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잿빛 새벽

차가운 밤공기가 허물어진 도시의 뼈대 사이를 휘감았다. 한때 번성했을 거대한 건축물들은 이제 흉측한 상처 자국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달빛마저 희미한 회색 구름에 가려져, 세상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잠겨들었다. 바람이 찢어진 천막 조각과 깡통들을 나뒹굴게 하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강하준은 숨을 들이쉬었다. 낡은 방한복 사이로 파고드는 한기는 폐부까지 얼리는 듯했지만, 그의 심장은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 비루한 삶의 끝에서, 그들은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 칼이라기보다는 녹슨 쇠막대와 투박한 곡괭이에 가까웠지만, 그들의 절규는 어떤 무기보다도 날카로웠다.

“준비됐어?”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하준은 고개를 돌렸다. 이진아였다. 그녀의 얼굴은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지만, 두 눈만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별처럼 빛났다. 스무 살, 그녀의 어깨에는 세상의 무게가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 무게는 그녀를 꺾는 대신 단단하게 단련시켰다. 진아는 어둠 속에서 손에 쥔 사제 단검의 날을 엄지로 쓸었다. 싸구려 고철을 벼려 만든 칼날이 달빛을 받아 한순간 번뜩였다.

“언제든.” 하준이 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렸지만, 그 속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김노인께서는?”

“뒤에서 대기 중이셔. 신호만 기다리고 계실 거야.”

김노인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였다. 천상의 황금 제국이 세상을 지배하기 이전의 역사를 유일하게 기억하는 몇 안 되는 노인 중 한 명. 그는 이 반란의 불씨를 지핀 장본인이었다. 황금 제국은 온갖 자원을 독점하고, 백성들의 피땀을 착취하며 거대한 성을 쌓았다. 굶주림은 일상이 되었고, 역병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하지만 제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들의 배는 탐욕으로 부풀어 올랐고, 백성들의 절규는 그저 바람 소리에 불과했다.

이제, 그 바람이 폭풍이 되어 불어닥칠 차례였다.

하준의 손끝에 닿은 것은 낡은 지도 조각이었다. 제국군 보급창의 배치도. 진아의 동생, 열여섯 살 혁이가 제국군 병사들의 눈을 피해 목숨 걸고 빼내온 정보였다. 어설프게 그려진 지도를 손가락으로 훑는 하준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보급창 북쪽 외곽에 있는 낡은 환풍구. 보초들의 순찰 경로상 사각지대에 위치한 유일한 침투 지점이었다.

“예정대로 환풍구를 통해 진입한다. 진아, 넌 후방 경계와 엄호를 맡아줘.”

“알겠어.”

그들의 팀은 여섯 명. 대부분이 하준과 진아 또래의 젊은이들이었다. 굶주림에 지쳐 비쩍 마른 몸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절박한 생존 의지와 불타는 분노가 담겨 있었다. 이 임무의 성패는 그들의 내일에 직결되어 있었다. 실패는 죽음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 굶어 죽는 것보다는 싸우다 죽는 것을 택하리라.

허물어진 건물 잔해를 밟고, 그들은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콘크리트 조각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발아래서 ‘바스락’ 소리를 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금 같았다. 제국군 병사들의 검은 그림자가 어둠 속을 배회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그들은 심장을 졸였다. 제국군은 ‘철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검은 제복과 번쩍이는 금속 헬멧, 그리고 등에 매단 자동 소총. 그들의 존재는 평민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마침내 목표 지점, 보급창의 북쪽 벽에 도달했다. 웅장한 철제 담장 너머로 보급창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하자, 녹슨 철제 환풍구가 눈에 들어왔다. 예상대로 환풍구의 고정 나사 몇 개가 느슨해져 있었다. 혁이가 준 정보는 정확했다.

하준은 신호를 보냈다. 두 명의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한 명은 몽둥이를 쥔 건장한 체격의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마른 체구지만 손재주가 좋기로 소문난 소년이었다. 소년은 능숙하게 몽키 스패너를 꺼내들어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끼이익, 쩌억.’ 낡은 금속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조용히 해!” 진아가 속삭였다. 그녀는 사주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소년은 식은땀을 흘리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작업했다. 다행히 근처 보초는 순찰 경로에서 벗어나 있었다. 몇 분 후, 환풍구 덮개가 느슨해졌다. 하준은 조용히 덮개를 떼어내고 안을 들여다봤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역류했다. 환풍구는 폭이 좁고 어두웠지만, 그들의 몸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은 충분했다.

“내가 먼저 들어간다.” 하준이 말했다. “진아는 후방 경계 맡아. 나머지는 내가 내부에서 문을 열면 즉시 진입.”

