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잔영
이안은 낡은 연구 시설의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았다. 희미한 비상등만이 깜빡이는 복도는 마치 수십 년 전의 시간이 멈춰버린 듯 정적에 잠겨 있었다. 먼지가 두텁게 쌓인 기계들과 녹슨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이곳에서, 그녀는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찢어진 기억의 조각들이 이 공간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
현우는 그녀의 옆에 서서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그의 시선은 언제나처럼 이안에게 깊은 이해와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괜찮아?”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괜찮지 않아.” 이안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 어쩌면 괜찮을지도 몰라. 여기가… 어딘가 익숙해. 하지만 동시에 끔찍하게 낯설어.” 그녀는 벽에 박힌 낡은 제어판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차가운 금속에 닿는 순간, 뇌리를 강타하는 섬광이 터져 나왔다.
섬광 속의 목소리
환각은 순식간에 그녀를 집어삼켰다.
하얗고, 쨍한 조명.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와 기계음. 무수한 케이블과 데이터 스크린이 반짝이는 낯익은 풍경. 그리고… 한 사람의 뒷모습.
그는 낡은 작업복을 입고 거대한 시간 측정 장치 앞에 서 있었다. 그의 어깨는 넓었고, 자세는 굳건했다. 하지만 이안은 알 수 있었다. 그의 등 뒤에 숨겨진 깊은 절망을.
“가지 마…” 이안의 입술에서 저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 그의 목소리였다.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너무나도 사랑했던 그 목소리.
“이안… 네 기억은 나의 증거가 될 거야. 이걸 기억해. 멈춰야 해. 그들은… 그들은 너를 찾을 거야.”
그의 손이 이안의 손을 꽉 잡았다. 차갑고, 떨리는 손. 이안은 그의 얼굴을 보려 했지만, 마치 안개에 갇힌 듯 선명해지지 않았다. 강렬한 슬픔이 이안의 심장을 찢는 듯했다. 그는 거대한 장치에 무언가를 연결하고 있었다. 그 순간, 푸른 빛이 시설 전체를 집어삼켰고, 이안은 거대한 충격과 함께 몸이 산산조각 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잊어버려… 내가 널 지킬게.”
마지막으로 들린 그의 속삭임과 함께 모든 것이 암전으로 변했다.
되찾은 단서
“이안!”
현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잡아당겼다. 이안은 식은땀에 젖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의 환각이 생생하게 되풀이되고 있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먹먹한 슬픔. 그리고 선명하게 기억나는 하나의 장면.
“그는… 내 이름을 불렀어.” 이안은 희미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방금 전 만졌던 제어판을 가리켰다. “그리고… 어떤 기계에 이걸 연결했어.” 그녀는 제어판 위,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문양을 가리켰다. 녹슨 패널 사이에서 겨우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눈물방울 같은 모양의 삼각형 문양.
현우는 재빨리 패드를 꺼내 문양을 스캔했다. “이건… 고대 문명에서 쓰이던 상징이 아니야. 이건 일종의 암호화된 좌표야. 그리고 이 시설의 설계도에 따르면, 이 문양이 가리키는 곳은… 이 지하에 숨겨진 비밀 연구실이야.”
이안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비밀 연구실. 기억 속의 그가 있었던 곳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기억을 지웠을지도 모르는 그 남자.
그들은 오래된 시설의 심장부로 향했다. 현우는 능숙하게 낡은 보안 시스템을 우회하며 좁고 어두운 통로를 뚫고 나갔다. 이안은 걸음마다 발자국처럼 울리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인 감정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육중한 강철 문 앞에 섰다. 굳게 닫힌 문 위에는 아까 보았던 것과 똑같은 눈물방울 모양의 삼각형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이거야.” 현우가 속삭였다.
진실의 문
현우가 능숙한 손길로 잠금장치를 해제하기 시작했다. 윙-하는 소리와 함께 낡은 기계들이 깨어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강철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빛은 어둠에 익숙해진 이안의 눈을 순간적으로 멀게 했다.
그러나 그 빛 속에서 이안은 기겁할 만한 것을 발견했다.
문 안쪽 벽에는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손으로 쓴 메시지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이안, 만약 네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나는 성공한 거야.’
‘너는… 나의 과거이고, 나의 미래야. 그리고 나는 너의 안전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했어.’
‘그들은 시간의 흐름을 조작하려 했어. 모든 것을 뒤바꾸려고 했지. 나는 너를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너의 기억을 봉인했어.’
‘이 방 안에는 모든 것이 있어. 네가 누구였는지, 우리가 왜 여기에 왔는지. 하지만 경고해. 네 기억을 되찾는 순간, 그들은 너를 다시 추적할 거야.’
‘선택은 너의 몫이야. 이 모든 진실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다면, 저 장치를 활성화해.’
메시지 아래에는 크고 투명한 유리관 안에 놓인 복잡한 장치가 빛나고 있었다. 그 장치는 그녀의 기억 속에서 보았던, 그가 만지고 있던 바로 그 장치였다.
현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 이건 네가 쓴 글이야. ‘나의 과거이고, 나의 미래’라니… 설마, 네가 너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인 거야?”
이안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두 명의 이안이 존재하는 듯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한 이안은 지금 여기에 있고, 또 다른 이안은 이 메시지를 남기고 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 그녀는 스스로의 기억을 지우고, 스스로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고통스러웠지만, 그 과정에서 그녀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그 남자와 함께 이 모든 계획을 꾸몄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과거가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진실을 마주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알 수 없는 채 살아갈 것인가.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의 내면 깊은 곳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그녀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녀는 유리관 안의 장치로 다가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듯한 압박감. 손을 뻗어, 푸른빛을 내는 장치의 표면에 손가락을 댔다.
과연, 이 장치는 그녀에게 모든 것을 돌려줄까? 아니면… 그녀를 새로운 위험으로 몰아넣을까?
이안이 장치를 활성화하려는 찰나, 갑자기 시설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상등이 깜빡이다 완전히 꺼지고, 어둠 속에서 어딘가 멀리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다음 장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