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공기가 갤러리 복도를 감쌌다. 낮은 조도의 간접 조명 아래, 매끈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은 은은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초여름 밤의 습기를 잊게 할 만큼 쾌적한 냉기가 피부에 닿았다.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서은우는 눈앞의 전시 작품들을 스쳐 지나갔다. 색색의 추상화들이 벽에 걸려 있었지만, 은우의 눈은 그저 그림의 형태만을 인지할 뿐이었다. 그의 내면은 고요한 호수 아래 감춰진 거대한 빙산처럼 묵직한 감정으로 가득했다.
입구에서 받은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탄산 기포가 혀끝에서 터지며 미약한 알코올 향을 남겼다. 이 밤의 목적은 취기가 아니었다. 그저, 지루할 틈을 채워줄 도구일 뿐. 은우는 손에 든 얇은 초대장을 다시 확인했다. ‘강지혁 개인전 오프닝 리셉션’. 웃음이 나왔다. 웃는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분명히 그랬다. 오랜 세월 침묵했던 복수의 서곡이 드디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몇 걸음 더 옮기자, 리셉션 홀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저마다 우아한 복장으로 잔을 부딪치며 웃고 떠드는 모습. 성공한 디자이너 강지혁의 인맥을 과시라도 하듯, 이름 있는 예술가들과 기업인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강지혁.
그때와 변함없이 화려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얄팍한 우정에 은우의 전부를 걸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다. 아니, 우정이라 믿었던 것은 그저 지혁의 탐욕스러운 그림자에 불과했다. 은우의 꿈, 열정, 그리고 아이디어. 모든 것을 강지혁은 아무렇지 않게 집어삼켰고, 그것을 발판 삼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번쩍이는 조명 아래, 환호와 찬사 속에서.
은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과거의 비릿한 기억을 억눌렀다. 이 순간을 위해 수많은 밤을 견뎌냈다. 무너져 내린 모든 조각들을 하나하나 다시 주워 담아, 더 날카로운 칼날로 벼려냈다. 이제 그 칼날을 휘두를 때가 왔다.
“어이, 은우 씨! 여기 계셨네요!”
낯익은 목소리에 은우는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한 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명 갤러리의 큐레이터, 윤지민이었다. 그녀는 은우를 발견하고는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지민 씨, 늦었네요.”
“어휴, 죄송해요. 마지막까지 일이 좀 꼬여서. 그래도 서은우 작가님 보러 달려왔잖아요.”
지민은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리며 은우의 팔짱을 끼었다. 은우는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풀고는 어깨를 툭 쳤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제 막 시작이니까.”
“맞아요, 오늘 강지혁 작가님 작품 진짜 대박이에요. 특히, 저기 중앙에 있는 ‘환영의 숲’이요. 보셨어요?”
지민의 시선이 홀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설치미술로 향했다. 숲의 형상을 본뜬 구조물 사이로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은우의 눈에는 그것이 거대한 독버섯처럼 보였다. 저 작품은, 분명 은우가 수년 전, 지혁에게 보여줬던 미완의 스케치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내면의 숲’이라 이름 붙였던 아이디어.
“아직요.” 은우는 덤덤하게 말했다. “천천히 둘러보려고요.”
“그러시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강 작가님이 지금쯤 저쪽에서 사람들하고 인사 나누고 계실 거예요.”
지민은 은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홀 중앙을 향해 나아가자, 지혁의 웃음소리가 더 가까이 들려왔다. 심장이 차갑게 수축하는 것을 느꼈다. 이 밤의 첫 번째 막이 오르고 있었다.
“강 작가님! 이쪽이에요!”
지민의 목소리가 터지자, 지혁의 시선이 은우에게로 향했다. 순간, 지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에 스친 것은 놀라움, 당혹감, 그리고 불쾌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가면을 썼다.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혹시…?”
은우는 아무 말 없이 지혁을 응시했다.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예전의 초라했던 은우는 더 이상 없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다져진 단단함,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자의 비범함이 은우의 표정에서 흘러나왔다.
“강지혁 작가님, 오랜만입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속에는 얼음처럼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 있었다.
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제야 은우를 완전히 알아본 듯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 서은우? 네가 어떻게… 여기에?”
그의 말 속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은우는 그 경계심을 읽고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이 불안감이 너를 갉아먹을 첫 번째 씨앗이 될 테니.
“지민 씨 덕분에요.” 은우는 자연스럽게 지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민 씨가 이 전시회를 꼭 보러 오라고 권유하더군요. 특히 강 작가님의 작품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으셔서.”
“아, 네! 제가요! 서은우 작가님은 저희 갤러리가 심혈을 기울여 모시고 있는 분이시잖아요. 마침 지혁 작가님도 같은 계열이라 생각해서 소개시켜드렸는데, 두 분이 원래 아는 사이셨네요?” 지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하게 웃었다.
지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시선은 은우와 지민 사이를 오갔다. ‘서은우 작가님’, ‘저희 갤러리가 심혈을 기울여 모시고 있는 분’. 이 단어들이 지혁의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맴도는 것이 눈에 선했다.
“서은우 작가라니…?” 지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은우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지혁을 응시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강 작가님처럼 말이죠.”
지혁은 더 이상 웃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경계심을 넘어선 의구심과 당혹감으로 가득했다. 은우는 천천히 샴페인 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갔다. 톡 쏘는 탄산이 다시 혀끝을 자극했다.
“참, 강 작가님. 이번 ‘환영의 숲’ 말입니다.” 은우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말… 인상 깊더군요. 특히 그 구조와 빛의 활용이요. 제가 예전에 스케치했던 ‘내면의 숲’과 흡사한 부분이 많아서 더욱이 놀랐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린 듯 흔들렸다. 주변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은우와 지혁, 둘만의 세계가 된 것 같았다. 지민은 두 사람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지혁은 말을 더듬었다.
은우는 그의 말을 자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차가운 얼음처럼 지혁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아, 물론 제 스케치는 미숙한 습작이었죠. 강 작가님 덕분에 이렇게 멋진 작품으로 탄생한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언젠가… 강 작가님과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 아이디어가 강 작가님의 손을 거쳐 어떻게 피어날지… 정말 기대됩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더없이 상냥했지만, 그 속에는 숨 막히는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 ‘함께 작업할 기회’, ‘내 아이디어’. 그 단어들이 지혁의 심장을 죄는 족쇄가 되어 울렸다.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는 모든 것이 들통난 자의 절망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그의 화려한 가면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은우는 그의 흔들리는 눈빛 속에서 섬광처럼 번뜩이는 과거의 기억들을 보았다. 비열한 미소, 자신만만한 조롱, 그리고 무너져 내리던 은우의 세계.
복수는 차가운 음식이라고 했던가. 은우는 이제 막 애피타이저를 내놓았을 뿐이었다. 본식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갤러리의 화려한 조명 아래, 강지혁의 ‘환영의 숲’은 이제 그에게 진정한 ‘환영(幻影)’이자 피할 수 없는 지옥이 될 터였다.
은우는 작게 속삭였다.
“자, 이제 시작이야, 지혁아.”
그 말은 오직 지혁의 귓가에만 맴도는, 감미로우면서도 섬뜩한 속삭임이었다.
지혁은 입을 꾹 다문 채, 식은땀을 흘리며 은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깊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홀 안의 웃음소리가 다시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지혁에게는 그 모든 것이 비웃음으로 들렸다.
그는 마치, 거대한 폭풍의 눈동자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폭풍은, 은우의 손끝에서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