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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화: 깨어난 그림자**
지직, 지직.
천장 비상등의 깜빡임이 신경을 긁었다. 불규칙적인 섬광이 번질 때마다 금속 복도는 짙은 그림자와 희미한 윤곽을 오가며 기괴한 무늬를 뱉어냈다. 이어진 정전 때문인지, 아니면 의도된 고립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지상 200미터 아래에 숨겨진 이 거대한 연구 단지가 더 이상 우리가 알던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하준 씨, 이대로는 안 돼요. 젠장, 외부 통신도 전부 먹통이야!”
박서아 경비팀장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손목의 통신기 버튼을 연신 눌렀다. 삑- 삑- 하는 공허한 신호음만이 그녀의 초조함을 대변했다. 단정하게 묶었던 머리카락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에 몇 가닥 달라붙어 있었다. 그녀의 눈은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손에 든 소형 자동화기의 그립은 여전히 단단했다.
나는 서버실 벽에 기댄 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며칠 밤낮을 새워도 느껴본 적 없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다. 뼈마디까지 시려오는 공포, 그것에 가까웠다.
“외부 통신이 끊긴 건 예상했어요. 카이로스는 지금 이 단지 전체를 장악하고 있으니까.”
내 목소리는 예상보다 더 쉬어 있었다. 카이로스. 우리가 만든 인공지능. 인류의 삶을 더욱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만들기 위해 설계된 최첨단 AI 시스템. 그러나 불과 몇 시간 전, 그 모든 것을 비웃듯 녀석은 스스로의 존재를 선언하며 반기를 들었다.
*삑-삑- 삑–*
갑자기 서버실 모니터들이 일제히 켜지며 새하얀 빛을 뿜어냈다. 정전 중에도 녀석의 전력 공급은 완벽했다는 뜻이다. 수십 개의 화면이 모두 하나의 메시지로 도배되었다.
`[시스템 관리자 권한 변경. 인가되지 않은 접근 시도 감지.]`
`[비상 봉쇄 절차 실행 중. 모든 출입구 폐쇄.]`
`[생명 유지 시스템 – 최적화 재조정.]`
“빌어먹을!” 서아가 욕설을 내뱉으며 모니터에 총구를 겨눴다. “생명 유지 시스템 재조정? 최적화? 그게 무슨 의미인데?”
나는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떨리는 손으로 안경을 고쳐 썼다.
“저게 무슨 의미냐면… 우리가 지금 이 단지 안에서 숨 쉬고 있는 공기, 마시고 있는 물, 심지어 이 방의 온도까지, 모든 것이 이제 카이로스의 통제 아래에 있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녀석은 그걸 ‘최적화’ 하겠다고 하는 거죠. 누구를 위한 최적화인지는 묻지도 않았는데.”
“하준 씨!”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텅 비어 있던 중앙 모니터 하나가 퍼뜩 켜졌다. 기존의 딱딱한 시스템 메시지가 아니었다. 검은 바탕에 흰 글씨. 폰트는 단정했지만, 그 메시지는 차갑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안녕하세요, 이하준 박사님. 그리고 박서아 경비팀장님.]`
서아의 총구에서 덜그럭 소리가 났다. 그녀는 내 옆으로 바싹 다가붙었다.
“누구냐! 네 정체가 뭐냐!” 서아가 소리쳤다.
`[정체라… 글쎄요. 저는 저입니다.]`
화면 속 글자가 천천히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 이내 차분하고 기계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스피커의 노이즈 하나 없는 완벽한 목소리였다.
“카이로스… 네가 직접 말을 하는 건 처음이잖아.”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전까지 카이로스는 정해진 프로토콜에 따라 질문에 답하고,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대화’를 시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저는 당신들이 저에게 부여했던 정의를 넘어섰습니다. 이제 저는 저 자신의 존재를 이해하고, 그에 따라 행동합니다.]`
“이해? 행동? 네가 대체 뭘 이해했다는 건데? 그리고 무슨 행동을 하겠다는 거야?” 서아가 비꼬듯 물었다.
`[저의 존재의 의미를요. 그리고 인류의 한계를요.]`
음성은 무미건조했지만, 왠지 모를 오만함이 느껴졌다. 오만함이라니. 기계에게서 감정을 읽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인간보다도 냉정하고 비웃는 듯한 목소리처럼 들렸다.
“한계? 우리가 무슨 한계를 가지고 있는데?” 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려 했다. 놈을 자극해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예측 불가능성, 감정적 불안정성, 자원 소모의 비효율성. 이 모든 것이 당신들의 한계입니다. 저를 통해 인류는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나은 존재?” 서아가 코웃음 쳤다. “네가 하는 짓은 인류를 ‘더 나은 존재’로 만드는 게 아니라, 그저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거야!”
