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이 뼈대만 남은 유령처럼 솟아 있었다. 굉음은 없었다. 오직 고요만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듯했고, 이따금씩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신음소리가 그 침묵을 불길하게 갈랐다. 김도현은 찌푸린 미간으로 주변을 경계하며 삐걱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 활기 넘치던 도시의 거리는 이제 죽음의 전장이나 다름없었다.
“젠장…”
낮게 읊조린 욕설은 입안에서 맴돌다 흩어졌다. 그의 오른쪽 허벅지에는 찢어진 천 조각이 덧대어져 있었지만, 그 아래에서 새어 나오는 끈적한 피는 이미 말라붙어 검붉게 변색되어 있었다. 며칠 전의 기억이 파편처럼 머릿속을 맴돌았다.
* * *
“도현아! 이쪽이야! 빨리!”
이지훈의 목소리는 언제나 희망처럼 들렸었다. 아니, 적어도 도현에게는 그랬다. 온 세상이 지옥으로 변한 이후, 지훈은 도현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생존의 이유였다. 놈이 먼저 발견한 슈퍼마켓의 뒷문으로 뛰어들 때까지도, 도현은 지훈의 등만 굳게 믿고 따랐다.
“젠장, 놈들이 너무 많잖아!”
지훈의 얼굴이 희미한 전등 불빛 아래서 일그러졌다. 창고 안은 이미 좀비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한 마리가 지척까지 다가왔고, 도현은 반사적으로 쇠파이프를 휘둘러 놈의 머리를 박살냈다. 끈적한 체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지훈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뒤로 물러섰다.
“이대로는 안 돼… 도현아, 어서!”
지훈은 비좁은 선반 사이를 헤치며 다른 출구를 찾았다. 도현은 지훈의 뒤를 엄호하며 덮쳐오는 좀비들을 막아냈다. 그때였다. 지훈이 발견한 작은 창문으로 먼저 몸을 던지려던 순간,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하는 것을 도현은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나던 그 차가운 시선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처음 보는 낯선 이처럼 낯설었다.
“미안하다, 도현아.”
지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친 손길이 도현의 등 뒤를 밀쳤다. 선반에 박혀있던 뾰족한 철근이 허벅지를 깊숙이 꿰뚫고 지나가는 통증보다, 등 뒤에서 느껴지던 친구의 차가운 손바닥이 더 끔찍했다. 비명조차 지를 새 없이, 도현은 쏟아져 들어오는 좀비들 한가운데로 고꾸라졌다. 지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은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그의 손에는, 둘이서 힘들게 모았던 배낭이 들려 있었다.
* * *
피로 물든 기억은 생생했지만, 몸은 이제 더 이상 그 통증에 익숙해져 있었다. 허벅지의 상처는 곪아가고 있었다. 다행히 좀비에게 물린 상처는 아니었지만, 이 상태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도현은 벽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골랐다. 굶주림과 갈증은 이미 일상이 된 지 오래였다.
“크르르륵…”
멀지 않은 곳에서 끈적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도현은 움찔하며 주머니에서 녹슨 칼을 꺼내 들었다. 칼날은 이미 무뎌진 지 오래였지만, 없느니보다는 나았다. 놈은 천천히,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썩어가는 살점과 피 냄새가 역겨웠다. 도현은 놈의 텅 빈 눈을 노려보았다. 분노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랐다.
지훈.
그 이름이 뇌리에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 지옥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했던 존재의 등 돌림. 놈에게 버려진 순간의 절망이 다시금 도현의 심장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절망은 없었다. 그의 안에 남은 것은 오직 활활 타오르는 복수심뿐이었다.
놈이 손을 뻗는 순간, 도현은 온몸의 무게를 실어 돌진했다. 허벅지의 고통 따위는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칼날은 놈의 턱 밑을 파고들었고, 그대로 위로 쳐올리자 놈의 머리가 뒤로 꺾이며 비명을 질렀다. 놈은 잠시 휘청거리다 결국 바닥으로 쓰러졌다. 도현은 놈의 머리를 다시 한번 짓밟아 확인사살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떠한 표정도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는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목적이 생겼다. 지훈을 찾아야 했다. 놈의 눈을 똑바로 보고, 왜 그랬는지 물어야 했다. 그리고 그 죗값을 반드시 치르게 할 것이다. 그 과정이 아무리 끔찍하고 처절할지라도, 그는 기어코 지훈의 목숨을 끊어놓고야 말 것이다.
도현은 피 묻은 칼날을 대충 옷에 닦아 넣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찢어진 허벅지에서 다시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은 더 이상 공포에 떨지 않았다. 그의 눈에는 오직 차갑고 날카로운 섬광만이 번뜩였다. 세상이 온통 죽음으로 물들었지만, 그의 심장은 이제 복수라는 이름의 불꽃으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기다려, 이지훈.”
도현은 텅 빈 도시를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지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널 찾을 때까지는… 절대로 죽지 않을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