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균열의 새벽

검푸른 하늘은 늘 그랬듯 잿빛 먼지로 탁했다. 무수한 건물 잔해가 뼈대만 앙상히 남은 채 솟아 있고, 그 사이를 비집고 비틀린 채 자라난 기이한 식물들이 거대한 그림자처럼 흔들거렸다. 유진은 부서진 고층 건물의 옥상 난간에 위태롭게 서서 아래를 굽어봤다. 한때 문명의 융성을 노래하던 이 거대한 도시의 심장은, 이제 영겁의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차갑고 메마른 바람이 뺨을 스쳤다. 바람에는 흙먼지와 함께 오래된 철 녹의 비릿한 향, 그리고 알 수 없는 이계의 것이 섞여 들어간 듯한 불길한 기운이 실려 있었다.
“젠장, 오늘은 물이라도 좀 찾아야 하는데.”
유진은 얇게 갈라진 입술을 혀로 축이며 중얼거렸다. 등 뒤에 짊어진 낡은 배낭은 턱없이 가벼웠고, 그 안에는 말라붙은 육포 몇 조각과 거의 바닥을 드러낸 흙탕물 필터가 전부였다. 식수는 언제나 가장 큰 문제였다.

세상이 ‘그날’ 이후로 변한 지 정확히 몇 년이 흘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늘이 갈라지고, 땅이 뒤틀리며, 메말랐던 영기가 역류하여 괴이한 존재들을 불러냈던 그날. 신선들이 하늘을 가르고 비행하던 시대는 전설이 되었고, 영맥이 흐르던 명산들은 맹독으로 가득한 금지가 되어버렸다. 살아남은 이들은 폐허 속에서 겨우 숨을 쉬고 있었다.

유진은 더 이상 이 황량한 풍경에 감상 따위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살아남는 것, 단 하루라도 더 발을 딛고 서 있는 것이었다. 희미하게 동쪽 하늘에서 영기의 불순한 흐름이 감지되었다. 필시 오염된 물웅덩이거나, 아니면 제법 큰 영수(靈獸)의 서식지일 터였다. 위험했지만, 이 절박한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유진은 옥상 난간에서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어깨에 매달린 낡은 갈고리 밧줄이 휙, 소리를 내며 아래층의 부러진 기둥에 감겼다. 숙련된 움직임으로 건물의 외벽을 타고 몇 층을 단숨에 내려간 유진은 이내 안전한 발코니에 착지했다. 발코니는 원래 화단이었던 듯, 썩은 흙더미만이 황량하게 남아 있었다.
“좋아, 이쪽이 좀 더 빠르겠어.”
유진은 무릎을 굽혀 착지한 충격을 흡수하고, 다시 잿빛 거리로 향하는 통로를 찾아 움직였다.

폐허 속을 지나는 길은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변이된 영수들, 혹은 유진과 같은 생존자들이 언제나 위협이었다. 이곳은 법도도 윤리도 통하지 않는 야만의 땅이었다. 유진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녹슨 단검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비록 영기가 깃든 명검은 아니었지만, 이 단검은 수많은 위기를 함께 해왔던 유진의 유일한 친구였다.

한참을 조심스럽게 움직이던 유진은 목적지 근처에 다다랐을 때 걸음을 멈췄다. 희미하게 감지되던 영기 흐름이 이곳에서부터 짙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땅속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기운이었다. 무언가에 이끌린 듯, 유진의 시선은 부서진 지하 상가의 입구에 꽂혔다. 깊은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으스스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설마 이런 곳에…”
유진은 망설였다. 이런 곳이야말로 변이된 영수들의 은신처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영기가 응집된 곳은 귀한 물건이나 오염되지 않은 자원이 숨겨져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 희박한 가능성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결단을 내린 유진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았다. 발소리가 어둠 속으로 울려 퍼지며 쥐죽은 듯 고요한 지하 공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흙먼지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무언가 썩어가는 듯한 역한 비린내가 뒤섞여 유진의 후각을 자극했다.
지하 깊숙이 내려가자, 좁고 구불거리는 통로가 나타났다. 벽은 진흙과 이끼로 범벅되어 있었고, 천장에서는 불규칙하게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고인 웅덩이에 잔물결을 만들었다. 이곳의 물은 분명 오염되었을 터였다.

그때였다.
콰드득!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뼈가 비틀리는 듯한 기분 나쁜 마찰음이었다. 유진은 반사적으로 단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낮췄다. 온몸의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졌다. 등골을 타고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멀지 않은 곳에서 짙은 녹색의 안광이 번뜩였다. 하나의 눈이 아니었다. 두 개, 세 개, 아니, 셀 수 없는 작은 눈들이 어둠 속에서 유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젠장… 떼거리잖아.”
유진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예상보다 훨씬 위험한 상황이었다.

우르르르!
거대한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기어 나왔다. 그것은 여러 마리의 쥐들이 한데 엉겨 붙어 거대한 덩어리가 된 듯한 기괴한 형상이었다. 쥐들의 몸은 불순한 영기에 오염되어 기형적으로 부풀어 올랐고,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은 금속처럼 번뜩였다. 그중에서도 유독 거대한 한 마리가 선두에 서서 끔찍한 울음소리를 내며 달려들었다. 일명 ‘군체 영서(靈鼠)’, 무리로 움직이는 변이된 영수였다.

