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은 거친 숨을 내쉬며 망가진 콘크리트 벽에 등을 기댔다. 십 년. 세상이 뒤집힌 지 정확히 십 년이었다. 하늘은 늘 잿빛이었고, 태양은 희미한 그림자처럼 겨우 제 존재를 알릴 뿐이었다. 녹슨 철골만이 앙상하게 뼈대를 드러낸 고층 빌딩들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 아래, 무너진 잔해들 위로 먼지바람이 춤을 추며 지나갔다. 매번 숨을 쉴 때마다 모래먼지가 기관지를 긁어대는 것 같았다.
“삼촌, 괜찮아?”
어둠에 익숙해진 눈동자로 폐허를 살피던 유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열여섯 살, 이 황폐한 세상에선 어린 나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유나의 얼굴은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처럼 빛나고 있었다.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낡은 천 조각을 꺼내 입과 코를 가렸다. “괜찮다. 그저 여기가 좀 눅눅해서 말이지. 찾으려는 건 아직이야?”
유나는 조심스럽게 파손된 통신 장비의 부품들을 뒤적이며 대답했다. “여기 있던 것들은 전부 고철이야. 멀쩡한 부품이 하나도 없어. 정수기 필터에 필요한 펌프 부품은 더 깊숙이 들어가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정수기. 그들에게 있어 물은 금과 같았다. 오염된 지하수나 빗물을 그대로 마셨다간 며칠을 버티기 힘들었다. 그들의 작은 은신처에 있는 간이 정수기는 생명줄이었다. 그리고 그 생명줄이 지금 멈춰버릴 위기에 처해 있었다.
강현은 지도를 펼쳤다. 낡고 해진 종이에는 손으로 그린 지형과 위험 구역 표시가 빼곡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한때 번화했던 도시의 외곽 구역이었다. 목표는 도시의 중심부, ‘구역 7’이라 불리는 곳에 있는 옛날 공업 단지였다. 공업 단지는 버려진 기계 부품들로 가득할 터였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곳이기도 했다.
“젠장, 구역 7이라니.” 강현의 입술 새로 낮게 욕설이 흘러나왔다.
“거긴 철피견들이 많다고 했잖아.” 유나의 목소리에도 불안감이 묻어났다. 철피견. 변종된 들개 무리였다. 피부는 두꺼운 철판처럼 단단했고, 짐승이라기보다 움직이는 기계에 가까운 괴물이었다. 한번 사냥감을 정하면 끝까지 쫓아오는 지독한 놈들이었다.
“우린 다른 선택지가 없어. 이곳은 이미 샅샅이 뒤져봤고, 다른 곳으로 갈 시간도 부족해. 펌프가 멈추면 이틀 안에 바닥이 날 거야.” 강현은 무거운 배낭을 고쳐 메며 말했다. “만약 놈들과 마주치면… 넌 내가 신호할 때까지 숨어. 알았지?”
유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은 허리춤에 찬 낡은 단검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잿빛 하늘마저 붉은색으로 물드는 순간, 폐허는 더욱 음산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울음소리가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철피견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좀 더 크고, 좀 더 고통스러운, 그러나 동시에 굶주림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강현은 낡은 소총을 단단히 쥐고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삐걱거리는 잔해들을 밟으며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부서진 건물들의 그림자가 그들을 집어삼킬 듯 춤을 추었다. 한때 사무실이었을 공간에는 썩어가는 가구들과 찢겨진 서류들이 뒹굴었다. 벽에는 알 수 없는 핏자국과 함께 긁힌 자국들이 가득했다.
“여기, 뭔가 기분 나쁜데.” 유나가 속삭였다. 그녀의 발밑에 밟힌 것은 오래된 인형의 팔이었다. 머리가 뜯겨나가고 한쪽 눈마저 없는 인형은 이곳의 비극을 웅변하는 듯했다.
