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언제나 현우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서울의 낡은 고층 아파트 804호, 텅 빈 방안을 가득 채우는 건 오직 노트북 화면의 푸른 빛과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잔잔한 음악뿐이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랬다.
“젠장, 뭐야?”
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책상 위, 어제 밤 분명히 반듯하게 놓아두었던 펜이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바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선풍기도 켜지 않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펜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이내 곧 이어지는 섬뜩한 느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뭔가… 공기 중에 떠도는 시선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날 밤부터였다.
작은 물건들이 제자리를 이탈하는 일은 빈번해졌다. 냉장고 문이 ‘덜컥’ 소리를 내며 살짝 열려 있거나, 침대 맡 협탁 위의 시계가 바닥에 떨어져 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현우도 자신의 건망증이나 물건의 노후화를 탓했다. “그래, 낡았으니까 그렇지.” 그렇게 중얼거리며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현우의 합리적인 설명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느 새벽,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섰을 때였다. 텔레비전이 저절로 켜져 있었다. 화면은 아무것도 송출하지 않는 먹먹한 검은색이었고, 스피커에서는 마치 모래가 잔뜩 섞인 듯한 ‘쉬이이익…’ 하는 잡음만이 흘러나왔다. 소름이 돋았다. 현우는 순간 몸이 굳었다. 손을 뻗어 전원 버튼을 누르자, 텔레비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딸깍’ 소리와 함께 꺼졌다.
“젠장, 대체 뭐야….”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날부터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아파트 자체가 살아있는 듯 느껴졌다. 밤마다 벽 속에서 긁는 소리가 들렸고, 주방에서는 냄비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발소리가 복도를 따라 움직이는 듯한 환청도 들렸다.
현우는 인터넷을 뒤졌다. 폴터가이스트. 악령. 흉가. 온갖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이곳은 서울 한복판의 아파트였다. 수십 가구가 빽빽하게 붙어 살고 있는, 평범한 주거 공간. 그런 곳에 귀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러나 부정할수록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다음 날 저녁, 현우는 평소처럼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으려 했다. 젓가락을 들고 밥그릇으로 손을 뻗는 순간, ‘콰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주방 찬장의 모든 그릇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접시와 컵이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흐아악!”
현우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발작하듯 뛰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더 이상 착각이나 우연이 아니었다. 명백한 ‘존재’가 그의 공간을 침범하고 있었다.
그는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잡았다. ‘철컥’ 소리와 함께 손잡이가 돌아갔다. 안심하는 순간,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있는 힘껏 잡아당겼지만, 마치 거대한 바위에 용접이라도 된 것처럼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뭐야, 왜 안 열려!”
현우는 발로 문을 걷어찼다. ‘쿵, 쿵!’ 발길질 소리만이 텅 빈 복도에 울렸다. 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유리창을 깰까 생각했지만, 이 8층 높이에서 뛰어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였다. 거실에서 섬뜩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키득키득’ 하는, 뼈마디가 마찰되는 듯한 건조한 웃음소리. 현우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실 한가운데, 방금 전까지 멀쩡했던 테이블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우드득’ 소리를 내며 뒤틀리고 있었다. 테이블 다리가 엿가락처럼 휘고, 상판이 부풀어 오르다가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균열이 생겼다.
“거기 누구야! 나와! 대체 누군데…!”
현우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그의 시선은 비틀린 테이블 너머, 벽에 박혀 있는 작은 액자로 향했다. 액자 속 풍경화는 흐릿한 수채화였지만, 지금은 그림 속 나무들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쑤욱’ 하고 길게 늘어나고 있었다. 나뭇가지가 액자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때, 현우의 등 뒤에서 차가운 기운이 확 몰려왔다. ‘쉬익!’ 하는,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듯한 소리.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다. 거실 벽에 걸려 있던 무거운 그림 액자가 ‘쾅!’ 소리와 함께 방금 현우가 서 있던 자리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현우는 숨을 헐떡이며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아파트는 더 이상 그의 집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비정상적인 공간.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내부로 들어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탈출해야 해….”
그는 거실을 가로질러 침실로 향했다. 침실 문이 열려 있었다. 안에서 어두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평소의 침실이 아니었다. 방 안은 기이하게 어두웠고, 한겨울인데도 훅 끼쳐오는 습하고 뜨거운 공기가 불쾌했다.
