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또 헛걸음인가.”
지운은 낡은 방진 마스크 너머로 거친 숨을 내쉬었다. 발밑의 자갈과 파편들이 삐걱거렸다. 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우울했고, 저 멀리 병풍처럼 솟아있는 폐허 도시의 윤곽은 찢어진 상처처럼 아물지 않고 있었다. 놈들의 습격 이후, 세상은 한 번도 제대로 된 색을 찾은 적이 없었다.
“오빠, 저기 저 건물은 어때? 왠지 반짝이는 게 있을 것 같지 않아?”
뒤에서 칭얼거리는 목소리. 유나였다. 열 살 남짓한 작은 몸에 비해 과하게 큰 배낭을 메고도 씩씩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저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하나로 여기까지 버텨왔다.
지운은 고개를 돌려 유나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거대한 뼈대만 남은 백화점 건물이었다. 유리창은 진작에 박살 나 떨어져 나갔고, 군데군데 덩굴 식물들이 검은색 콘크리트를 칭칭 감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다른 폐허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유나의 눈빛은 늘 그렇듯 희망으로 반짝였다.
“반짝이는 거라니. 그냥 먼지겠지. 저런 곳은 너무 위험해.”
“그래도! 오빠가 어제 ‘아, 얼음 물 한 잔 마시고 싶다’ 그랬잖아! 저기 혹시 냉장고 같은 거라도 남아있을지 누가 알아?”
유나의 말에 지운은 씁쓸하게 웃었다. 얼음 물이라니. 지금은 흙탕물을 정수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판이었다. 하지만 유나의 작은 바람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지난번 식량 창고에서 간신히 건져 올린 통조림 몇 개가 전부였고, 식수는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알았어. 딱 30분만. 그리고 이상한 소리 나면 바로 도망치는 거야. 알았지?”
“응! 오빠 최고!”
유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지운의 팔짱을 꼈다. 작은 손에 잡힌 지운의 팔은 굳은살이 박힌 거칠고 단단한 팔이었다. 삶의 흔적이었다.
***
거대한 건물의 입구는 한때 화려한 자동문이었을 흔적만 남긴 채 뻥 뚫려 있었다. 강철 프레임은 녹슬어 주저앉았고, 깨진 대리석 바닥에는 흙먼지가 수북했다. 햇빛이 닿지 않는 안쪽은 끈적한 어둠이 깔려 있었다.
“오빠, 불 좀 켜줘.” 유나가 속삭였다.
지운은 주머니에서 낡은 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전방을 비춘 빛은 이끼와 곰팡이로 뒤덮인 벽을 드러냈다. 한때 고급 브랜드의 옷들이 진열되어 있었을 쇼윈도는 산산조각 나 있었고, 마네킹의 부서진 팔다리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스산한 풍경이었다.
“너무 멀리 가진 마. 그리고 발밑 조심하고.” 지운이 경고했다.
유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운의 뒤를 바싹 따랐다. 그들의 발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쳤다. 복도를 따라 걸을수록 공기는 더욱 탁해지고, 퀘퀘한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운은 마스크 너머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런 곳은 호흡기 질환의 온상이나 다름없었다. 괜히 들어왔나, 하는 후회가 스쳤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1층은 잡화와 의류 매장이었다. 온갖 물건들이 뒤엉켜 있었지만, 생존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은 거의 없었다. 찢어진 옷가지, 깨진 화장품 용기, 곰팡이 핀 가방 따위가 전부였다. 지운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낡은 쇠 파이프를 꽉 움켜쥐었다.
“오빠, 저기 봐!”
유나가 작은 손가락으로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벽에 기대어 쓰러져 있는 진열대 사이로 캔 음료수 몇 개가 보였다. 녹슬긴 했지만, 아직 내용물이 새어 나오진 않은 듯했다.
지운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진열대를 들어 올렸다. 캔은 단단히 닫혀 있었고, 유통기한은 진작에 지났겠지만, 지금 당장 마실 물이 없으니 이런 것이라도 감지덕지였다.
“오예! 오빠, 우리 이제 목마르지 않아도 돼!” 유나가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다.
“아직은 몰라. 혹시 상했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 가져가서 확인해야 해.” 지운은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유나의 기대를 꺾고 싶지 않았지만, 괜한 희망은 더 큰 좌절을 가져올 뿐이었다.
그들은 캔 음료 몇 개와 튼튼해 보이는 작업용 장갑 몇 켤레를 챙겼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식수는 여전히 부족했다. 냉장고나 정수 장치를 찾기 위해선 더 깊숙이 들어가야 했다.
“음식 코너는 보통 지하에 있었던 것 같은데…” 지운은 중얼거렸다.
“그럼 지하로 가자! 지하엔 맛있는 게 많잖아!” 유나가 신나서 말했다.
