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3: 잿빛 달의 속삭임**
차디찬 강철 복도를 따라 발소리가 울렸다. 정지장 보행기가 아니었다면 벌써 경보가 울렸을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복도의 주인인 제국조차도 우리를 눈치채지 못하리라. 세린은 어둠 속에 잠긴 홀로그램 시계를 응시했다. ’00:03:17′. 주어진 시간은 이제 3분 남짓.
“카인, 동선은?” 세린의 목소리는 산소마스크 안에서도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그녀의 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제국군이 미처 관리하지 못한 통신망의 미세한 파동까지 놓치지 않았다.
“예정대로 갑니다. A-7 섹터는 잠시 정전 상태. 제국 놈들이 식사 시간이라고 대충 관리하는 틈을 탔습니다.” 카인의 목소리는 마스크 너머로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 그는 세린의 뒤를 바싹 따라붙으며 손목의 위상 측정기로 끊임없이 주변 환경을 스캔했다. 녹색 점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가 사라졌다. “보안벽은 이미 우회했고, 다음 코너만 돌면 됩니다.”
그들이 침투한 곳은 ‘잿빛 달’이라 불리는 버려진 광산 행성에 세워진 제국의 거대한 보급창이었다. 제국은 이 변방의 달에서 나오는 희귀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원주민 행성을 황폐화시켰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자 이곳을 거대한 쓰레기통이자 보급 거점으로 전락시켰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곳이라 보안이 허술하다고? 천만에. 제국의 오만함은 그 어떤 요새보다 견고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오만함의 틈을 노렸다.
두 사람은 마지막 코너를 돌았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원통형 통로였다. 천장까지 닿는 수많은 데이터 서버들이 웅장하게 서 있었고, 그 사이를 수십 개의 광섬유 케이블이 마치 신경망처럼 얽혀 있었다. 목적은 저 가장 안쪽에 있는 중앙 데이터 코어.
“젠장, 저긴 정전이 아니잖아!” 카인이 낮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위상 측정기에 갑자기 붉은 점들이 번개처럼 깜빡였다. “감지 필드가 활성화됐습니다! 제기랄, 누군가 수동으로 복구시켰나 봐요!”
세린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제국군은 전력을 아낀답시고 이런 변방 기지에서는 동력 흐름이 불규칙했다. 하지만 감지 필드가 재활성화되었다면, 상황은 최악이었다. 정지장 보행기는 은신에는 탁월했지만, 감지 필드를 통과하는 순간 그들의 미약한 에너지는 마치 불꽃처럼 폭발하며 위치를 노출시킬 터였다.
“시간 없어.” 세린은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서 작은 EMP 수류탄을 꺼냈다. 제국군의 표준 장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조악한 수제 폭탄이었다. 껍데기는 폐기된 드론의 부품, 내부는 재활용된 배터리와 불법 개조된 코일. 하지만 이 작은 폭탄 하나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세린! 저걸로 저걸 다 날릴 생각입니까? 코어까지?” 카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딱 3초만.” 그녀는 EMP 수류탄의 조작부를 빠르게 만졌다. “저 가장 바깥쪽 데이터 서버를 봐. 낡아서 연결선이 불안정해. 거기만 노린다.”
그녀는 수류탄을 들어 올렸다. 조준경조차 없는 허술한 장비였지만, 세린의 시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마치 수십 년을 기다린 사냥꾼처럼, 그녀의 몸은 완벽하게 정지했다. 그리고, 던졌다.
쉬이이익-
수류탄은 공기를 가르며 정확히 목표물, 즉 가장자리에 위치한 낡은 데이터 서버의 하단부 연결 케이블에 명중했다.
**쿠우웅!**
강력한 전자기 충격파가 복도를 뒤흔들었다. EMP의 충격은 주변의 모든 전자기기를 잠시 마비시켰다. 낡은 서버는 비명을 지르며 전원부가 폭발했고, 연결되어 있던 감지 필드도 일순간 꺼졌다. 하지만 제국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불과 1초 만에 비상 전원이 가동되며 서버의 보조 전원과 감지 필드가 다시 불안정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2초 남았습니다!” 카인이 외쳤다.
