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15화

기억의 편린, 다시 피어나는 눈꽃

창밖으로는 희미한 가로등 불빛 아래, 함박눈이 사그락사그락 쏟아지고 있었다. 지우는 따스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창가에 섰다. 카페는 이미 마감 시간이 훌쩍 지나 손님이라곤 아무도 없었고, 적막 속에 얼음처럼 차가운 겨울 공기만이 맴돌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시린 공기가 그녀의 심장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듯했다.

며칠 전, 그녀는 예상치 못한 소포 하나를 받았다. 발신인은 알 수 없었다. 단지 낡은 상자에 덧붙여진 무심한 우체국 스탬프만이 주소의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었다.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자, 오래된 나무 향이 희미하게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작은 나무 조각 하나가 고이 놓여 있었다. 한 마리의 새였다. 아주 작고 투박하지만, 섬세한 날개와 부리가 살아있는 듯한. 지우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나무 조각이 손끝에 닿자, 잊고 있던 기억의 파편들이 눈꽃처럼 흩날리며 마음속에 쌓여갔다.

그 겨울의 약속

그것은 현우가 만들어준 새였다.

“지우야, 이 새는 말이야,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길을 잃지 않고 날아갈 수 있대.”

아주 어린 시절이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덮였던 어느 겨울날. 아직 채 녹지 않은 눈밭 위에서 현우는 조그만 나뭇가지로 깎아 만든 새를 지우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의 손은 빨갛게 얼어 있었지만, 눈은 반짝였다.

“우리 약속할까? 이 새가 길을 잃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어떤 일이 있어도 서로의 길을 잃지 말자. 꼭 다시 만나서… 같이 나무 심고, 새집도 만들어서 이 새처럼 예쁜 새들이 많이 찾아오게 하자.”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뺨에 눈송이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때 현우의 얼굴은 얼마나 맑고 순수했는지.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손가락을 걸고 굳게 약속했다. 한겨울 눈꽃이 흩날리는 강가에서, 세상에 둘도 없는 약속을.

그 후로도 몇 년간, 그 나무 새는 지우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꿈 많던 시절의 희망이자, 언젠가 현우와 함께 이룰 미래에 대한 굳건한 증거였다. 하지만 시간은 잔인하게도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현우의 가족은 갑작스레 이사를 갔고, 그들의 연락은 서서히 끊겼다. 처음에는 애틋한 그리움으로 시작했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그 약속은 아련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변해갔다. 지우는 그 새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어딘가 기억의 서랍 속에 깊이 잠들어 버린 줄로만 알았다.

낯선 온기, 그리고 혼란

그러나 그 새가 다시 그녀에게 돌아왔다. 누가 보낸 것일까. 그리고 왜 지금일까. 지우는 복잡한 심경으로 새를 만지작거렸다. 나무의 온기가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현우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직도 그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 새는 현우가 보낸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저 누군가가 우연히 발견해 보낸 것일지도.

그때, 카페 문이 조용히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빼꼼히 들어섰다.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직장 동료인 민준이었다.

“지우야, 아직 안 갔어? 너무 늦었잖아.” 민준의 목소리는 걱정이 섞여 있었다.

지우는 얼른 새를 주머니에 넣고 애써 미소 지었다. “응,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이제 막 가려던 참이었어.”

민준은 그녀의 표정을 읽었는지 조용히 다가왔다. “무슨 일 있어? 며칠 전부터 좀 가라앉아 보여.”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겨울이라 그런가 봐.” 그녀는 거짓말을 했다. 이 복잡한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오래된 약속, 사라진 친구, 그리고 갑작스레 돌아온 과거의 조각.

“아, 맞다. 지우 너 혹시 현우 소식 들었어?” 민준이 무심코 던진 말에 지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현우? 누… 누구 현우?” 그녀는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그 현우 말이야. 우리 초등학교 동창. 너랑 엄청 친했잖아. 강현우. 최근에 보니까 여기저기서 이름이 좀 나오던데. 그쪽 업계에서 꽤 유명해진 것 같더라고. 이번에 새로 여는 북카페 디자인에 참여했다고 해서 나도 좀 놀랐어.”

지우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강현우. 그가, 그들이 살던 동네에 다시 돌아온 것이란 말인가. 그것도 바로 그녀의 카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북카페를 디자인했다고? 그녀는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아픔과 동시에 묘한 설렘을 느꼈다. 그가 보낸 것이었을까? 이 나무 새는… 그가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는 증거일까?

“북카페… 어디에?” 지우는 자신도 모르게 숨죽여 물었다.

“음… 저기, 새로 생긴 문화 복합 공간 ‘하얀 여울’인가? 거기 안쪽에 있다고 하던데.”

‘하얀 여울’. 그곳은 그들이 어릴 적, 겨울 눈꽃이 흩날리던 강가와 이름이 비슷했다. 현우와 그녀가 약속을 나눴던 그 강가. 우연일까, 아니면… 의도된 것일까.

다시 쌓이는 눈, 새로운 길

지우는 민준과 헤어져 밤거리를 걸었다. 발밑에는 새로 내린 눈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마치 수많은 기억들이 발자국처럼 쌓여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주머니 속의 작은 나무 새를 꽉 쥐었다. 그 온기가, 꽁꽁 얼어붙었던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녹이는 듯했다.

현우가 그녀를 찾아온 것일까? 아니면 그녀가 현우를 찾아야 하는 걸까?

하얀 여울. 그 북카페에 가면,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하지만 한순간도 잊은 적 없는 그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늘에서는 여전히 눈꽃이 춤추듯 내려앉았다. 지우는 새하얀 눈밭 위에 희미한 발자국을 남기며, 미지의 길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이미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 바람이 아닌, 따뜻한 봄을 예고하는 듯한 설렘의 바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