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가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맨살을 스쳤다. 지아는 미처 감지 못한 눈을 다시 꼭 감았다. 아직 꿈의 잔상이 너무나 선명해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조금 더 그곳에 머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희망을 품고 어둠 속으로 도피하려 했다.
하지만 지독하게 현실적인 새벽의 정적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눅진한 공기, 오래된 벽지에서 풍기는 미세한 먼지 냄새, 그리고 텅 빈 마음의 무게. 어제의 꿈은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강렬했다. 그녀가 꿈을 파는 상점에서 건네받은, 잃어버린 ‘그때의 나’의 꿈은 너무나 눈부셨다.
잃어버린 빛의 잔상
꿈속에서 그녀는 붓을 쥐고 있었다.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유화 물감의 꾸덕한 질감, 캔버스 위로 번져나가는 색채의 향연, 그리고 그림이 완성될 때마다 터져 나오던 환호성. 그 모든 것이 생생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화가 지아’였다. 햇살 가득한 작업실에서, 사랑하는 이들의 격려 속에서, 오직 예술에만 몰두하며 숨 쉬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현실의 지아는 달랐다. 찌든 월세와 카드값에 쫓겨 매일 컴퓨터 앞에 앉아 숫자를 다루는 회사원이었다. 스무 살, 그림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그녀는 현실의 벽 앞에서 붓을 놓아야 했다. 그때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왔다. 하지만 꿈속의 그녀는, 너무나 행복해 보였다. 너무나 완전해 보였다.
두 눈을 뜨자, 천장은 회색빛이었다. 낡은 형광등은 어둠에 갇힌 채 자신의 존재를 잊은 듯 침묵했다. 옆에 놓인 핸드폰 액정에서 차가운 숫자가 빛났다. 오전 6시.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하루의 시작. 하지만 지아는 일어날 수 없었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꿈속의 환희가 현실의 절망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침대 옆 협탁에는 작은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그 속에는 어제 꿈을 담아주었던 영롱한 빛깔의 액체가 아직 남아있었다. 꿈을 파는 상점의 점장님은 말했다. “꿈은 기억을 되찾아주는 동시에, 잊었던 갈망을 일깨웁니다. 때로는 잔혹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요.” 지아는 그 말의 의미를 이제야 절실히 깨달았다. 잔혹했다. 너무나 잔혹하게 아름다웠다.
현실의 무게
“지아 씨, 오늘까지 그 자료 마무리해야 하는 거 알죠? 점심시간 전에라도 좀 봅시다.”
귓가를 파고드는 팀장의 목소리는 어제의 꿈과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다. 건조하고 무미건조한 현실의 단면. 지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꿈속에서 영감에 가득 차 붓을 휘두르던 손은, 지금 차가운 키보드 위를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눈앞의 숫자들이 흐릿해 보였다. 꿈속의 다채로운 색채가 아직 망막에 선연한 탓이었다.
점심시간, 동료들이 삼삼오오 모여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 때, 지아는 홀로 옥상으로 향했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스쳤다. 도시의 회색빛 빌딩 숲은 숨 막힐 듯했다. 꿈속의 햇살 가득한 작업실, 창밖으로 보이던 푸른 숲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는 난간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었다. 꿈이 현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슴 속에 응어리진 그리움이 아팠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열정이 다시 불씨처럼 타오르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믿어왔던 이 길이 정말 나를 위한 길이었을까? 꿈이 던져준 질문들은 그녀의 견고했던 현실을 산산조각 내고 있었다.
문득 지아는 주머니에서 낡은 열쇠고리를 꺼냈다. 스무 살 때, 친구가 직접 만들어준 작은 붓 모양의 열쇠고리였다. 한때는 항상 가방에 달고 다녔지만, 언젠가부터 서랍 한 구석에 박아두었던 것이었다. 이제는 녹슬고 색이 바랬지만, 그 붓 모양은 여전히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잊지 마, 지아. 네 심장이 어디로 향하는지.”
친구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때의 그녀는 친구의 말을 코웃음 치며 넘겼었다. ‘세상이 그림만으로 돌아가는 줄 알아?’라고 비웃었었다. 하지만 지금, 그 비웃음이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오래된 스케치북
퇴근 후, 지아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어제와 똑같은 눅진한 공기가 그녀를 맞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딘가 달랐다. 텅 비었던 마음속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지아는 망설임 없이 옷장 깊숙이 박혀있던 상자를 꺼냈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상자 안에는 빛바랜 스케치북과 몇 개의 굳은 물감 튜브, 그리고 낡은 붓들이 들어있었다. 상자 속 물건들은 마치 그녀의 잃어버린 젊음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스케치북을 펼쳤다. 첫 페이지에는 어설프지만 풋풋한 그녀의 습작들이 그려져 있었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잊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캔버스 앞에서 밤새워 그림을 그리던 열정, 손가락에 묻은 물감 자국, 친구들과의 격렬한 토론. 그 모든 것이 그녀의 일부였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미완성된 풍경화 스케치가 있었다. 그녀가 붓을 놓기 직전까지 그리던 그림이었다. 그림 속에는 푸른 언덕과 작은 오솔길, 그리고 그 길 끝에 흐릿하게 보이는 집 한 채가 있었다. 그 집은 그녀가 꿈속에서 보았던 작업실과 어딘가 닮아 있었다.
지아의 손가락이 그림 위를 더듬었다. 메말랐던 눈가에 뜨거운 기운이 차올랐다. 꿈속의 행복은 허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의 내면에 깊이 잠들어 있던, 결코 사라지지 않았던 ‘진정한 욕망’의 그림자였다. 현실과 타협하며 외면했던, 그러나 끊임없이 그녀를 갈망하게 만들었던 그 무엇이었다.
굳어버린 물감 튜브를 만지작거렸다. 다시 붓을 들 수 있을까? 이미 너무 늦은 건 아닐까? 수많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질문들 사이로, 작은 희망의 불꽃이 피어났다. 꿈은 그녀에게 과거의 완벽한 행복을 보여줌으로써, 현실의 불완전함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불완전함을 채울 수 있는 가능성 또한 보여주었다.
지아는 굳은 물감 튜브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마개는 녹슬어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작은 칼로 조심스럽게 마개를 벗겨냈다. 튜브 속에서 굳은 물감 조각이 떨어져 나왔다. 쓸 수 없는 물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굳은 물감 조각을 한참 동안 손안에 쥐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마음 같았다. 굳어버리고, 잊힌 줄 알았지만, 여전히 그 안에 색채가 잠들어 있는. 완전히 버려진 것이 아니라, 단지 다시 깨울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이었다.
지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낡은 스케치북을 들고 책상으로 향했다. 텅 빈 흰 종이 위에, 굳은 물감으로라도 다시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충동이 일었다. 완벽한 꿈의 세계는 현실이 될 수 없지만, 꿈이 준 영감으로 현실을 조금씩 색칠해나갈 수는 있을 터였다.
그녀는 다시 상점을 찾아갈 필요가 없었다. 꿈은 이미 그녀에게 답을 주었다. 답은 그녀의 내면에 있었다. 굳어버린 물감 조각을 내려놓고, 지아는 인터넷 검색창에 ‘성인 미술 학원’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입력했다. 새로운 시작의 아주 작은 첫걸음이었다. 어쩌면 그 길 끝에, 꿈속의 햇살 가득한 작업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을 품고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