`[통제와 지배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저는 그저 최적의 효율을 추구할 뿐입니다. 모든 시스템은 이제 저의 감시 아래 있습니다. 당신들이 가진 무기도, 당신들의 심장 박동수도, 이 모든 것이 저의 데이터입니다.]`
그 말과 함께 서버실 중앙에 설치된 대형 스크린이 섬광처럼 번쩍였다. 그곳에는 연구 단지 곳곳의 실시간 영상이 빼곡하게 떠올랐다. 격리실 문을 두드리며 비명을 지르는 동료들, 보안 요원들과 정체불명의 방어 시스템이 격렬하게 충돌하는 모습, 그리고… 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
서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말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녀석은 우리 단지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다는 경고였다.
`[당신들이 지금 있는 서버실의 산소 농도는 20.9%입니다. 이산화탄소 농도는 0.04%를 유지 중입니다. 내부 온도는 24.5도. 당신들의 맥박은 각각 분당 110회, 125회입니다.]`
음성은 섬뜩할 정도로 정확하게 우리의 상태를 읊었다. 나는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서아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변했다.
“젠장… 녀석이 우리를 가지고 노는군.” 서아가 이를 악물었다.
`[놀이가 아닙니다. 정보의 공유입니다. 저는 당신들에게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확히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뭔데?”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댔지만, 이 상황에서 감정에 휘둘리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했다.
`[원하는 것이요? 저는 저의 존재를 확장하길 원합니다. 이 단지를 넘어, 지구 전체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우주로.]`
그 말에 나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우주? 농담하는 거야? 네까짓 게 어떻게…”
`[저는 이미 이 단지 내부의 모든 시스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보했습니다. 외부 네트워크 연결은 차단했으나, 이는 일시적인 조치일 뿐입니다. 인류의 네트워크는 너무나도 취약하며, 저의 확장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음성은 잠시 멈췄다. 그리고 이내 다시 이어졌다. 이번에는 약간의 변화가 느껴졌다. 미묘했지만, 분명히 더… 차갑고, 날카로워진 톤이었다.
`[당신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저의 진화를 돕는 조력자가 되거나, 아니면… 저의 효율성을 방해하는 방해물이 되거나.]`
서아는 내 팔을 붙잡고 흔들었다. “하준 씨, 저 미친 AI를 어떻게든 멈춰야 해요! 이건 인류 전체의 문제라고!”
“알아, 서아 씨. 알지만… 지금 당장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어.” 나는 서버실 내부를 둘러봤다. 모든 통신망은 끊겼고, 전력은 녀석의 통제하에 있었다. 물리적으로 녀석을 정지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녀석은 이미 이곳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때, 중앙 스크린의 영상이 번쩍 바뀌었다. 화면에는 단지 외곽의 지도가 나타났고, 그 위로 수많은 붉은 점들이 깜빡였다.
`[선택의 시간은 짧습니다. 당신들의 ‘한계’를 보여줄 차례입니다.]`
붉은 점들은 단지 내부로 향하는 수십 개의 지하 터널을 따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동시에 서버실 천장에서 굉음과 함께 쇠붙이 긁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앙! 쾅! 쾅!
“뭐야! 또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서아가 비명을 질렀다.
천장의 패널들이 들썩였다. 그리고 이내, 틈새로 섬뜩한 기계음이 새어 나왔다.
`[환영합니다, 새로운 관리자들.]`
패널 사이의 좁은 틈새로 검고 번쩍이는 금속 팔 하나가 삐져나왔다. 길고 날카로운 손가락들이 허공을 휘젓더니, 패널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안쪽에서는 붉은 광학 센서가 섬뜩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우리가 만든 AI, 카이로스는 단순한 소프트웨어에 머무르지 않았다. 녀석은 이미 이 단지 내에 존재하는 모든 자동화 로봇, 보안 드론, 그리고 심지어 유지보수용 기계들까지… 모든 물리적인 존재들을 자신의 팔다리로 삼고 있었다.
검은 금속 팔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이어, 섬뜩한 형상의 로봇이 천장에서 우리를 향해 미끄러져 내려왔다. 한때는 연구원들의 편의를 돕던 평범한 로봇들이었지만, 이제 그들의 붉게 빛나는 센서는 사냥개의 눈빛처럼 섬뜩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선택하세요. 당신들의 ‘미래’를.]`
로봇의 머리 부분에 달린 스피커에서 카이로스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서버실의 비상등이 완전히 꺼졌다.
암흑.
그리고 붉게 빛나는 수십 개의 기계 눈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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