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 고층 아파트 숲이 병풍처럼 둘러싼 그곳. 현우는 스물아홉 평짜리 자신의 보금자리를 사랑했다. 깔끔한 인테리어, 통창 너머로 펼쳐지는 도시의 야경은 고된 하루를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작은 위로가 되었다. 늘 그랬듯이, 잠금장치를 풀고 들어선 집 안은 차분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고요함이 익숙했지만, 가끔은 너무 적막해서 귀가 멍멍해질 지경이었다.
“하아, 오늘도 죽을 맛이네.”
넥타이를 풀며 중얼거렸다. 어깨에 얹힌 짐을 내려놓듯, 피로를 한숨에 실어 내뱉었다. 현관을 지나 거실로 향하는데, 무언가 이상했다. 어제 분명 책상 위에 가지런히 두었던 서류철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피곤해서 그랬겠지. 혹은, 건조한 공기에 정전기가 일어났을 수도 있고. 현우는 허리를 굽혀 서류철을 주워 올렸다.
그날 밤부터였다.
잠자리에 들었는데, 거실에서 옅은 ‘달그락’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잠결에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기울였지만, 이내 스르륵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두었던 시계가 한 뼘가량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현우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것 역시 ‘설마’ 하는 생각에 이내 지워버렸다.
“요즘 피곤하긴 한가 보네.”
그는 자신에게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며칠 뒤, 현상이 좀 더 명확해졌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거실의 스탠드 조명이 켜져 있었다. 그는 분명 아침에 나갈 때 모든 불을 껐었다.
“이게 뭐지?”
현우는 순간 낯선 한기에 몸을 움츠렸다. 뭔가 꺼림칙했지만, 곧 “내가 깜빡했나? 아침에 너무 정신이 없어서.” 라며 스스로를 설득했다. 하지만 며칠 뒤 같은 일이 반복되자,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분명 끄고 나갔는데. 몇 번이고 확인했는데.
어느 날 저녁, 현우는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채널을 돌리다 문득 부엌 쪽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기분에 고개를 돌렸다. 씽크대 위에 놓인 컵들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온 집안에 울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컵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밀린 것처럼, 제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였다. 현우는 숨을 들이켜고 그 광경을 응시했다. 심장이 발밑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뭐… 뭐야?”
그는 겨우 목소리를 냈다. 컵의 움직임은 곧 멈췄다. 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컵을 만져보았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주변에 떨어진 것도 없었다. 그저 컵들이 평범하게 제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그날 이후, 현우는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면, 집안 어딘가에서 ‘슥삭’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벽에서 들리는 ‘톡톡’ 하는 소리는 마치 손톱으로 긁는 소리 같았다. 환청일 거라고, 그저 피곤해서 예민해진 것이라고 스스로를 타이르려 애썼지만, 이미 그의 이성은 차가운 공포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들고 집안 곳곳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거실, 부엌, 침실. 혹시라도 뭔가 이상한 것이 찍힐까 봐. 밤에는 거실에 삼각대를 세워두고 밤새 녹화 버튼을 눌러두었다. 하지만 다음 날 영상을 확인하면,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시간이 흐르는 평범한 영상일 뿐이었다. 오히려 그 평범함이 현우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임을, 그는 직감했다.
“누구… 누구야 거기 있어?”
어느 깊은 밤, 거실 한가운데 서서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텅 빈 공간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확실히 느꼈다. 어둠 속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을. 등골이 오싹하게 서늘해졌다.
그의 정신은 점점 갉아먹혔다. 밤에는 잠 못 이루고 낮에는 멍하니 앉아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모든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현관문은 몇 번이고 잠금장치를 확인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칼을 들고 잠자리에 들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 샤워를 마치고 욕실 거울 앞에 섰을 때였다. 김이 서린 거울에 무언가 쓰여 있었다.
‘나가지 마.’
