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화: 903호의 균열

지후는 현관문을 열며 피곤에 절은 한숨을 쉬었다. 903호. 매일 같이 드나드는 똑같은 공간인데, 오늘은 유독 낯선 한기가 그의 콧잔등을 스쳤다. 에어컨을 켜지도 않았는데, 마치 얼음장 같은 냉기가 복도 끝에서부터 기어들어오는 듯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 생각 없이 신발을 벗었다.

“하아, 오늘도 버텼다.”

툭,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이었다. 거실 선반 위, 딱히 건드릴 일도 없었던 장식용 크리스탈 해골이 ‘데구르르’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쨍그랑, 하고 깨지지는 않았지만, 바닥에 부딪히며 나는 둔탁한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어? 이게 왜 떨어져?”

지후는 눈을 찌푸렸다. 그는 결벽증까진 아니었지만, 물건 위치는 칼같이 지키는 편이었다. 선반에 올릴 때도 항상 중심을 맞춰 놨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떨어질 리 없었다. 그는 크리스탈 해골을 주워 다시 제자리에 올렸다.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뭔가 찜찜한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 마시려는데, 주방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컵들이 ‘짤그랑’ 소리를 내며 살짝 흔들렸다. 마치 작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후는 고개를 갸웃하며 창밖을 내다봤다. 고층 아파트라 바람이 세게 불면 흔들릴 수도 있지만, 오늘은 창밖 나뭇가지조차 미동도 없었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컵을 다시 제자리에 정렬했다. 착각이라고 애써 외면하려 해도, 묘하게 예민해진 감각이 주변을 맴도는 무언가를 감지하는 듯했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TV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평소 즐겨 보던 뉴스를 틀려는데, 화면이 팟, 하고 켜지자마자 이내 픽, 하고 꺼졌다. 마치 전력이 불안정한 듯했다.

“왜 이래, 갑자기?”

다시 리모컨을 눌러봤지만, TV는 먹통이었다. 거실 전등도 약하게 ‘쉬이익’ 소리를 내며 깜빡거렸다. 지후는 짜증이 치밀었다. 오래된 아파트도 아닌데, 요즘 들어 잔고장이 너무 잦았다.

그는 현관 옆에 있는 두꺼비집을 열었다. 혹시 누전이라도 된 건가. 낡은 스위치들이 가지런히 정렬된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아무런 이상도 발견하지 못한 채 문을 닫으려는데, 등 뒤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

무언가 단단한 것이 바닥에 내리쳐지는 듯한 소리. 마치 천장에서 묵직한 돌덩이라도 떨어진 것 같은 굉음이었다. 지후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던 커피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 놓여 있던 도자기 화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멀쩡하게 서 있던 화병이었다. 누가 들어와서 던진 것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후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방문은 모두 닫혀 있었고, 창문도 굳게 잠겨 있었다. 침입자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 누구 있어?”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섬뜩할 정도로 조용한 침묵 속에서, 지후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때였다. 벽 속에서, 아주 미세하게, 무언가를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드르륵… 드르르륵…

마치 손톱으로 석고보드를 긁는 것 같은, 불쾌하고 신경을 긁는 소리였다. 지후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소리는 거실 벽, 그의 침실과 맞닿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귀를 벽에 갖다 댔다.

드르르륵… 스스슥… 흐읍… 흐읍…

긁는 소리 사이로, 마치 숨을 몰아쉬는 것 같은 소리까지 들렸다. 축축하고 불쾌한 숨소리였다. 지후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벽 안에, 무언가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황급히 벽에서 몸을 떼고 뒷걸음질 쳤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환청일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의 귀를 막아봤지만, 소리는 여전히 그의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벽 너머에서, 그 존재는 점점 더 격렬하게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이제는 벽을 주먹으로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벽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거실 전등은 미친 듯이 깜빡거리다 결국 ‘팟!’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버렸다. 순식간에 거실은 어둠 속에 잠겼다. 창밖 도시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안을 비췄다.

어둠 속에서, 벽의 소리는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르륵… 그르르륵…

이제는 짐승의 목울대에서 나는 듯한 소리였다. 벽이 움찔, 하고 한 번 더 크게 진동했다. 그리고 그 진동과 함께, 벽의 일부가 마치 생물처럼 부풀어 오르는 것을 지후는 똑똑히 보았다. 회색 벽지가 미세하게 들뜨더니, 그 아래에서 무언가 울퉁불퉁한 형체가 꾸물거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지후는 숨을 들이쉬는 것도 잊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현실이 아니었다. 분명 아니어야 했다. 그의 이성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의 육체는 이미 공포에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었다.

부풀어 오른 벽의 한가운데, 아주 작게, 실금 같은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그 틈새로, 검고 축축한 기운이 쉬이익, 하고 새어 나오는 것을 지후는 보았다. 그 기운은 차가웠지만, 동시에 마치 수천 년 동안 억눌려 있던 고대의 힘처럼 거대하고 위압적인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그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퍼져 나가자, 아파트의 모든 가전제품이 한꺼번에 오작동하기 시작했다. 냉장고 문이 ‘덜컹’ 하고 열리고, 인덕션에서는 ‘치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불꽃이 솟아올랐다. 안방에 있던 공기청정기가 미친 듯이 ‘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고, 심지어 보일러실에서도 ‘탕! 탕!’ 하는 굉음이 들려왔다. 아파트 전체가 거대한 생명체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모든 혼돈 속에서, 벽의 균열은 점점 더 벌어졌다.

지후는 뒷걸음질 치다 바닥에 깨진 도자기 파편을 밟고 휘청거렸다. 발바닥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검은 기운에 고정되어 있었다.

쉬이이이익…

검은 기운이 그의 발치까지 스며들자, 바닥의 타일이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정수리를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찾았다…*

고대의 석벽이 갈라지는 듯한,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끔찍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분명 그의 뇌를 직접 울리는 소리였고, 동시에 수천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뒤섞인 듯한 아우성이었다.

지후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의 온몸이 고통스럽게 비틀렸다. 눈앞의 아파트가 일그러지고,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는 듯했다. 그는 팔로 머리를 감싸 안고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그때, 균열 너머에서, 검은 기운 속에서, 무언가 희미한 형체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마치 뼈와 살이 뒤섞인 듯한 기괴한 형상. 그것이 균열을 비집고 나오려는 듯, 벽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지후의 눈앞이 암전 되는 순간에도, 그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이제, 평범한 아파트 903호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 존재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