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오페라 독립적인 단편 소설

민준은 낡은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었다. 늦은 밤, 도시의 소음마저 잠든 시간. 창밖으로는 희미한 불빛만 점점이 박혀 있었다. 오늘도 야근이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겨우 현관문을 열었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분명 아침에 가지런히 벗어놓았던 운동화 한 짝이 신발장 복도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피곤해서 발로 툭 찼겠지.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처음엔 사소했다.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리거나, 분명 잠갔던 현관문이 덜컥거리는 소리를 내는 정도. 처음에는 “아, 이 낡은 아파트가 드디어 미쳤나” 하고 넘겼다. 한 달쯤 전부터였다. 퇴근 후 샤워를 하려고 욕실에 들어서면, 틀어놓지도 않은 수도꼭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수도꼭지를 만져보면 물기는 없었다. 환청이겠거니 했다.

어느 날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화면이 지지직거리더니 갑자기 엉뚱한 채널로 넘어갔다. 평소 보지도 않던 홈쇼핑 채널에서 거대한 해파리처럼 생긴 생명체가 유영하는 영상이 흘러나왔다. 분명 홈쇼핑 채널 로고는 그대로였는데, 영상만 기묘했다. 섬뜩한 푸른빛을 내는 해파리가 우아하게 움직이다가, 화면이 순식간에 다시 민준이 보던 드라마로 돌아왔다.

“뭐야, 텔레비전도 맛이 갔네.”

그는 리모컨을 두드리며 애써 웃었다. 하지만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은 어쩔 수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밤이 되면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탁상시계가 혼자서 알람을 울리기 시작했다. 분명 알람을 설정하지 않았는데, 새벽 3시 17분, 4시 29분 같은 불규칙한 시간에 기계적인 멜로디를 토해냈다. 끄려고 손을 뻗으면, 알람은 정확히 손가락이 닿기 직전에 멈췄다. 마치 누군가 그를 놀리는 것처럼.

민준은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공대 출신에 소프트웨어 개발자였다. 미신이나 비과학적인 현상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현상을 ‘낡은 아파트의 문제’로 돌렸다. 전선이 낡았거나, 수도관이 부식되었거나, 아니면 자신이 너무 지쳐서 환각을 보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건은 점점 기괴해졌다.

어느 저녁, 그는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때였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커피잔이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아무런 충격도 없이 식탁 모서리에서 허공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떨어지는 그 순간, 커피잔은 마치 홀로그램처럼 일렁이며 사라졌다.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도, 깨지는 파편도 없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증발해버린 것이다.

민준은 입을 떡 벌렸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눈을 비볐다. 다시 식탁 위를 확인했다. 커피잔은 온데간데없었다. 이건 환각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보았다. 물리학 법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광경이었다.

그날 밤부터 민준은 아파트 곳곳에 스마트폰을 설치하고 녹화 버튼을 눌렀다. 증거가 필요했다. 자신이 미치지 않았다는 증거.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이 미쳐가고 있다는 증거.

며칠 밤낮으로 녹화된 영상은 그를 충격에 빠뜨렸다.

어느 날 녹화된 영상 속에는, 그가 잠든 사이 책상 위의 책들이 한 장 한 장씩 저절로 넘어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책장이 넘어갈 때마다, 희미하게 빛나는 연보라색의 글자들이 책장의 한 구석에 아주 잠깐씩 나타났다 사라졌다. 민준은 그것이 글자인지, 아니면 단순한 빛의 파동인지 알 수 없었다. 그건 지구상의 어떤 문자 체계와도 달랐다.

다른 영상에서는, 거실 벽지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모습이 포착됐다. 벽지가 마치 물결처럼 일렁이다가, 한순간 투명해지면서 그 너머로 언뜻 비치는 풍경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행성이 지평선에 걸려 있고, 알 수 없는 푸른색 식물들이 빽빽하게 솟아있는, 마치 다른 행성의 황홀한 풍경이었다.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민준은 그 순간 얼어붙었다. 이건 그냥 벽지가 낡아서 그런 게 아니었다.

“이게… 대체 뭐야?”

그는 노트북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 모든 기이한 현상들이 단순히 ‘폴터가이스트’ 현상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이고, 너무나… 거대했다. 마치 이 아파트가 다른 차원의 존재와 연결된 게이트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날 밤, 민준은 침대에 누웠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새벽 두 시쯤이었을까. 거실에서 미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도, 알람 소리도 아니었다. 바람이 부는 듯한, 하지만 그보다 훨씬 깊고 웅장한, 마치 거대한 성가대가 아주 낮은 음으로 노래를 부르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거실 중앙, 가장 자주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던 그 자리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마치 오로라가 지상으로 내려온 것처럼, 투명한 푸른색과 보라색, 그리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은하수 같은 색채가 뒤섞인 빛의 기둥이 바닥에서 천장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빛의 기둥 속에서, 거실의 풍경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벽은 엿가락처럼 휘고, 천장은 우주 공간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암흑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그 빛의 소용돌이 속에서, 뭔가가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그것은 손도, 발도, 얼굴도 없었다. 형체를 정의할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였다. 빛으로 이루어진 구름 같기도 했고, 수십만 개의 별들이 모여 이루어진 은하의 잔해 같기도 했다. 그 빛 덩어리 속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한 정보의 흐름이, 전자기파의 파동이, 혹은 수천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듯한 느낌이 민준의 온몸을 덮쳤다.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이미지와 정보가 강제로 주입되기 시작했다.

황량한 우주 공간을 떠도는 거대한 함대. 별들 사이를 유영하는 문명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검은 장막. 어둠 속에서 빛을 잃어가는 행성들. 절규하는 존재들. 그 모든 비극의 파편들이 민준의 뇌를 강타했다. 그것은 경고였다. 혹은 도움을 요청하는 절규였다.

“인류에게… 경고… 차원 간의 틈새… 침식… 현실의 붕괴…”

어떤 언어로도 정의할 수 없는, 순수한 의식의 파동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아파트의 벽이 사라지고, 천장이 무너지는 환각 속에서, 그는 자신이 서 있는 곳이 더 이상 서울의 낡은 아파트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곳은 우주였다. 차원의 틈새였고, 거대한 코스모스의 한 조각이었다.

빛의 기둥은 순간적으로 극대화되었다가, 마치 빨려 들어가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파트 거실은 다시 평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깨진 커피잔도, 일렁이는 벽지도, 외계의 풍경도 없었다. 모든 것이 원상복귀된 듯 보였다. 민준은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렸다. 그의 시선은 거실 한가운데, 방금 빛의 기둥이 솟아올랐던 그 자리에 박혔다.

그는 알았다.

더 이상 이 현상을 단순한 ‘폴터가이스트’라고 부를 수 없음을. 이 아파트가, 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우주적 규모의 거대한 전쟁 속에서 우연히 발견된, 혹은 의도적으로 생성된 얇은 막이었음을. 그리고 그 막 너머의 존재가 필사적으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알리려 했다는 것을.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황량한 우주와 절규하는 문명들의 잔상이 생생했다. 그는 그날 이후,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다. 밤마다 그의 아파트는 고요한 도시의 불빛 아래에서, 우주적인 비극을 품고 있는 침묵의 관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민준은, 그 관문의 유일한 목격자이자, 어쩌면 그 비극의 다음 희생자가 될지도 모르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의 평범한 삶은 끝났다. 거대한 우주의 무대가 그의 작은 아파트에서 막을 올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