현우는 숨을 들이켰다. 손가락으로 쓰인 듯한 글씨는 어딘가 비틀려 있었고,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것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는 팔을 뻗어 글씨를 지우려 했지만,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글씨는 연기처럼 사라졌다. 거울은 다시 깨끗하고 차가운 자신의 모습을 비췄다.
“이건… 꿈이 아니야.”
그는 이를 악물었다. 현실이었다. 이 집은, 이 아파트는 더 이상 그의 안식처가 아니었다. 놈이… 그 무언가가, 자신을 가두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이 집을 떠나야 했다. 당장이라도. 옷가지와 중요한 서류를 캐리어에 쑤셔 넣는데, 갑자기 방 안의 불이 ‘파직!’ 소리와 함께 꺼졌다. 온 집안이 암흑에 잠겼다.
“으악!”
현우는 비명을 질렀다. 캐리어를 내팽개치고 침대 밑으로 숨으려 했다. 그때였다. 거실에서부터 ‘쿵, 쿵,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 무거운 것이 바닥을 찍으며 다가오는 소리 같았다. 발소리였다. 그 발소리는 점점 현우가 있는 방으로 다가왔다.
‘삐이익…’
침실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침대 밑에서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입을 틀어막았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그는 침실 문을 통해 들어서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형체가 없었다. 그저 짙은 어둠 그 자체였다. 어둠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삭, 삭, 삭…’
무언가 바닥을 질질 끄는 소리가 들렸다. 그림자는 침대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현우는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그의 발목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무언가 단단하면서도 끈적이는 것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흐읍!”
현우는 참았던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림자가 천천히 몸을 숙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얼굴 바로 앞에, 차갑고 비릿한 공기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 코앞에서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나가… 지 마.”
아주 작고, 쉰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린아이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늙은 노인의 목소리 같기도 한, 기괴하고 섬뜩한 목소리였다. 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게 끝인가?
‘파지직!’
어둠 속에서 갑자기 침실 스탠드 조명이 켜졌다. 눈앞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림자도, 비릿한 공기도, 차가운 감촉도. 모든 것이 사라졌다. 현우는 벌떡 일어나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는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왔다. 방 안은 아까 전의 암흑이 무색할 만큼 환하게 켜져 있었다. 거실로 나가보니, 거실 불도, 부엌 불도, 모든 불이 켜져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는 비틀거리며 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여전히 미친 듯이 뛰었다. ‘나가지 마.’ 그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응시했다. 꺼져 있던 텔레비전 화면에는 섬뜩한 정지 화면이 떠 있었다. 어두운 배경에, 빨간색 글씨로 또렷하게 쓰여 있었다.
‘넌 이제 여기서 나갈 수 없어.’
그 순간,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끼이이익-‘ 하는 끔찍한 비명 소리가 그의 뇌를 파고들었다. 마치 수십 명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였다.
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 소리는… 이 비명은, 이 집 안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었다.
아파트 건물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였다. 그는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은 여전히 화려했지만, 뭔가 달라져 있었다.
건너편 건물들의 창문마다, 섬뜩한 붉은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비명 소리.
아파트 전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 공포는, 이 기괴한 현상은, 비단 그의 집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었다.
현우는 창문에 이마를 기댔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불빛으로 뒤덮인 도시는 마치 거대한 생물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의 비명 소리가 끝없이 울려 퍼졌다.
그는 조용히 웃기 시작했다. 헛웃음이었다.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는 이 집에서 나갈 수 없었다. 이 도시에서 나갈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나갈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이 거대한 아파트 숲이라는 감옥 안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한 명의 죄수일 뿐이었다.
그때, 거실 한편에 놓여 있던 액자 하나가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깨진 액자 속에는, 현우의 웃는 얼굴이 담긴 사진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유리 조각에 비친 그의 얼굴은, 공포에 질린 채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그 텅 빈 눈동자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붉은 섬광이 번쩍였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 도시 전체가, 그리고 이 아파트 숲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