그는 비좁은 환풍구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먼지와 거미줄이 얼굴에 엉겨 붙었다. 숨쉬기가 답답했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기어갔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어둠 속 터널을 기어 한참 만에야, 하준은 작은 철망에 가로막혔다. 철망 너머로는 거대한 창고의 내부가 어렴풋이 보였다. 산처럼 쌓인 보급 상자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저 안에, 그들의 모든 희망이 담겨 있었다.

철망을 뜯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철망을 떼어내고 바닥으로 착지했다. 발소리가 울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섰다. 창고 안은 어두웠지만, 멀리서 희미하게 비치는 감시등 빛이 길을 안내했다. 그의 손에 쥔 것은 제국군이 버린 낡은 권총 한 자루였다. 총알은 단 세 발. 최후의 순간을 위해 아껴두었다.

목표는 창고 관리실. 이곳의 보안 시스템을 무력화해야 했다. 그는 벽을 따라 몸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콰직.’ 멀리서 쥐 밟는 소리 같은 게 들렸다. 그는 숨을 죽였다. 제국군 병사들의 발소리는 아니었다. 그들의 묵직한 군화 소리와는 달랐다.
하지만 그때였다.

“거기 누구냐!”

하준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보초였다. 그가 보지 못한 사각지대에 보초가 한 명 더 있었다는 말인가?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쿵, 쿵, 쿵.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하준은 어둠 속에 몸을 감춘 채 권총을 겨눴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병사의 손전등 불빛이 어둠을 가르고 그의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검은 제복, 번쩍이는 헬멧. 철벽 부대 병사였다.
“누구냐고 묻잖아! 귀가 먹었나?”

병사가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준은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숨소리마저 낼 수 없었다. 이대로 들키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바깥에서 기다리는 동료들, 김노인, 그리고 굶주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이 산산조각 날 터였다.

그때, 등 뒤에서 희미한 ‘휙’ 소리가 들렸다.
병사의 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는 경악한 눈으로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그의 손전등이 바닥을 구르며 사방을 비췄다. 어둠 속에서 진아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단검은 붉은 피로 번들거렸다. 그녀는 말없이 하준을 응시했다. ‘괜찮아?’라고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침착함은 언제나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괜찮아. 다음부터는 좀 더 조심해야겠어.”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진아가 짧게 콧방귀를 뀌었다.
“내려오길 잘했네.”

진아의 합류로 그들은 다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병사의 시신을 은밀하게 처리하고, 관리실 문을 향해 이동했다. 관리실 문은 전자 잠금장치로 굳게 닫혀 있었다. 하준은 낡은 전선 뭉치를 꺼내들었다. 혁이에게 배운 대로, 그는 능숙하게 전선들을 연결하고 끊기를 반복했다. ‘삐빅, 삐비빅.’ 작은 기계음이 울렸다.

몇 분간의 긴장된 작업 끝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그들은 안으로 들어섰다. 낡은 모니터와 수많은 버튼들이 즐비한 제어판. 하준은 망설임 없이 보안 시스템 해제 버튼을 눌렀다. ‘띠리링!’ 경고음이 울리는 대신, 모든 화면이 초록색으로 변했다.

“성공이야!” 진아가 작게 탄성을 질렀다.
하준은 곧장 외부 문 개방 버튼을 눌렀다. ‘우우웅-‘ 거대한 기계음과 함께 보급창의 육중한 철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찬란한 새벽의 여명이 동쪽 하늘을 옅은 회색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열린 문 밖에는, 그림자처럼 숨어 있던 수십 명의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김노인을 필두로 한 그들의 눈빛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하준은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뒤를 진아가 따랐다.
“동지들! 보아라! 저 안을 보아라!”
그가 외치자, 사람들은 주저 없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보급창 내부는 그야말로 풍요의 보고였다. 제국군이 저장해 둔 곡물 자루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윤기 흐르는 쌀, 튼실한 밀가루, 염장 고기와 통조림. 굶주림에 지쳐 뼈만 남은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떤 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고, 어떤 이는 정신없이 곡물 자루를 끌어안았다. 아이들은 난생 처음 보는 풍성한 먹거리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것이다! 우리의 피와 땀으로 일군 것을 제국이 빼앗아 간 것이었다!”
하준의 목소리는 새벽 공기를 가르고 울려 퍼졌다.
“더 이상 굶주리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의 힘으로 빼앗긴 것을 되찾을 것이다!”

사람들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것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었다. 절망의 끝에서 피어난 한 가닥 희망, 그리고 거대한 제국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작은 확신이었다.

김노인이 앞으로 나와 하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주름진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잘했다, 하준아. 잘했어… 이것이 시작이다.”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국은 그들의 작은 반란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거대한 폭풍이 몰아닥칠 터였다. 하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손에는 빼앗긴 희망이 들려 있었고, 그들의 가슴 속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잿빛 새벽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피와 땀으로 얼룩질 투쟁의 서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