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숲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고단했다. 퇴근 시간의 도로는 숨 막히는 정체로 가득했고, 인파는 끈적한 피로를 몰고 다니는 유령들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훈은 익숙한 동작으로 휴대용 단말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공허하게 울렸다.
문이 열리고 닫히자, 바깥세상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17층 그의 작은 보금자리는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현관에 벗어놓은 구두, 거실 한편에 놓인 낡은 소파,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적어도 그때까진 말이다.
지훈은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느슨하게 풀었다. 테이블 위에는 어제 저녁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용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것들을 치우려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뭐지?”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던 원격 제어기가 아주 미세하게, 마치 눈 깜빡할 사이에 한 뼘 정도 옆으로 스르륵 움직인 것 같았다. 지훈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건가? 착각이겠지.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원격 제어기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남은 음식 용기를 봉투에 담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가벼운 옷차림으로 소파에 앉았다. 영상 기기를 켜려 원격 제어기를 찾았지만, 아까 제자리에 두었던 원격 제어기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여기에 뒀는데. 그는 소파 틈새를 뒤지고, 테이블 아래를 살폈다.
“어디 갔지?”
그때, 주방 쪽에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컵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지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 위, 컵을 놓아두는 건조대에 컵이 하나 더러져 있었다. 방금 샤워하고 나왔으니 물을 마시러 간 적도 없었다. 그는 컵을 집어 들며 생각했다. ‘설마, 귀신이라도 붙었나?’
하지만 그는 과학을 믿는 현실주의자였다. 낡은 아파트의 미세한 지반 흔들림이거나, 아니면 그저 착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컵을 제자리에 두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원격 제어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젠장.”
짜증이 솟구쳤다. 어딘가에 있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는 창가에 놓인 오래된 금속제 장식품을 만지작거렸다. 어릴 적 아버지가 선물해준 우주선 모형이었다.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은색 모형은 오랜 세월의 먼지를 품고 있었다. 그 순간, 거실의 스탠드 등이 ‘파지직’ 소리와 함께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불안정한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빛이 희미해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지훈은 손을 멈추고 스탠드 등을 응시했다. ‘전구가 다 됐나?’ 하지만 이 스탠드는 최근에 전구를 교체한 참이었다. 그는 스탠드 쪽으로 다가가 스위치를 눌러봤지만, 깜빡임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격렬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미약한 진동을 느꼈다.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아주 낮은 주파수의 ‘웅-웅-‘ 하는 소리였다. 그것은 건물의 진동과는 달랐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아주 멀리서, 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귀를 찢을 듯한 고음이 아니라, 심장을 흔드는 듯한 저음의 진동이었다.
“뭐야, 정말?”
그는 스탠드에서 손을 떼고 뒷걸음질 쳤다. 그때였다. 소파 등받이 위에 놓여 있던 그의 휴대용 단말기가 ‘덜컹’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면은 멀쩡했지만, 충격 때문인지 화면이 잠시 지직거렸다.
지훈은 순간적인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원격 제어기, 컵, 스탠드, 그리고 휴대용 단말기. 일련의 사건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의지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 있어?”
말소리는 떨렸다. 그는 숨을 죽이고 주위를 둘러봤다. 고요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는 용기를 내어 휴대용 단말기를 주워 들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 집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라고 말하면 미쳤다고 할 게 뻔했다.
그는 휴대용 단말기를 꽉 쥐고 부엌으로 다시 향했다. 혹시 누군가 침입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현관문은 분명 잠겨 있었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칼꽂이에서 식칼 하나가 ‘챙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바닥에 박힌 칼날이 번쩍였다.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더 이상 이 모든 것을 합리화할 수 없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현상들.
그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몸을 굳혔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 방에 함께 있었다.
“나가… 나가라고!”
그가 외쳤다. 목소리는 쉬었고, 공포로 인해 갈라졌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거실의 영상 기기가 저절로 켜졌다. ‘쉬이이이-‘ 하는 백색 소음과 함께 화면이 지직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지직거리는 화면 위로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고대 상형문자 같기도 했고, 정교한 회로도 같기도 했다.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문자들 사이에서, 아주 짧게,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 이미지가 있었다.
새까만 우주를 배경으로, 미세한 금빛으로 빛나는 알 수 없는 형태의 건축물. 혹은 거대한 기계.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대체…”
그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강렬한 진동이 울렸다. 마치 거대한 엔진이 그의 집 바로 아래에서 시동을 거는 것만 같았다. 스탠드 등은 미친 듯이 깜빡였고, 주방의 그릇들은 격렬하게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지훈은 주저앉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 집, 아니 어쩌면 이 도시 전체에,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침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작이 그의 고요했던 아파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눈을 뜨자, 영상 기기 화면은 다시 백색 소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정면에, 방금 전 칼이 떨어진 자리 옆, 주방 타일 바닥 위에 알 수 없는 기호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별자리를 본떠 만든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어떤 기계의 설계도 같기도 했다. 미세한 푸른빛이 그 기호 주변에서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지훈은 그 기호를 멍하니 바라봤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오한.
그것은 시작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이 세상에 던진, 첫 번째 질문.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기호를 가리킬 뿐이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