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6화

차가운 공기조차 얼어붙을 듯한 겨울밤, 수아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무릎에 얹고 앉아 있었다. 밖에서는 매서운 바람이 창문을 두드렸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일기장 속 글자 하나하나가 뿜어내는 따스함, 혹은 아픔으로 가득 찼다. 지난밤, 할머니의 젊은 시절 사랑 이야기와 헤어짐의 비극에 잠 못 이루던 수아는 오늘 밤 다시 그 페이지를 펼쳤다. 할머니, 순영의 삶은 수아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바다였다.

수아의 손끝이 조심스럽게 다음 장을 넘겼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는 세월의 흔적과 함께 할머니의 흐릿한 글씨체가 박혀 있었다. 오늘 읽을 페이지는 다른 어떤 페이지보다 더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듯했다.

1953년 겨울, 어느 눈 오는 날

눈발이 흩날리는 창밖을 보며, 순영은 낡은 이불을 어린아이의 몸에 한 겹 더 덮어주었다. 아궁이에서는 어제 주워온 솔가지 몇 개가 간신히 불씨를 지키고 있었지만, 냉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안을 가득 채웠다. 아이의 작은 손발은 여전히 차가웠고, 젖은 기침 소리가 얇은 벽을 뚫고 뼈아프게 울렸다.

‘지훈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이름이 목울대에서 맴돌았다. 폭격이 휩쓸고 간 참혹한 그날 이후, 지훈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소식을 묻기 위해 발이 닳도록 돌아다녔지만, 들려오는 것은 전쟁의 잔혹함뿐이었다. 그리고 그 잔혹함 속에서, 순영은 홀로 이 아이를 품에 안고 살아남아야 했다. 사랑하는 지훈의 유일한 흔적, 그녀의 모든 것.

“엄마…”

작은 아이가 눈을 비비며 순영을 올려다봤다. 굶주림에 지쳐 창백해진 얼굴, 깊어진 눈 밑 그림자. 그 모습에 순영의 심장이 저미는 듯 아팠다. 어제 얻어온 쌀뜨물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남은 것이라곤 마른 나뭇가지 몇 개와 한 줌도 채 안 되는 보리쌀뿐이었다. 바깥은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인가는 멀리 떨어져 있어 도움을 청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순영은 흐릿한 불빛 아래 앉아 낡은 옷 조각들을 그러모았다. 헤지고 찢어진 천들을 바늘로 꿰매어 아이에게 입힐 옷을 만들었다. 그녀의 손은 얼어붙을 듯 차가웠지만, 바늘을 쥐고 있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한 땀 한 땀 박을 때마다 지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지금쯤 따뜻한 아궁이 앞에서 웃으며 앉아 있었을까.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있었을까.

그때, 문밖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순영은 깜짝 놀라 바늘을 내려놓았다. 이런 외진 곳까지 찾아올 이가 누가 있겠는가. 혹시… 혹시 지훈일까? 헛된 희망이 일렁였지만,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헛된 꿈을 꿀 때가 아니었다.

“계시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렸다. 순영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눈으로 뒤덮인 나뭇짐을 잔뜩 짊어진 노인이 서 있었다.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고, 눈빛은 피로에 지쳐 있었지만, 어딘가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런 밤에 웬일이세요?” 순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길을 잃어 잠시 쉬어갈 곳을 찾고 있었소. 혹시… 하룻밤만 신세를 져도 되겠소?” 노인은 미안한 듯 몸을 숙였다.

순영은 망설였다. 낯선 사람을 들이는 것이 불안했지만, 매서운 눈보라 속에 노인을 홀로 둘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선량함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는 작은 아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보잘것없지만, 불이라도 쬐실 수 있을 겁니다.”

노인은 고마움에 연신 허리를 숙이며 들어섰다. 그는 낡은 보따리를 풀더니, 생각지도 못한 것을 꺼냈다. 갓 구운 듯 따뜻한 찐빵 몇 개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였다. 순영은 눈을 크게 떴다. 이런 귀한 음식을, 그것도 이 시간에 보다니.

“길을 가다 얻은 것이오. 허기가 질 텐데, 아이와 함께 드시오.”

순영은 눈물이 핑 돌았다. 아이를 품에 안고 찐빵을 건네자, 아이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게걸스럽게 찐빵을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순영은 목이 메어왔다.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아이의 밝은 얼굴이었다.

노인은 작은 화로 옆에 앉아 조용히 순영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남편을 잃고 홀로 아이를 키우는 젊은 여인의 사연에, 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침묵 속에서 순영은 작은 위로를 얻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아픔을 헤아려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얼어붙은 세상 속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밤이 깊어갈수록,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노인은 다음 날 아침 일찍 떠났다. 떠나기 전, 그는 순영의 손에 작은 주머니를 쥐여주었다. 열어보니 낡은 은반지가 들어있었다. “이것이라도… 부디 아이와 함께 살아남으시오.”

순영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낯선 이의 따뜻한 마음이 너무나 버거우면서도, 너무나 고마웠다. 그녀는 노인의 뒷모습이 눈보라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서 있었다. 작은 은반지가 손안에서 차갑게 빛났다. 이 차가운 세상에도, 이토록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이 아이를 위해, 지훈을 위해, 순영은 살아남아야 했다. 어떤 고통이 와도, 어떤 절망이 덮쳐도, 이 작은 생명과 지훈의 흔적을 지켜내야 했다.

일기장 속 글씨가 흐릿해지면서, 글을 쓰던 할머니의 눈에서 흘러내렸을 눈물이 종이 위에 번진 자국들이 수아의 눈에도 아련하게 들어왔다. 수아는 손등으로 자신의 뺨을 흐르는 눈물을 훔쳤다. 할머니의 삶이 이토록 처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했을 줄이야. 한 번도 할머니에게서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다.

수아는 할머니의 낡은 사진첩을 꺼냈다. 거기에는 어린 시절의 엄마가 순영 할머니의 품에 안겨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그 뒤에는 앳된 얼굴의 순영 할머니가 서 있었다. 사진 속 할머니의 얼굴은 고단함 속에서도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마도 그 미소 속에는 일기장에서 읽었던 낯선 노인의 따뜻한 찐빵과 은반지, 그리고 지훈 할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함께 담겨 있었을 것이다.

수아는 일기장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이 아이를 위해, 지훈을 위해, 순영은 살아남아야 했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할머니의 강인함, 그 무모하리만치 뜨거운 생명력의 원천이 무엇이었는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그 모든 고통을 혼자 감내하며, 그저 ‘살아남는 것’ 자체가 그녀의 가장 큰 투쟁이자 사랑의 증명이었던 것이다.

문득, 수아의 시선이 일기장 사이 끼워져 있던 작은 종이 조각에 닿았다. 빛바랜 종이 위에는 희미한 글씨로 몇 개의 지명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할머니의 일기에서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낯선 이름들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알아볼 수 없는 필체로 적힌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김씨 할배’. 일기 속에서 찐빵과 은반지를 건네주었던 그 노인의 이름일까? 수아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렸다. 할머니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