지운은 한숨을 쉬었다. 이 폐허에는 ‘맛있는 것’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열량을 제공할 수 있는 것이면 족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손전등 빛이 닿는 곳 너머는 그야말로 암흑이었다. 눅눅한 공기가 습하게 달라붙었고, 알 수 없는 냄새가 진동했다. 지운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이런 곳이야말로 놈들이 숨어 지내기 좋은 곳이었다.
“오빠… 뭔가 이상한 소리가 나.” 유나가 지운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지운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긁적, 긁적.’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 마치 날카로운 발톱으로 콘크리트 바닥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유나, 조용히 해.” 지운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손에 든 쇠 파이프를 더 꽉 움켜쥐었다.
놈들이었다. 분명했다.
***
손전등 빛이 흔들렸다. 지운의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긁적, 긁적… 끼이익.’ 소리는 이제 훨씬 가깝게 들렸다. 발소리는 아니었지만, 분명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유나는 지운의 등 뒤에 숨어 벌벌 떨고 있었다.
“오빠, 저거 뭐야…?” 유나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갈라졌다.
“아무것도 아니야. 바람 소리일 거야.” 지운은 유나를 안심시키려 애썼지만, 그의 목소리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손전등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붉은 점이 나타났다. 길고 앙상한 다리가 축 늘어진 전선 더미 사이에서 삐져나왔다. 그림자처럼 어둡고, 거미처럼 생긴 거대한 생명체였다.
‘밤벌레.’ 지운은 이를 악물었다. 놈들은 주로 어둡고 습한 지하 공간에 서식하며, 청각에 극도로 예민했다. 그리고… 빠르고 흉포했다.
밤벌레는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다가왔다. 붉은 눈은 마치 사냥감을 조준하는 레이저 같았다. 등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돋아 있었고, 앞다리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한때 백화점 식품 코너였을 공간은 놈의 둥지라도 되는 듯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다.
“유나! 도망쳐!” 지운은 유나를 등 뒤로 밀치며 소리쳤다.
밤벌레가 날카로운 앞다리를 휘둘렀다. ‘쉬이이익!’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섬뜩했다. 지운은 본능적으로 쇠 파이프를 들어 막았지만, 엄청난 충격에 손목이 저릿했다. 놈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쇠 파이프에는 깊은 흠집이 생겼다.
“꺄악!” 유나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운은 밤벌레가 다시 공격해오기 전에 몸을 비틀어 옆으로 피했다. 놈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저대로는 상대가 안 된다. 어린 유나를 데리고 싸울 수는 없었다.
‘도망쳐야 해. 오직 그것뿐.’
지운은 한눈에 주변을 스캔했다. 지하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낡은 비상구가 보였다. 저곳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유나! 저쪽 비상구로 달려!” 지운은 다시 한번 소리치며 밤벌레의 시선을 끌기 위해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놈의 앞다리를 간신히 스쳐 지나갔지만, 놈은 잠시 움직임을 멈칫했다.
그 짧은 순간, 유나는 본능적으로 비상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지운은 유나가 도망치는 것을 확인하고 밤벌레의 공격을 피하며 뒤따랐다. 밤벌레는 지독한 끈기로 그들을 추격했다. 놈의 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울렸다.
‘젠장, 더 빨라!’
비상구 문은 녹슬어 뻑뻑했지만, 지운은 온몸을 던져 문을 열었다. 퀴퀴한 지하 주차장 공기가 확 밀려들어왔다. 그는 유나를 먼저 밀어 넣고 자신도 몸을 던졌다. 쾅! 문이 닫히기 무섭게 밤벌레의 날카로운 발톱이 문을 긁었다. 철문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섬뜩했다.
지운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식은땀이 온몸을 적셨다. 유나는 겁에 질려 울먹이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유나. 우리는 안전해.” 지운은 떨리는 손으로 유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겨우 찾은 캔 몇 개가 바닥에 떨어져 굴러다녔다. 다행히 내용물은 터지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밤벌레가 나타난 이상, 더 이상 그 폐허 안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식수는? 음식은?
지운은 어둠 속 저편을 노려보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치기만 해야 할까. 놈들이 없는 곳은 없었다. 이 황폐해진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매 순간이 전쟁이었다.
“오빠… 우리 이제 어떡해?” 유나의 작은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지운은 쇠 파이프를 다시 꽉 움켜쥐었다. 손목의 통증이 생생했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어쩌긴. 살아남아야지.”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비록 이번 탐사에서 얻은 것은 미미했지만, 그들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있는 한, 희망은 언제든 다시 찾아낼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흙먼지 가득한 지하 주차장을 가로질러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지운은 유나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이 망할 세상에서, 서로의 온기만이 유일한 등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