머니의 첫사랑 이야기가 마음을 아련하게 휘감았다. 이제는 주름진 손으로 굳건히 세월을 이겨내신 분이, 한때는 그렇게나 가슴 저미는 사랑을 했을 거라는 사실이 낯설면서도 아름답게 느껴졌다. 얇은 종이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과거의 공기가 스며 나오는 듯했다. 습한 여름날의 꿉꿉함, 겨울밤의 매서운 냉기, 어딘가에서 피어났을 꽃향기, 그리고 고단한 삶의 냄새까지도.
다시 펼쳐든 일기장은 이전의 낭만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찢어진 페이지들 사이, 꾹꾹 눌러쓴 글씨들이 유난히 힘겹게 다가왔다. 종이 한 귀퉁이에는 오래되어 바스라질 것 같은 작은 나뭇잎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그 나뭇잎마저도 어떤 간절한 사연을 품고 있는 듯했다.
1952년, 겨울, 이름 모를 날
창밖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밤새 내린 눈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세상을 고요한 죽음처럼 만들었다. 하지만 내 안의 폭풍은 그치지 않았다. 상혁 씨는 오늘도 열에 들떠 신음했다. 작은 움막집은 한기가 가득했고, 약은커녕 죽 한 그릇 해 먹을 쌀조차 동이 난 지 오래였다.
그의 손을 잡을 때마다 심장이 시렸다. 불덩이 같은 그의 몸과 다르게 내 손은 얼음장 같았다. 이대로 그를 떠나보낼 수는 없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희망은 바로 그 사람이었다. 김 노인, 마을 뒷산에 숨어 산다는 약초꾼. 하지만 그를 찾아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굶주린 사람들의 눈을 피해 깊은 산을 헤쳐야 했고, 혹시라도 군인들에게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며칠 밤낮을 고민했다. 나의 작은 옥 노리개를 팔면 그 약초꾼을 찾아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찾아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그가 상혁 씨의 목숨을 구할 만한 귀한 약재를 줄 리 없었다. 나에게는 그 노리개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오신 유일한 패물. 굶주림 속에서도 차마 팔지 못했던 마지막 자존심. 하지만 상혁 씨의 생명과 바꿀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아깝지 않았다.
새벽녘, 고요한 어둠 속에서 나는 조심스럽게 움막을 나섰다. 잠든 상혁 씨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지막이라는 듯이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부디, 내가 돌아올 때까지 버텨주기를. 나의 발걸음은 눈 위에 희미한 흔적을 남기며 산을 향해 내달렸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때리고 발은 찢어질 듯 시렸지만,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살려야 한다. 반드시.
산은 너무나 깊었고, 눈은 허벅지까지 빠졌다. 몇 번을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기를 반복했다. 나뭇가지에 걸려 얼굴을 긁히고 옷은 찢겨나갔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김 노인의 오두막이 나타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 나는 간신히 김 노인의 오두막을 찾아낼 수 있었다. 허겁지겁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조차 없었다. 절망이 온몸을 감쌌다. 온몸의 피가 식어버리는 듯했다.
그때였다. 숲 저편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채 고개를 돌리니, 김 노인이 지게에 나무를 한 짐 짊어지고 나타났다. 그의 눈은 날카로웠지만, 나의 절박한 사연을 듣고는 이내 연민으로 바뀌는 듯했다. 나는 무릎을 꿇고 옥 노리개를 내밀었다. 어머니의 유품, 나의 마지막 희망. 그는 아무 말 없이 노리개를 받아들더니, 낡은 약재함에서 말린 풀뿌리 몇 개와 정체 모를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을 꺼냈다. “이것이 전부다. 사람의 생명은 하늘에 달린 것이니,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하산하는 길은 오를 때보다 더 힘겨웠다. 노리개를 팔았다는 허탈감, 상혁 씨가 살아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짓눌렀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정신력으로 버텼다. 움막으로 돌아왔을 때, 상혁 씨는 여전히 뜨거운 몸으로 밭은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약을 달이고 그의 입에 한 방울씩 흘려주었다. 밤새도록 그의 곁을 지키며 간절히 기도했다. 제발, 제발… 이 약이 통하길.
새벽이 되어서야 그의 열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축 늘어졌던 몸에 미미하게나마 생기가 돌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의 마음속에는 또 다른 슬픔이 밀려왔다. 이제 상혁 씨는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미래는… 노리개는 없었다. 다시 돌아갈 곳도, 이제는 기댈 곳도 없었다. 오직 상혁 씨의 옆에 남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에게는 내가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내가 그를 떠나보내는 것이 그를 위한 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상혁 씨… 당신이 살아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그날 밤, 나는 잠든 상혁 씨의 옆에 앉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가 그를 구했지만, 이제는 그를 놓아주어야 할 때가 올지도 모른다는 잔인한 예감과 함께.
일기장 위로 뜨거운 눈물이 툭 떨어졌다. 지혜는 자신의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글씨를 응시했다. ‘상혁 씨… 당신이 살아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이 한 문장이 지혜의 심장을 난도질하는 듯했다. 할머니가 이토록 처절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고 누군가를 살려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절절한 슬픔. 그 사람을 살려냈음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를 떠나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지혜는 상상했다. 살을 에는 듯한 겨울바람 속에서, 허벅지까지 빠지는 눈밭을 헤치며 산을 오르는 젊은 할머니의 모습을. 얼굴에는 피와 땀, 눈물이 뒤섞였을 것이다. 온몸이 찢어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었어도, 오직 사랑하는 사람을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텨냈을 그 강인함. 그리고 그 모든 희생 끝에 찾아온 또 다른 절망과 비극.
문득, 지혜는 일기장 한 귀퉁이에 끼워져 있던 나뭇잎에 시선이 닿았다. 바스라질 듯 말라붙은 작은 나뭇잎. 혹시 그때 그 산에서, 할머니가 주워 온 것이 아닐까? 그 고난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혹은 다시는 그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간직한 상징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혜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할머니는 그 이후로 상혁 씨를 떠나보냈을까? 아니면 그 역경을 딛고 함께했을까? 만약 떠나보냈다면, 할머니의 삶은 그 후로 어떻게 흘러갔을까? 지혜의 머릿속은 수많은 질문으로 가득 찼다. 이토록 깊은 상처를 품고도 할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밝고 강인하게 살아올 수 있었을까? 이제까지 자신이 알던 할머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는 사실에 섬뜩한 깨달음을 얻었다.
지혜는 떨리는 손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예상치 못한, 그러나 어렴풋이 짐작했던 한 문장이 희미하게 쓰여 있었다.
“그는 떠났다. 나의 희망과 함께.”
그리고 그 밑에는 잉크가 번져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몇 줄의 글이 이어져 있었다. 마치 쏟아지는 눈물로 얼룩진 과거의 조각처럼. 지혜는 그저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은 채 다음 페이지로 시선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또다시 깊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소용돌이 속으로 지혜를 끌어당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