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돌 바닥에 깔린 습기가 신발 밑창을 끈적하게 달라붙게 했다. 발걸음 소리조차 먹어버리는 듯한 지하 미궁의 침묵 속에서, 이준은 마법으로 밝힌 구슬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루미나 학원 지하의 금지된 구역. 이곳에 발을 들인 지 벌써 며칠째인지 정확히 셀 수도 없었다. 시간 감각마저 마비시키는 어둠과 칙칙한 공기였다.
“젠장, 김하나. 네 놈의 고서적에 쓰여 있다는 ‘위대한 지식의 원천’이라는 게 설마 이런 썩어 문드러진 지하실을 의미했던 건 아니겠지?”
박진우가 거친 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거대한 전투 도끼를 든 그의 어깨는 좁은 통로에 닿을 듯 말 듯 위태로웠다. 진우의 눈은 경계심으로 번뜩였지만, 그 안에는 피로와 신경질이 섞여 있었다.
“조용히 해, 박진우. ‘엘도니아의 비문’은 이곳에 대단히 중요한 무언가가 봉인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단순한 지하실이 아니야.”
김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양피지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마법 구슬의 희미한 빛이 양피지에 그려진 기괴한 문양들을 비췄다. 하나는 학년 수석다운 지적인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그녀의 내면을 보여주었다.
이준은 묵묵히 주변을 살폈다. 통로는 돌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일반적인 건축물과는 다른,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뒤틀리고 일그러진 형태를 하고 있었다. 벽면에는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섬뜩할 정도로 생생한 형상들이었다. 흡사 고통받는 존재들의 절규가 굳어버린 듯한.
“확실히… 이곳은 마력이 다르다.” 이준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공기 중에 떠도는 마나의 흐름이 마치 오염된 물처럼 탁하고 무거웠다. 루미나 학원의 맑고 투명한 마력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오염되었다기보다는… 변질된 것에 가깝네요.” 하나가 양피지에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강제로 변형된 마력. 이 구조물 자체도… 마력의 흐름을 왜곡시키고 있어요.”
그때였다.
콰아앙!
멀리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거대한 쇠붙이가 바닥에 내리쳐지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이준의 심장을 조여왔다.
“뭐지?” 진우가 도끼를 고쳐 잡으며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괴물은 아니야. 소리의 울림이… 어딘가 인위적이야.” 이준이 촉각 마법을 발동시켜 미세한 진동을 감지했다. “마법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아니면, 갇혀 있는 무언가가 발버둥 치는 소리일지도. 불현듯 그런 섬뜩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쪽이야.” 하나가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비문에 따르면, 가장 깊은 곳은 ‘기만자의 심장’이라고 불린대요. 그리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속죄의 회랑’을 통과하는 것뿐이라고.”
그들이 당도한 곳은 넓은 원형의 공간이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원통형 기둥이 솟아 있었는데, 기둥의 표면에는 복잡한 마법진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마법진들은 희미한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은 주기적으로 깜빡이며 공간 전체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속죄의 회랑… 이건 회랑이 아니라 제단 같은데?” 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준은 기둥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표면은 차갑고 매끄러웠다. 마력의 파동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이 파동은… 마치 무언가를 억압하고 가두는 것 같았다.
“진우 말이 맞아. 이건 단순한 통로가 아니야.” 이준이 말했다. “이 기둥 자체가 봉인인 것 같아. 뭔가를 가두고 있어.”
“봉인…?” 하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엘도니아의 비문에는…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단지 ‘최고의 지식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고만…”
그때, 이준의 발밑에서 얇은 금속판이 느껴졌다. 흙먼지를 털어내자, 오래된 청동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동판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학원 창립 당시의 언어야.” 하나가 헐레벌떡 다가왔다. 그녀는 양피지와 청동판의 문양을 대조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최고의 지식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금기의…”
하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끝내 완전히 멎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두루마리를 든 손이 덜덜 떨렸다.
“뭐가 있는데, 김하나?” 진우가 다그치듯 물었다.
하나는 청동판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마치 불에 데인 듯이 떨리고 있었다.
“이 비문은… ‘환생의 요람’에 대한 기록이에요.” 하나의 목소리가 공포로 잠식되어 있었다. “엘리트 마법사를 만들기 위한… 인간의 몸과 영혼을 재구성하는… 끔찍한 실험의 기록이야… 이 아래… 이 기둥 아래… 수많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준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기둥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기둥의 뿌리 부분은 바닥 속으로 깊이 박혀 있었는데, 그 틈새에서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붉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이 뛰는 듯한, 불규칙적인 리듬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준의 코끝을 스치는 냄새가 있었다. 쇠 비린내와 함께 역겨운 달콤한 향. 마치 시든 꽃과 썩어가는 고기를 뒤섞어 놓은 듯한 끔찍한 악취였다.
그 순간, 기둥의 마법진들이 일제히 섬광을 터뜨리며 빛났다. 보랏빛 섬광은 공간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번뜩였다.
콰아아아앙!
아까보다 훨씬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바닥이 흔들리고, 천장에서 작은 돌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봉인이… 약해지고 있어!”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젠장! 봉인이 약해지면 뭐가 튀어나온다는 거야!” 진우가 도끼를 들어 올리며 사방을 경계했다.
이준은 진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둥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붉은빛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이준은 희미하게 무언가를 보았다. 거대한 기둥에 새겨진 마법진들 사이로, 불완전한 형태의 실루엣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닮았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뒤틀려 있었다. 여러 개의 팔다리가 엉켜 있는 듯했고, 머리 부분은 마치 여러 개의 얼굴이 한데 뭉쳐진 듯한 형체였다. 끔찍한 기형의 그림자가, 봉인된 기둥 안쪽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준의 귀에 환청처럼, 혹은 실제처럼, 수많은 목소리들이 동시에 들려오는 듯했다.
*살려줘…*
*돌려줘…*
*…우리는… 루미나의… 지식…*
콰지직!
기둥 중앙에서 굵은 균열이 생겨났다. 붉은빛이 그 균열을 통해 핏물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준은 깨달았다. 루미나 학원의 지하에 숨겨진 금기란, 단순히 고서에 잠들어 있는 ‘지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채로, 혹은 살아있었던 채로, 끔찍하게 변모한 채 봉인되어 있던 존재들의 절규였다. 학원의 영광을 위해 치러진, 인간성을 말살한 대가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금기가 봉인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해!” 하나가 절규했다.
“너무 늦었어…!” 진우의 목소리에도 공포가 서렸다.
이준은 얼어붙은 듯 기둥을 바라보았다. 붉은 균열 사이로 드러난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들을 향해 번뜩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셀 수 없이 많은, 그러나 한 점으로 모인 듯한 차가운 시선이 그들을 꿰뚫었다.
그 순간, 기둥의 봉인 마법진 하나가 완전히 꺼지며 거대한 돌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틈으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인간의 비명이 아니었다. 동시에 수십, 수백의 존재가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영혼을 찢는 듯한 절규였다.
금지된 지식의 심장이 드디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준은 자신의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들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