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젠장, 또 여기야.”

하준은 푸석한 흙먼지가 입안 가득 맴도는 감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찢어진 옷자락이 마른 피부를 스쳤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어제와 다름없는 황량한 풍경이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뼈대만 남은 빌딩들이 마치 거대한 비석처럼 꽂혀 있었다. 먼지바람이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유일한 배경음악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찬 낡은 장치를 만졌다. 손바닥만 한 철제 큐브. 어설프게 덕지덕지 붙은 전선들과 금이 간 액정. 하준을 이 지옥 같은 미래로 떨궈 놓은 원흉이자, 동시에 유일한 희망이었다. ‘시간 이동 장치’라고 불리던 이 물건은 그를 200년 후의 세상으로 던져 놓았다. 문명은 사라지고, 인류는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벌써 세 번째 기상인가.” 하준은 중얼거렸다. 처음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지만, 이제는 절망조차 사치였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게 이 미친 시간 여행의 유일한 규칙이었다.

목마름이 턱을 긁었다. 어제 겨우 찾아낸 녹슨 수도관은 더 이상 물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제 이동해야 했다. 그는 배낭을 고쳐 맸다. 내용물은 단출했다. 작은 삽, 식칼, 낡은 천 조각, 그리고 간신히 모은 말린 풀뿌리 몇 개.

하준은 폐허가 된 도시를 가로질렀다. 거리는 온통 무너진 잔해와 깨진 콘크리트 조각들로 뒤덮여 있었다. 가끔 녹슨 자동차의 앙상한 차체만이 과거의 영광을 암시할 뿐이었다. 햇빛은 뜨거웠지만, 공기는 이상하게도 싸늘했다. 아마도 산소 농도가 희박해진 탓이리라.

“어디, 괜찮은 곳 없나.”

그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했다. 물. 식량. 그리고 밤을 보낼 안전한 장소. 이 세 가지가 그의 생존 공식이었다. 그의 시선이 멀리 떨어진 거대한 돔형 건물에 닿았다. 과거의 기술 박람회장이었을까.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지만, 철골 구조는 비교적 온전해 보였다. 저곳이라면… 물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쓸모없는 장치가 반응할 만한 어떤 에너지를.

걷는 동안 그는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였다. 이 폐허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님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간혹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혹은 금속이 부딪히는 불쾌한 소리가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돔 건물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잔해들은 더욱 기괴한 형태로 변해 있었다. 열에 녹아내린 듯한 금속 기둥, 알 수 없는 물질로 뒤덮인 벽들. 어쩌면 이 도시를 파괴한 것이 자연재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섬뜩한 생각이 스쳤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는 입구는 거대한 틈새처럼 벌어져 있었다.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곰팡이 냄새와 함께 희미한 기계 냄새가 났다.

하준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신발 밑에서 밟히는 파편들이 으스러지는 소리를 냈다. 시야는 점차 익숙한 어둠에 적응해갔다. 드넓은 홀 안에는 부서진 전시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깨진 홀로그램 장치, 반쯤 타버린 로봇의 잔해.

그때였다.

“크르르르…”

낮게 깔린 울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하준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배낭에서 식칼을 꺼내 들었다. 녹슬었지만 날카로웠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크고, 불길하게 빛나는 눈. 그것은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짐승이었다. 몸은 마치 강철 조각을 덕지덕지 이어 붙인 듯했고, 등에는 뾰족한 가시들이 돋아 있었다. 녀석의 입에서 검붉은 침이 뚝뚝 떨어졌다. 변이된 짐승이었다. 이 폐허의 진정한 지배자들 중 하나.

“젠장…” 하준은 숨을 멈췄다. 녀석은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민첩하게 움직였다.
짐승이 공격 자세를 취하는 순간, 하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던졌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콘크리트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하준은 식칼을 꽉 쥐었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이 거대한 홀은 사방이 막혀 있었다. 녀석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그의 눈이 재빨리 주변을 스캔했다. 부서진 구조물들, 쓰러진 기둥들… 그때,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홀 한가운데, 아직 쓰러지지 않은 거대한 제어판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위에는 섬광처럼 깜빡이는 불빛이 있었다. 전력? 아직 살아있는 시스템?

“크아아악!” 짐승이 다시 한번 덤벼들었다. 이번엔 더욱 격렬하게.

하준은 이를 악물었다. ‘저곳이야. 저곳으로 가야 해.’
그는 식칼을 휘둘러 녀석의 주의를 끌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짐승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하준은 온 힘을 다해 제어판을 향해 달렸다.

육중한 몸이 그의 뒤를 쫓았다. 발소리가 홀을 뒤흔들었다. 거의 다 왔다. 제어판까지 불과 몇 걸음.
그때, 짐승이 전력을 다해 점프했다. 하준의 등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왔다.
하준은 마지막 순간, 몸을 날려 제어판 옆으로 구르면서 동시에 손에 든 칼을 휘둘렀다.

‘제발!’

칼날이 짐승의 옆구리를 스쳤다. 강철 같은 피부에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녀석의 균형을 잠시 흐트러뜨리는 데는 성공했다. 짐승은 으르렁거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제어판에 기대섰다. 손바닥으로 버튼이 박힌 표면을 더듬었다. 여러 개의 버튼 중, 유독 하나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비상 전력? 통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이거… 작동하는 건가?” 그는 떨리는 손으로 빛나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홀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붉은 경고등이 번뜩였다. 동시에, 제어판 주변의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녀석은 경고음에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

“뭐… 뭐야!”

갈라진 바닥 틈새로 뜨거운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강렬한 전자기 충격파가 온몸을 강타했다. 하준의 옆구리에 찬 시간 이동 장치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액정의 금이 더 깊어졌다.

짐승이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충격파가 녀석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하준은 강렬한 충격파 속에서 겨우 몸을 지탱했다. 그의 시간 이동 장치는 이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기분.

“안 돼! 아직은…!” 그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아직 이 지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빛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폐허가 된 홀, 발악하는 짐승의 모습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리고 온몸을 휘감는 압도적인 시공간의 뒤틀림 속에서, 하준은 의식을 잃었다.

***

“으윽…”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몸이 부딪히는 충격에 하준은 신음하며 눈을 떴다.
폐허가 된 돔 건물. 어둠 속에서 짐승의 붉은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르르르…”

귀에 익숙한 울음소리.

‘설마… 다시?’
하준은 옆구리의 장치를 확인했다. 금이 더 깊어진 액정. 하지만 여전히 깜빡이는 작은 불빛.
시간이동 장치는 그를 또 다른 시간으로 데려다 놓은 것이 아니라, 고작 수 분 전의 과거로 되돌려 놓았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전일 수도. 짐승의 자세는 그가 버튼을 누르기 직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젠장, 미쳤군.”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것은 반복이었다. 생존을 위한 발버둥,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장치의 오작동.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짐승의 붉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번엔 버튼을 누르는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 이 정도 반복은 익숙해.”
하준은 식칼을 고쳐 쥐었다. 입가에 비장한 미소가 번졌다.

“이번엔, 네가 아니라 내가 먼저 움직인다.”

그의 눈빛이 살아났다. 폐허 속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전투의 시작이었다. 매 순간이 생존이었고, 매 순간이 새로운 도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