세린은 EMP 수류탄이 터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전력 질주했다. 그녀의 몸놀림은 유성처럼 빨랐다. 감지 필드가 다시 완전히 켜지기 직전, 그녀는 간발의 차이로 감지 필드 영역을 통과했다. 이제 그들의 위치는 안전했다. 적어도 지금은.
“미쳤군요, 당신!” 카인은 세린을 따라 감지 필드를 통과하며 숨을 헐떡였다. “저라면 평생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어.” 세린은 이미 중앙 데이터 코어 앞으로 다가서 있었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특수 제작된 데이터 스크램블러를 꺼냈다. 작은 USB 형태의 장치였다. “이거 꽂고, 카인, 네가 접속해. 놈들의 통신망을 통해 제국 함대의 보급선을 추적해야 해. 잿빛 달에서 출항하는 모든 화물선의 목적지, 운송 품목,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빈틈.”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가리킨 포트에 스크램블러를 삽입했다. 그의 손가락이 홀로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초고속으로 암호가 해독되고, 제국의 보안 시스템이 허무하게 무력화되었다. 카인은 반란군 최고의 해커였다. 어렸을 때부터 제국의 감시망을 피해 뒷골목에서 코드를 만지작거리던 재능은, 이제 은하계에서 가장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칼날이 되었다.
“제국 함대 ‘정의의 심판’ 호의 보급선 경로가 잡혔습니다! 행성 ‘오리온’으로 가는 중입니다. 화물은… 젠장, 식량 보급선이 아닙니다. 희귀 광물과… 병기 부품? 오리온은 제국군 주둔지가 아닌데…” 카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거, 뭔가 이상합니다.”
“뭔데?” 세린은 주위를 경계하며 물었다.
“오리온 성계는 과거 반란군 요새가 있었던 곳입니다. 제국은 몇 년 전에 그곳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발표했죠. 그런데 병기 부품을 그곳으로 보낸다니…” 카인의 눈이 번뜩였다. “놈들이 뭔가 꾸미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물 데이터… 이 광물은 ‘그림자 수정’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제국군의 신형 무기에 쓰인다는 소문이 돌았던… ‘성간 분쇄포’ 말입니다!”
성간 분쇄포. 단어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제국이 그토록 감추려 했던 학살 병기. 그들이 이 변방의 보급창에서 신형 무기 부품을 은밀히 운송하고 있었다니.
“젠장.” 세린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놈들은 단순한 반란의 씨앗을 뽑으려는 게 아니었어. 아예 뿌리째 뽑아버리려 하는군.”
“데이터 다 받았습니다! 빠져나가야 합니다, 세린!”
갑자기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제국군의 순찰대였다. 그들의 통신망에서 미세한 잡음이 들려왔다. EMP 폭발로 인한 일시적인 혼란이 수습된 모양이었다.
“왔군.” 세린은 스크램블러를 뽑아 카인에게 건네받으며 몸을 돌렸다. “카인, 후방은 네게 맡긴다. 난 코어를 정리한다.”
“알겠습니다!” 카인은 재빨리 은폐장치를 활성화하며 뒷걸음질 쳤다.
세린은 중앙 데이터 코어에 설치된 자폭 장치를 활성화했다. “놈들에게 줄 선물이 너무 많아.”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린 그녀는, 돌아서서 카인이 도망친 통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쾅! 쾅! 쾅!
제국군 순찰대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들의 전술 슈트가 내는 중후한 기계음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이쪽이다! 누군가 침입했다! 감지 필드 이상!”
세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다. 그녀의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암흑의 우주가, 그리고 그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하나의 별, ‘희망’이 있었다. 잿빛 달은 불타오를 것이고, 그 불길은 제국의 심장에 닿을 것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 평민들의 반란은 이제, 진짜 막을 올리는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