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카나의 잔해 – 제 17화: 그림자의 시간
낡은 석벽이 서서히 옆으로 밀려났다. 수천 년은 족히 묵었을 법한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차갑고 습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시우는 한 손에 든 마법 등불을 바짝 치켜들었다. 램프의 푸른빛이 흔들리며 어둠을 밀어냈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광경은 빛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불길함으로 가득했다.
“젠장… 여기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던 거야?” 시우의 목소리는 제법 낮게 깔려 있었지만, 그 안에는 억누르기 힘든 긴장감이 묻어났다.
지혜는 그의 뒤에서 바싹 붙어섰다. 그녀의 눈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지만,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빛이 역력했다. “학교 기록에도 없던 곳이야. 이 정도 규모의 공간을 이렇게 완벽하게 숨길 수 있었다니… 미쳤어.”
숨겨진 통로 너머는 좁은 복도가 아니라, 뻥 뚫린 듯한 거대한 공동이었다. 푸른 등불 빛이 닿지 않는 저편은 영원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발밑의 돌바닥은 울퉁불퉁했고, 벽면에는 이끼처럼 검붉은 자국들이 얼룩덜룩하게 펴져 있었다. 단순한 곰팡이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의 피가 말라붙은 것처럼 기분 나쁜 얼룩이었다.
“냄새… 느껴져?” 시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래된 먼지 냄새 말고, 다른 뭔가가 섞여 있어. 불쾌한… 비릿하고, 또…”
“오존 냄새.” 지혜가 그의 말을 이었다. “마법이 과도하게 집중되거나, 차원 간섭이 일어날 때 나는 특유의 냄새야. 그것도 아주 강하게.”
두 사람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공동의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구조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램프 빛이 겨우 구조물의 하단부를 비추자, 시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것은 고대의 유물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섬뜩할 정도로 현대적인 금속 재질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서로 다른 시대의 기술이 끔찍하게 융합된 혼종 같았다.
구조물의 표면에는 복잡한 마법진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단순히 마력을 증폭시키는 수준을 넘어, 시공간의 틈새를 억지로 벌리는 듯한 위압적인 문양이었다. 시우는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언뜻 보았던 금기된 마법 서적의 삽화들을 떠올렸다. 시간을 조작하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금지된 ‘역행 마법’의 문양과 흡사했다.
“이건… 믿을 수 없어.” 지혜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런 마법진을 학교 지하에, 그것도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누가 감히?”
그녀는 주저앉아 바닥에 널브러진 낡은 양피지 조각들을 발견했다. 먼지를 털어내자, 흐릿한 글자들이 드러났다. 시우가 등불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이건… 연구 기록인가?” 시우가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갔다. “’시간의 닻(Anchor of Time) 실험 보고서, 제… 783회.’ 맙소사. 783회? 대체 몇 번이나 이 짓을 한 거야?”
지혜는 다른 양피지 뭉치를 집어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 “읽어봐… 시우. 여기 쓰여진 내용을.”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읽기 시작했다.
* *…제 783차 실험, 대상: 아카데미 3학년 템프스 분과, 율리우스. 정신 동기화율 87% 달성. 일시적인 시간 왜곡 구간 생성 성공. 율리우스는 과거 특정 시점의 잔상과 미약하게 접촉. 그러나 부작용 발생. 대상의 인격에 미세한 혼란 관측. 복수의 자아가 공존하려는 경향 보임…*
“복수의 자아?” 시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설마… 시간 왜곡으로 인해 과거와 현재의 자아가 충돌한다는 건가?”
지혜는 다른 기록을 찾았다.
* *…제 812차 실험, 대상: 아카데미 2학년 에테르 분과, 리리아. 정신 동기화율 92% 달성. 과거 특정 시점의 정보 조각 회수 성공. 그러나 회수된 정보는 단편적이며 심각하게 왜곡됨. 리리아의 정신 상태 불안정. 현재와 과거, 그리고 잠재적 미래의 이미지가 뒤섞여 발작 증세 보임. 그녀는 자신이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한다고 주장. 담당 마법의사는 회복 불능 판정…*
“회복 불능… 이런 미친 짓을!” 시우는 양피지를 구겨버릴 뻔했다. “이건 실험이 아니야! 학대야! 살아있는 사람을 도구로 사용했잖아!”
그때였다. 시우의 등불이 갑자기 깜빡였다. 마치 기계가 오류를 일으킨 것처럼, 푸른빛이 희미해졌다 강해지기를 반복했다. 동시에 공동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오존 냄새가 더욱 짙어졌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기분 나쁜 정전기가 온몸을 감싸는 듯했다.
“시우! 저거 봐!” 지혜가 손가락으로 거대한 원형 구조물을 가리켰다.
구조물의 표면에 새겨진 마법진들이, 갑자기 희미한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한 줄기, 두 줄기… 이내 모든 마법진이 섬뜩한 붉은색으로 타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뜨거운 공기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혹은 유리에 금이 가기 직전처럼.
공간의 왜곡이 심해지면서, 알 수 없는 형체가 그 안에서 꿈틀거렸다. 처음에는 흐릿한 그림자 같았던 것이, 점차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교복을 입은 학생의 모습.
“저건…!” 지혜가 숨을 들이켰다.
학생의 형체는 일렁였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어 있었지만, 그 몸짓에서 느껴지는 절규는 너무나 생생했다. 찢어질 듯한 비명이 공간을 가르며 울려 퍼졌다. 소리는 귀를 찌르는 듯했지만, 동시에 어딘가 먹먹하고,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기이한 위화감이 있었다. 마치 수많은 시간의 층을 뚫고 겨우 도착한 소리처럼.
학생의 몸이 비틀렸다. 사지가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였고, 얼굴은 여러 개의 표정이 뒤섞인 듯 일그러졌다. 한 순간은 두려움에 질린 얼굴이었다가, 다음 순간은 고통에 몸부림치는 얼굴, 그리고 또 다음 순간은… 광기에 찬 미소였다.
“도와줘… 난… 나는 어디에…”
비명과 함께 들려온 혼탁한 목소리. 그 순간, 시우의 눈에 학생의 교복 명찰이 잡혔다. 희미하게 빛나는 그것은, 율리우스, 리리아의 이름이 아니었다.
‘카이엘…’
선명하진 않았지만, 시우는 그 이름을 분명히 읽었다. 그리고 그 순간, 비틀리던 형체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들을 향했다. 일그러진 광기의 미소가 섬뜩하게 자신들을 응시했다.
*쉬이이이이잉…*
갑작스러운 경고음이 공동 전체를 뒤흔들었다. 학교 깊숙한 곳에서 울려 퍼지는, 침입자를 알리는 비상 벨 소리였다.
시우는 뒤돌아볼 새도 없이 지혜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들켰어! 당장 나가야 해!”
공간의 왜곡은 더욱 거세졌고, 카이엘의 잔상은 사방으로 찢겨나가듯 흐트러졌다. 그러나 그 파편들 속에서, 시우는 섬뜩한 환상을 보았다. 수많은 카이엘들이, 서로 다른 시간대의 카이엘들이, 동시에 자신들을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을. 그들의 눈빛에는 절망과 원망, 그리고 기묘한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무언가가 그들을 따라오고 있었다. 이 끔찍한 시간의 감옥에서, 풀려나길 갈망하는 존재들이.
시우는 지혜를 이끌고 통로를 향해 전력으로 내달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는 더욱 커졌고, 경고음은 귓속을 파고들 듯 날카롭게 울렸다. 이 모든 지옥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 아르카나 학원의 가장 깊은 어둠이 이제 그들을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