강현은 대꾸 없이 주변을 경계했다. 냄새가 좋지 않았다. 썩은 시체 냄새와 녹슨 쇠 냄새, 그리고 흙먼지가 뒤섞인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 냄새는 철피견의 영역에서 자주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한참을 조용히 이동했을까. 마침내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공장 단지의 윤곽이 드러났다. 부서진 담장과 삐뚤어진 간판, 녹슨 굴뚝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저기다.” 강현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안에 부품들이 있을 거야. 유나, 넌 저 폐차량 뒤에 숨어서 대기해.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도망쳐. 절대 돌아보지 마.”
유나는 강현의 굳은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삼촌, 혼자 가는 건 위험해.”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어. 넌 내 뒤를 지켜줄 사람이 없으면 안 돼.” 강현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씁쓸하고 메말라 있었다. “그리고 너까지 다치면 안 되잖아.”
유나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녀는 강현의 말대로 인근의 폐차량 더미 뒤로 몸을 숨겼다. 강현은 그녀가 안전하게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후, 공장 단지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내부는 예상대로 거대한 기계들의 무덤이었다. 녹슨 컨베이어 벨트, 부서진 프레스 기계,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부품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먼지가 자욱했고, 창문 없는 벽 사이로 희미한 빛만이 스며들어 안을 비췄다.
강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눈은 펌프에 맞는 부품을 찾기 위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다 한쪽 구석에서 그의 눈길을 끄는 것을 발견했다.
“저건…”
먼지가 수북이 쌓인 작업대 위에 놓인 낡은 상자. 상자 안에는 여러 종류의 작은 기계 부품들이 뒤섞여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상자를 열자, 그의 눈에 익숙한 형태의 부품이 들어왔다. 정수기 펌프에 꼭 맞는 압력 조절 밸브. 먼지를 털어내자 새것처럼 번쩍이는 금속의 빛이 드러났다. 완벽했다.
그는 부품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바로 그때, 등골이 서늘해지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크르르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 세 마리,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철피견들이었다. 그들은 언제부터 그를 지켜보고 있었던 걸까.
강현은 급히 몸을 돌렸다. 공장 입구 쪽에서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거대한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투박한 철판 같은 피부, 날카롭게 빛나는 송곳니, 그리고 핏빛으로 번뜩이는 눈동자.
놈들은 마치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강현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는 소총을 치켜들었지만, 동시에 절망감에 휩싸였다. 정수기 부품은 손에 넣었지만,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젠장…!”
맨 앞에 선 철피견이 낮은 자세로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강현은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폐허 가득 울려 퍼졌지만, 놈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동료의 울부짖음에 더 광포하게 돌진해왔다.
강현은 간신히 몸을 피하며 다시 한 발을 쐈다. 하지만 놈들의 두꺼운 피부는 총알을 튕겨내거나 약한 상처만을 입힐 뿐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가장 약해 보이는 다리 부분을 노렸다. 한 마리가 비틀거렸다.
그때, 멀리서 또 다른 총성이 울렸다. 강현이 예상치 못한 방향이었다.
*탕!*
가장 가까이 있던 철피견의 머리가 터져나가며 쓰러졌다. 놀란 강현의 눈에 폐차량 더미 뒤에서 총을 든 유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강현의 낡은 소총보다 훨씬 작은 구식 권총을 쥐고 있었다.
“유나! 뭐 하는 거야! 숨어있으라고 했잖아!” 강현은 분노와 동시에 안도감에 휩싸여 소리쳤다.
“삼촌을 혼자 둘 순 없어!” 유나는 이를 악물고 또 한 발을 발사했다. 총알은 빗나갔지만, 놈들의 시선을 잠깐 분산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현은 남은 철피견 중 한 마리의 옆구리를 정확히 노려 쐈다. 놈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이제 두 마리. 하지만 남아있는 두 마리는 더욱 잔혹하게 강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나가 다시 총을 쏘려 했지만, 낡은 권총은 장전이 되지 않았다. 탄창이 비어버린 것이다. 절망적인 표정으로 유나는 총을 던져 버리고 다시 단검을 움켜쥐었다.
