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눔 마법학원, 그 이름만으로도 세상 모든 마법사들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곳. 빛바랜 고서에서나 나올 법한 고풍스러운 첨탑들이 하늘을 찌르고, 고대의 마력이 응축된 수정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영롱하게 빛났다. 하지만 류한의 눈에는, 이 모든 위용 뒤에 숨겨진 낡고 부패한 이면이 언제나 먼저 들어왔다. 전생에서 그는 단 한 번도 ‘마법’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내본 적 없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그랬던 그가 이세계에 환생하여, 그것도 명문 중의 명문이라는 아르카눔에 발을 들이게 될 줄이야.
“류한, 자네는 이번 마법사 개론 시험에서 또 만점을 받았더군. 대단해.”
노교수의 칭찬에도 류한은 그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학원 내에서 가장 난해하다고 평가받는 이론 마법 과목들마저 그에게는 전생의 수학 문제처럼 쉽게 풀렸다. 이 세계의 마법 체계는 겉보기에 화려했지만, 근본적인 원리를 파고들면 의외로 허술한 부분이 많았다. 마치 수천 년 동안 덧대고 쌓아 올린 누더기 마법처럼.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니 부러워할 필요는 없네. 다만 꾸준함이 중요한 법이지.”
건너편에 앉은 금발의 아가씨가 앙칼진 눈으로 류한을 노려봤다. 귀족 가문의 영애답게 늘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다니는 ‘세라핌’이었다. 그녀는 류한이 딱히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늘 최고 성적을 거두는 것을 못마땅해했다. 뭐, 그런 시선쯤이야 한두 번도 아니었다.
수업이 끝나고 학생들이 우르르 강의실을 나섰다. 류한은 복도 창가에 기대어 석양에 물들어가는 학원 전경을 내려다봤다.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그의 시선은 늘 가장 오래되고 음침해 보이는 ‘고대 문헌관’의 지하를 향했다. 오래전부터 학생들 사이에선 그런 소문이 돌았다. 고대 문헌관 지하에는 학원의 설립자조차 언급을 꺼리는 끔찍한 금기가 잠들어 있다고.
“류한, 오늘은 도서관으로 갈 거야?”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류한은 고개를 돌렸다. 갈색 머리에 주근깨가 귀여운 동급생, ‘리안’이었다. 그는 학원에서 몇 안 되는 류한의 친구 중 하나였다. 호기심 많고 겁 많지만, 순수하고 착한 심성을 가진 녀석이었다.
“아니, 오늘은 좀 다른 곳에 가볼까 해.” 류한은 시선을 고대 문헌관으로 돌렸다.
리안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설마… 고대 문헌관 지하 말이야? 거긴 절대 가지 말라고 학원 규정에도 명시되어 있잖아! 게다가… 얼마 전에도 3학년 엘리어스 선배가 거기 들어갔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고.”
엘리어스. 류한도 그 이름을 들은 적 있었다. 호기심 많고 실력도 뛰어났던 선배. 공식적으로는 ‘개인 사정으로 인한 자퇴’라고 발표되었지만, 학생들 사이에서는 ‘금기를 건드린 대가’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저 몇 가지 자료를 찾아볼 뿐이야. 너무 걱정 마.” 류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자료는 핑계였다. 엘리어스의 실종은 단순한 사고가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그를 자극했다. 이 학원, 너무나 완벽해 보이는 이 고고한 마법학원에는 분명 뭔가 감춰진 어둠이 있었다.
그날 밤, 류한은 인적이 끊긴 고대 문헌관으로 향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그를 감쌌다. 삐걱거리는 마루를 밟고 문헌관의 가장 깊숙한 곳, 일반인 출입 금지 마법진이 쳐진 ‘제한 구역’에 도착했다. 수십 년 전부터 아무도 손대지 않은 듯 먼지가 수북이 쌓인 낡은 책장들, 그 너머에 육중한 철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그 ‘금지된 서고’라는 건가.”
류한은 철문에 손을 댔다. 차갑고 거친 질감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문에는 복잡한 고대 마법진이 새겨져 있었는데, 일반적인 해제 마법으로는 꿈도 꾸지 못할 수준이었다. 하지만 류한은 전생의 ‘기술’과 이세계의 ‘마법’을 융합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었다.
마력을 손끝에 모아 마법진의 흐름을 읽기 시작했다. 마치 복잡한 암호 시스템을 해독하듯, 그는 마법진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몇 분간의 집중 끝에, 마법진의 일부가 일렁이더니 ‘끼이이익’ 하는 굉음과 함께 철문이 서서히 열렸다. 안에서는 차가운 기운이 훅 끼쳐 나왔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가 내쉬는 숨결처럼.
열린 문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그곳은 서고가 아니었다. 좁고 어두운 계단이 한없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 양옆으로는 흐릿하게 빛나는 마력등이 드문드문 박혀 있었지만, 그 빛은 주위의 어둠을 걷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마치 심해의 바닥으로 내려가는 길 같았다.
류한은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지고 습해졌다. 동시에,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한 기운이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비명과 절규, 혹은 억눌린 고통이 응축된 듯한 기운. 전생의 그가 절대 경험해보지 못했던 종류의 소름 끼치는 감각이었다.
수십 미터를 내려갔을까, 계단은 널찍한 통로로 이어졌다. 통로의 벽면은 검은 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곳곳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과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마력이 깃든 손전등을 켜자, 섬뜩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통로 양옆에는 굳게 닫힌 철창들이 규칙적으로 늘어서 있었다. 마치 거대한 감옥의 복도 같았다.
류한은 가장 가까운 철창에 다가섰다. 철창 너머는 어둠에 잠겨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가 힘겹게 ‘숨 쉬는’ 소리, 혹은 ‘흐느끼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류한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울렸다.
“여기에… 뭐가 있는 거지?”
류한은 조심스럽게 철창을 붙잡았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 그 순간, 철창 너머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기척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드러나는 거대한 그림자. 그것은 인간의 형상과는 달랐다. 거대하고 뒤틀린, 마치 수많은 촉수나 사지가 뒤엉킨 듯한 끔찍한 형태였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수백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번뜩이며 류한을 응시했다.
*쉬이이익…*
정체불명의 기이한 울음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그것은 목구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류한의 전신을 마비시키는 듯한 극심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전생과 이생을 통틀어, 류한은 이토록 존재 자체를 뒤흔드는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었다. 아르카눔 마법학원 지하에 숨겨진 금기는,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한 존재였다. 그 순간, 류한은 등 뒤에서 차가운 한기가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었다. 이곳은, 수많은 비명과 고통이 뒤섞인 생지옥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