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눈을 감았다 뜨자, 어둠이 짙게 깔린 서울의 야경이 아득하게 펼쳐졌다. 수천 개의 불빛들이 저마다의 아우성을 쏟아내는 듯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 모든 빛이 한순간 눈앞에서 꺼져버린 듯, 내 세상은 암흑이었다.
나는 텅 비어버린 옥상 난간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아니다, 서 있었다기보다는 붙잡혀 있었다. 내 두 손목을 비틀어 잡고 있는 건, 세상에서 가장 믿었던 친구 이현수였다. 그의 얼굴에는 내가 평생 본 적 없는 잔인하고 오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김도윤. 이제 다 끝났어. 네가 쌓아 올린 이 모든 것, 전부 내 거야.”
이현수의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그 속엔 비수 같은 독이 숨어 있었다. 지난 십 년간 함께 꿈을 꾸고, 땀 흘리고, 절망과 환희를 공유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아무런 의심 없이 내어주었던 내 어리석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내 인생의 역작, 피와 살을 깎아 만든 ‘넥서스’ 프로젝트. 인류의 미래를 바꿀 혁신적인 기술이라며 밤낮없이 매달렸던 그 거대한 꿈이 이젠 그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그는 나를 기만하고, 속이고, 내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그리고 이제, 내 마지막 남은 목숨마저 탐하고 있었다.
“현수야… 우리는… 친구였잖아.”
피가 역류하는 고통에 숨이 막혔다. 허탈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친구? 그래, 나는 그렇게 믿었다. 바보같이.
이현수는 차갑게 비웃으며 내 손목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친구? 그래, 친구였지. 네가 가진 그 천재성 덕분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 하지만 이제 더는 필요 없어. 네 모든 아이디어는 내 것이 되었고, 네 회사는 이미 내 명의로 넘어왔어. 너 같은 방해꾼은 이제 사라져야지.”
그의 눈빛에서 섬뜩한 광기가 번뜩였다. 나는 그의 어깨를 밀치려 했지만, 이미 모든 기력이 소진된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며칠 밤낮 이어진 감금과 폭행, 그리고 마침내 드러난 배신의 진실이 내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젠장… 죽여… 차라리 죽여…!”
절규하듯 외치자, 이현수는 기분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해줄게. 깔끔하게, 자살로 위장해서. 네 주변 사람들은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중압감에 스스로 몸을 던진 줄 알겠지. 완벽해.”
차가운 강풍이 내 몸을 휘감았다. 도시의 소음은 저 아래에서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이현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그는 가차 없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섬뜩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리고, 힘껏.
쿵!
등 뒤로 거대한 충격이 느껴졌다. 내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눈앞의 야경이 빠른 속도로 멀어지고 뒤집혔다. 중력이 나를 무섭게 끌어당겼다. 바람 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 울렸다.
‘안 돼… 이렇게…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내 마지막 남은 이성이 처절하게 외쳤다. 이현수, 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복수해야 했다. 내 인생을 송두리째 파괴한 그에게, 똑같이 되갚아줘야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저 아래, 콘크리트 바닥이 마치 거대한 입을 벌린 괴물처럼 빠르게 다가왔다.
몸이 부서지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덮쳤다. 시야가 온통 하얗게 변했다.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찾아온, 절대적인 정적.
나는 죽었다.
***
“으윽…!”
몸이 저절로 튀어 오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이 쿵쾅거려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았다. 눈을 깜빡이자 익숙한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렇게 바랜 벽지, 천장에 덕지덕지 붙은 전선들, 그리고 한 귀퉁이에 걸린 낡은 셔츠.
꿈인가? 악몽?
아니, 너무나 생생했다. 이현수의 잔인한 미소, 등 뒤에서 느껴지던 충격, 몸이 허공을 가르던 차가운 바람, 그리고… 온몸을 찢는 듯한 고통. 그 모든 것이 방금 일어난 일처럼 선명했다.
“젠장…!”
나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몸은 멀쩡했다. 뼈 하나 부러진 곳 없이, 그 어떤 상처도 없었다. 마치 방금 숙면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하지만 내 영혼은 분명 옥상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절망을 경험했다.
방 안을 둘러봤다. 낡은 책상 위에는 내가 쓰던 오래된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옆에는 밤샘 작업의 흔적인지, 컵라면 용기가 뒹굴고 있었다. 창밖에서 아침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먼지 쌓인 방을 비추고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 풍경.
나는 손을 뻗어 책상 위의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을 켜자, 밝은 화면에 날짜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2022년 5월 12일 목요일]
내 손에서 스마트폰이 툭 떨어졌다.
2022년? 말도 안 돼. 내가 죽은 건, 아니, 죽임당한 건 2027년 11월이었다. 정확히 5년 6개월 전의 날짜가 액정에 찍혀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다시 날짜를 확인했다. 같은 날짜. 분명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은 낯설 만큼 젊었다. 깊게 패인 팔자주름도, 피로에 찌들어 축 늘어진 눈가도 없었다. 지금 내 모습은, 5년 전, 이현수와 함께 ‘넥서스’ 프로젝트 초기 단계에 매달리며 밤샘 작업을 일삼던, 열정으로 가득 찼던 바로 그때의 나였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내가 죽은 게 아니라… 과거로 돌아온 건가?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이현수에게 배신당해 모든 것을 잃고 옥상에서 떨어져 죽었던 순간이 생생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때보다 5년이나 젊어진 채, 이 낡고 익숙한 자취방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끔찍했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현수가 어떤 식으로 내 회사를 잠식해 들어왔는지, 어떻게 내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둔갑시켰는지, 어떤 식으로 나를 고립시키고 파멸로 몰아넣었는지. 그의 치밀하고 교활한 모든 수작들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그때는 몰랐던 것들.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그의 본성.
그때는 믿었던 그의 가면.
이 모든 것이 지금, 과거로 돌아온 내 머릿속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나는 거울 속의 나를 응시했다. 젊음은 돌아왔지만, 눈빛은 이미 깊은 수렁을 건너온 사람의 그것이었다. 그 안에 절망과 혼란 대신, 차갑고 날카로운 빛이 일렁였다.
“이현수….”
내 입에서 그의 이름이 나지막이 흘러나왔다. 목소리는 쉬어 있었지만, 그 안에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섬뜩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래. 꿈이 아니었다. 악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비록 나는 한 번 죽었고, 지옥을 경험했지만, 그 대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었다.
이현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 옆에서 천진난만한 친구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와 함께 ‘넥서스’의 성공을 꿈꾸며, 환하게 웃고 있을 것이다. 그는 아직 그가 행할 미래의 배신을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두 주먹을 꽉 쥐자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이번엔 다르다. 절대 당하지 않아.
네가 날 지옥으로 밀어 넣었지. 이현수.
그 지옥 밑바닥으로, 내가 널 직접 끌고 가주마.
네가 나에게서 빼앗았던 모든 것을 되찾는 것을 넘어,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버릴 것이다.
내 심장 속에서 차가운 복수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5년 6개월의 시간이 내게 준 것은 두 번째 삶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복수를 위한, 완벽한 계획을 짤 시간과 정보였다.
나는 다시 침대 옆에 떨어진 스마트폰을 주워 들었다. 화면 속의 날짜가 선명했다.
2022년 5월 12일.
이현수가 아직 내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못한, 나의 새로운 시작의 날이었다.
그리고 이현수, 너의 파멸이 시작될 날이기도 했다.
내 얼굴에, 거울 속 이현수와 똑같은, 아니, 그보다 더 차갑고 섬뜩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게임은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