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복수의 서막
차가운 비가 내리는 폐허의 도시는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무너진 건물들의 뼈대만이 하늘을 향해 앙상하게 솟아 있었고,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은 영혼 없는 눈처럼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진우는 허물어진 백화점 옥상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축축한 바람을 맞으며 멀리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응시했다. 그의 왼쪽 눈 아래를 길게 가로지르는 흉터는 빗물에 젖어 더욱 붉게 도드라져 보였다.
“이현재….”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비바람에 섞여 허무하게 흩어졌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증오의 무게는 강철처럼 단단했다. 3년 전, 모든 것이 무너진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진우는 유일하게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다. 함께 굶주리고 싸웠던 유일한 동반자. 살아남기 위해 서로의 등을 맡겼던 동료. 그 모든 믿음은 거대한 재앙 앞에서 한낱 모래성처럼 부서졌다. 깊은 협곡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그가 본 것은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던 현재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이 흉터는, 그 추락의 대가였다.
그날 이후, 진우의 삶은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향해 흘러왔다. 복수. 현재가 자신의 등에 칼을 꽂고 얻어낸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가기 전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었다. 며칠 전, 그는 폐쇄된 통신망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정보를 입수했다. 현재가 도시 외곽에 거대한 ‘안식처’를 구축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굶주림과 약탈로 점철된 세상에서, 안식처라니. 역겨운 위선이었다.
진우는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 옥상 난간을 넘어섰다. 녹슨 철근과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발아래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한 손에 든 소음기가 달린 개량형 자동권총의 차가운 금속 감촉이 그의 손바닥에 선명하게 와닿았다. 빗물이 시야를 가렸지만, 그의 움직임은 그림자처럼 민첩하고 조용했다. 폐허를 지배하는 것은 오직 약육강식의 법칙뿐이었다. 밤의 어둠 속에는 굶주린 괴물들과, 그 괴물보다 더 잔인한 인간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몇 시간의 은밀한 이동 끝에, 진우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거대한 철제 울타리를 발견했다. 현재가 ‘새로운 새벽’이라 부르며 구축했다는 요새였다. 높다란 벽 위로는 섬광탄이 주기적으로 터져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안쪽에서는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와, 희미하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마저 들려왔다. 바깥세상이 핏빛으로 물든 절규와 고통의 연속이라면, 저 안은 마치 다른 세계 같았다.
진우는 망원경을 꺼내 들었다. 시야를 조정하자, 요새 안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다. 발전기가 굉음을 내며 전력을 공급하고 있었고, 온실에서는 푸른 채소들이 자라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중앙 광장에 세워진 임시 단상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남자.
이현재.
예전보다 살이 붙고, 깔끔한 옷차림을 한 그는 사람들 앞에서 열정적으로 연설하고 있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그때 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환호했고, 그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가득했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 미소 뒤에 숨겨진 악의를 아는 사람은, 아마 이 세상에 자신뿐일 터였다.
“…우리는 함께 이 역경을 이겨낼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우리에게 다시 기회를 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현재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통해 진우의 귀에까지 닿았다. 위선적인 구호들. 진우는 망원경을 내렸다. 심장이 분노로 쿵쾅거렸다. 저렇게 평화로운 척, 고귀한 척 연기하는 모습이 역겨워 견딜 수 없었다. 그의 복수는 단순히 목숨을 빼앗는 것에 그치지 않을 터였다. 현재가 힘들게 쌓아 올린 이 모든 기만적인 성을 무너뜨려야 했다.
그는 요새의 외곽을 따라 움직였다. 경계가 삼엄했지만, 진우는 이 폐허의 왕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더러운 기술들을 익혔다. 낡은 배수로와 버려진 시설물들 사이를 기어 다니며, 그는 가장 취약한 지점을 찾아냈다. 요새 내부에 물을 공급하는 거대한 파이프라인. 그리고 그 옆에 자리한 비상 발전기.
‘그래, 시작은 여기서부터다.’
날카로운 공구들이 그의 손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끈적이는 기름때가 그의 손에 묻어났다. 물 공급을 끊는 것은 너무 잔인했다. 그 안에 갇힌 무고한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발전기는 달랐다. 빛과 안정은 현재의 권위를 상징했다.
몇 분 후, ‘치직-!’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거대한 발전기는 굉음을 내며 비틀거렸고, 잠시 후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연기를 뿜어내며 침묵했다. 요새 전체가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다. 광장에 울려 퍼지던 현재의 목소리도, 사람들의 환호도 거짓말처럼 뚝 끊겼다. 혼란에 빠진 비명 소리와 당황한 병사들의 외침이 어둠을 가득 메웠다.
진우는 그림자 속으로 다시 녹아들었다. 요새의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지만, 그는 이미 충분히 멀리 벗어나고 있었다. 비에 젖은 얼굴에는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저 안에 있는 현재의 얼굴이 어떨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그는 멀리서 불빛 하나 없는 요새를 응시했다. 혼란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기다려라, 이현재.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두 눈으로 보게 될 거다.”
진우는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핏빛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복수의 서막은, 이제 막 올랐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