유진은 망설일 틈도 없이 발을 굴렀다. 좁은 통로에서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영서 무리는 생각보다 빨랐고, 특유의 불쾌한 영기 파동을 내뿜으며 유진의 기맥을 뒤흔들었다.
쉬익!
가장 먼저 튀어나온 거대 영서가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유진은 몸을 날려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했다. 발톱이 스친 벽에서는 시멘트 조각이 튀어나갔다. 유진은 그대로 몸을 돌려 단검을 휘둘렀다. 콱! 둔탁한 소리와 함께 영서의 다리에 깊은 상처를 냈다. 녹색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상처 입은 영서가 더욱 사납게 날뛰었고, 뒤따르던 수십 마리의 작은 영서들이 동시에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유진은 등 뒤에서 다른 영서가 덮쳐오는 것을 느꼈다.
“크윽!”
재빨리 단검을 휘둘러 등 뒤의 영서를 쳐냈지만, 이미 다른 영서들의 이빨이 유진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얇은 가죽 갑옷이 찢어지고, 살점이 뜯겨나가는 고통이 밀려왔다. 불순한 영기가 상처를 타고 스며드는 불쾌한 감각에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는 안 돼!”
유진은 주위를 둘러봤다. 좁은 통로지만, 주변에 부서진 상가의 진열대 잔해들이 널려 있었다. 유진은 영서 무리의 맹공을 피해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가까이 있던 진열대 잔해를 발로 차 무너뜨렸다. 쾅! 무너진 잔해가 잠시 영서들의 진격을 막아섰다.
그 찰나의 순간, 유진은 정신을 집중했다.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겨우 익힌 초보적인 영기 운용술. 온몸의 기맥을 따라 흐르는 영기를 단검 끝에 모았다. 손잡이가 희미하게 뜨거워졌다.
“하앗!”
유진은 비명처럼 기합을 내지르며 다시 돌진해오는 거대 영서의 머리를 향해 단검을 내리찍었다. 단검 끝에서 섬광처럼 짧은 영기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찌이이잉!
영서의 단단한 두개골이 칼날에 부딪히며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 단검은 겨우 영서의 뇌수를 파고들었다. 거대 영서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이내 축 늘어져 바닥에 쓰러졌다. 녹색 피와 함께 불순한 영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수장이 쓰러지자, 나머지 영서들은 잠시 주춤했다. 유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직 흐트러지지 않은 영기 운용술로 주변의 영서들을 쳐냈다. 그러나 어깨의 상처는 계속해서 고통스러웠고, 불순한 영기가 몸속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더 이상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젠장, 도망칠 곳을 찾아야 해!”

유진은 쓰러진 영서의 시체를 발로 차 벽으로 밀쳐내고, 그 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다행히 영서들이 파고들 수 없는 작은 균열이 있었다. 유진은 그 좁은 틈새로 간신히 몸을 밀어 넣었다. 뒤에서는 영서들이 벽을 긁어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나아갔다. 좁은 통로는 지하 깊숙한 곳으로 계속 이어졌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갑자기 통로가 넓어지며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은 마치 비밀스러운 방 같았다. 사방이 단단한 암반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바닥 중앙에는 부서진 영맥진(靈脈陣)의 잔해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영맥진은 과거, 영기를 끌어모으고 정화하는 데 사용되던 고대의 진법이었다. 이곳에 이런 것이 남아있을 줄이야.

놀라움에 잠시 고통을 잊은 유진은 영맥진에 다가갔다. 진법은 대부분 파괴되어 있었지만, 그 한가운데에서 아주 미약하게, 그러나 순수한 영기 파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뭐야?”
유진의 시선이 영맥진의 중심에 닿았다. 그곳에는 한 송이의 꽃, 아니, 꽃이라기보다는 기이한 형태의 식물이 자라고 있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의 그 식물은 마치 보석처럼 투명한 잎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앙에는 쌀알만 한 작은 씨앗이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씨앗에서는 티끌 하나 없는, 지극히 순수한 영기가 뿜어져 나왔다.

유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세상이 황폐해진 이후, 순수한 영기는 전설 속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모든 영기는 오염되거나 뒤틀려 있었고, 그것을 흡수하려다 오히려 괴물이 되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 이곳, 폐허의 지하 깊숙한 곳에서, 이렇게 순도 높은 영기를 가진 씨앗이 자라고 있다니.
이것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었다. 폐허의 땅에서 홀로 빛나는 작은 희망이었다. 유진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씨앗 주변을 감싸고 있던 미약한 영기 보호막이 유진의 손길에 반응하며 파르르 떨렸다.
유진은 망설이지 않고 씨앗을 조심스럽게 뽑아냈다. 손끝에 닿는 씨앗은 따뜻하면서도 서늘한, 묘한 감각을 전해왔다. 그 순간, 유진의 몸속을 흐르는 불순한 영기가 씨앗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영기와 반응하며 미약하게 요동쳤다. 어깨의 상처에서 느껴지던 불쾌한 통증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유진은 씨앗을 손에 든 채, 텅 빈 공간을 바라봤다. 이 작은 씨앗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것을 키울 수 있을까?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폐허 속에서 겨우 숨 쉬고 있던 유진의 삶에, 이 작은 씨앗이 새로운 균열을 가져왔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이 씨앗이, 절망만이 가득한 이 세계에 다시 영기의 새벽을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유진의 가슴 한켠에 작게 피어났다.
유진은 씨앗을 소중히 품에 넣고, 다시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길을 돌아봤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위험하고, 냉혹하며, 절망적일 터였다. 하지만 이제 유진에게는, 그 모든 것을 견뎌낼 작은 이유가 생겼다.

손에 든 씨앗의 온기가 느껴졌다.
메마른 세상, 그 균열의 새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