“유나! 도망쳐!” 강현은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철피견 한 마리가 유나를 향해 몸을 돌려 달려가기 시작했다.
강현의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그는 남은 한 마리의 철피견을 향해 마지막 총알을 쏟아부으며 달려나갔다. 이대로 유나를 잃을 수는 없었다. 이 망가진 세상에서 그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었다.
절박한 순간, 강현의 소총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탄창을 비웠다. 놈은 쓰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강현에게 달려들어 그의 팔을 물어뜯었다. 살이 찢기는 고통과 함께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크아악!”
강현은 비틀거리면서도 남은 팔로 놈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동시에 유나를 향해 달려가는 마지막 철피견의 등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이었다. 모든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흘러갔다. 유나의 놀란 얼굴, 달려드는 철피견의 거대한 그림자, 그리고 자신의 몸을 꿰뚫는듯한 통증.
그때였다.
갑자기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와 유나에게 돌진하던 철피견을 덮쳤다. 육중한 둔기가 놈의 머리를 강타하는 소리가 폐허에 메아리쳤다. *콰아앙!*
철피견은 한 번의 공격으로 머리가 으스러진 채 쓰러졌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곧바로 강현을 물고 있던 철피견에게 달려들었다. 빠르고 정확한 움직임으로, 거대한 그림자는 놈의 턱을 붙잡고는 일격에 목을 부러뜨렸다.
강현은 고통 속에서도 눈을 크게 떴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때 전투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거대한 기계 병기였다. 낡고 녹슬었지만, 여전히 위압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계 병기의 어깨 위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낡은 방한모를 쓰고 두터운 가죽 코트를 걸친 남자였다. 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들고 있던 투박한 철퇴에서는 피비린내가 풍겼다.
남자는 강현을 힐끗 내려다보더니, 기계 병기를 조종해 유나에게 다가갔다.
“꼬마 아가씨, 무사한가?”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지만, 의외로 걱정이 담겨 있었다. 유나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강현은 팔의 통증을 억누르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당신은… 누구지?”
남자는 강현을 돌아보았다. “나야, 뭐… 그저 길을 잃은 떠돌이 사냥꾼이지.” 그는 기계 병기를 돌려 강현에게 다가왔다. “보아하니 자네도 사냥꾼인 모양인데, 좀 무모하군. 이 구역에선 한 번에 두 마리 이상을 상대하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어.”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기계 병기의 거대한 팔이 강현에게로 뻗어왔다. 강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팔은 그를 공격하는 대신, 그의 품에서 떨어진 정수기 밸브를 집어 올렸다.
“꽤 귀한 물건이군. 이런 위험한 곳까지 올 만한 가치가 있었던 건가?” 남자는 밸브를 살펴보며 말했다.
강현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당신이 뭘 원하는 거지?”
남자는 피식 웃었다. “원하는 것? 글쎄, 딱히 없어. 그저… 동정심이 좀 발동했을 뿐이지. 그리고 자네가 이 도시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는 걸 보고 싶진 않았거든.” 그의 시선은 유나에게 향했다.
유나는 여전히 겁에 질린 표정이었지만, 남자의 말에 천천히 강현의 곁으로 다가섰다.
“어쨌든, 여기서 너무 오래 머무는 건 좋지 않아. 이 소란에 다른 놈들이 몰려들 거야.” 남자는 기계 병기를 돌려 공장 입구를 향했다. “가던 길 가. 그리고 다음번엔 좀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거대한 기계 병기와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강현은 피 흘리는 팔을 움켜쥐고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는 여전히 그 남자를 경계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감정이 마음속을 스쳐 지나갔다.
“삼촌… 우리 정말 살았네.” 유나가 그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직 떨리고 있었지만, 그 속에 작은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
강현은 유나의 손을 꽉 잡았다. 정수기 밸브는 안전하게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방금 나타났던 의문의 남자와 그의 거대한 기계 병기, 그리고 이 세상의 또 다른 위험과 알 수 없는 희망에 대한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생존을 위한 투쟁은,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을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