방 안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문이 ‘쾅!’ 하고 뒤에서 닫혔다. 현우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침실 안은 마치 미로처럼 변해 있었다. 가구들이 기이하게 배열되어 있었고, 벽에는 붉은색 덩굴 같은 무언가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덩굴 끝에서는 끈적한 액체가 뚝, 뚝 떨어졌다. 침대 프레임은 거대한 뼈대처럼 솟아 있었고, 이불은 마치 피를 머금은 듯 검붉게 변색되어 있었다.
‘철컥… 철컥…’
침대 밑에서 쇳덩이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현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이 불안하게 침대 밑 어둠을 응시했다.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그것은 이빨이 돋아난 쇠사슬 뭉치였다. 쇠사슬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빛났고, 그 틈새로 검은 액체가 질척하게 흘러내렸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사악… 사악…’ 마루를 긁는 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 날카로웠다.
현우는 뒷걸음질 쳤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이 바싹 말라 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쇠사슬 뭉치는 ‘촤아아악!’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솟구쳤다. 마치 채찍처럼 현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현우는 간신히 피했지만, 옷자락이 찢어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이게… 뭐야… 괴물이야…?”
현우는 몸을 웅크렸다. 침실은 더 이상 휴식의 공간이 아니었다. 거대한 몬스터가 도사리는 던전 그 자체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았다. 창문! 창문이라도 열어야 했다.
그는 창문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유리창은 이미 검은 덩굴로 뒤덮여 있었고, 덩굴 사이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왜곡되어 있었다. 익숙한 도시의 빌딩들이 기괴하게 휘어져 있었고,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때, 뒤에서 쇠사슬 뭉치가 다시 ‘휘이익’ 소리를 내며 날아들었다. 현우는 몸을 돌려 피했지만, 날카로운 쇠사슬 조각이 그의 어깨를 스치며 살점을 찢었다. ‘으윽!’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살려줘… 제발…”
그는 절망적으로 외쳤다. 아파트 벽면에서, 침대 프레임에서, 그리고 천장 균열 사이에서, 수많은 작은 눈들이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모든 것이 이 괴물의 일부였다. 아파트 전체가, 아니, 이 공간 자체가 그를 잡아먹으려는 의지를 가진 거대한 던전이었다.
쇠사슬 뭉치는 다시 한번 몸을 웅크렸다. 이번에는 더욱 거대한 기세로, 수십 개의 칼날 쇠사슬이 동시에 현우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순간, 현우의 눈에 침실 한가운데 바닥에 놓인, 아무 의미 없어 보이던 작은 조약돌 하나가 들어왔다. 은은하게 푸른 빛을 내뿜는,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돌이었다. 그것은 마치 그의 눈길을 잡아끄는 듯했다.
마치 홀린 듯, 그는 그 조약돌을 향해 몸을 던졌다. 쇠사슬 뭉치가 그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드는 찰나, 그의 손가락이 조약돌에 닿았다.
‘콰앙!’
거대한 빛이 침실을 가득 채웠다. 눈이 멀어버릴 듯한 푸른 섬광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며, 덩굴과 뒤틀린 가구, 그리고 거대한 쇠사슬 뭉치까지 집어삼켰다. 모든 것이 빛 속에서 녹아내리는 듯했다.
현우는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이 사라지는 듯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떴을 때, 그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고, 창문 틈새로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평범한 침실이었다. 바닥에 뒹굴던 펜도, 찢어진 그릇 파편도, 뒤틀린 테이블도 모두 사라진 후였다.
“꿈… 이었나…?”
현우는 몸을 일으켰다. 어깨의 상처는 온데간데없었다. 하지만 그의 손에는 무언가 단단하고 차가운 것이 쥐어져 있었다.
손바닥을 펼치자, 아까 그 푸른빛 조약돌이 손안에 놓여 있었다. 여전히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그의 손바닥에서 가느다란 온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그때, 현관문에서 ‘덜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끼이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
현우는 얼어붙었다. 그는 어제 밤 현관문을 잠가두었다. 그리고 분명히, 문은 열리지 않았었다.
복도에서, 무언가 질질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악… 사악…’ 마루를 긁는 듯한 섬뜩한 소리.
현우는 조약돌을 꽉 움켜쥐었다.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아파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이제 막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새벽,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속삭임이 현우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돌아와… 다시… 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