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고층 빌딩들은 거대한 무덤처럼 침묵했다. 서울의 심장이었던 이곳은 이제 망자들의 울음소리와 피 비린내로 가득한 지옥이었다. 지훈은 녹슨 철근이 삐죽 솟은 보도블록 위를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의 등에는 낡은 배낭이 축 늘어져 있었고, 한 손에는 끈으로 대충 감은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옆에서 걷는 미나는 훨씬 민첩했다. 그녀는 주위를 쉴 새 없이 살피며 부러진 권총 한 자루를 꽉 쥐고 있었다.

“이번에도 꽝이겠지?” 미나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벌써 몇 번째 절이야. 다 털리고 남은 건 먼지뿐일걸.”

“그래도… 혹시 몰라. 여긴 좀 깊숙한 곳이라 아직 손 안 탄 곳이 있을지도.” 지훈은 희망과 체념이 뒤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도시 외곽의 작은 산 중턱에 자리한 오래된 절이었다. 몇 년 전 아포칼립스가 터지기 전에는 등산객들이 가끔 찾는 한적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인적 없는 폐허나 다름없었다.

산길은 수풀로 뒤덮여 겨우 길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멀리서 망자들의 쉰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훈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 소리는 언제나 그의 오장육부를 뒤흔들었다.

절 마당에 도착하자 잡초가 무성했고, 대웅전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삭아버린 나무문에는 거미줄이 잔뜩 엉겨 있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문을 열자 삐걱거리는 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안은 예상대로 텅 비어 있었다. 불단은 비어 있었고, 벽에는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거봐. 아무것도 없잖아.” 미나가 실망한 듯 말했다.

지훈은 대답 대신 구석을 살폈다. 낡고 해진 불경들이 가득했던 책장이 쓰러져 있었고, 그 밑에 뭔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쓰러진 책장과 먼지 쌓인 나무 조각들을 치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작고 낡은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뚜껑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어딘가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이게 뭐야?” 미나가 다가와 상자를 들여다봤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누런 두루마리가 들어 있었다. 종이는 바스러질 듯 낡았지만, 그 위에 검푸른색으로 새겨진 문양들은 놀랍도록 선명했다.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었고, 그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문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거… 한자가 아닌데?” 미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고대 문자 같아.”

지훈은 두루마리를 펼쳤다. 손가락이 문양을 스치는 순간, 싸늘하면서도 묘한 온기가 손끝에 스며들었다. 이질적인 감각에 지훈은 저도 모르게 손을 떼려 했다. 그때였다.

*크아아아악!*

절 바깥에서 찢어지는 듯한 망자의 비명이 들렸다. 여러 마리의 망자들이 절 쪽으로 몰려오는 소리가 빠르게 다가왔다.

“젠장! 어쩌다 들킨 거야?” 미나가 황급히 권총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대웅전 입구를 가리켰다. “뒤로 물러서자! 여긴 막다른 길이야!”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망자 서너 마리가 삐걱이는 대웅전 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썩어 문드러진 살덩이와 핏발 선 눈,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크아아아!”

가장 가까이 다가온 망자가 지훈에게 달려들었다. 부패한 손톱이 그의 목을 향해 뻗어오는 순간, 지훈은 본능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망자에게 휘둘렀다. 정확히 말하면, 두루마리에 새겨진 그 문양들이 망자를 향했다.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두루마리의 문양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푸르스름한 빛이 번개처럼 망자의 몸을 강타했다. 망자는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이어 미끄러운 바닥에 미끄러진 듯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다. 그리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마치 돌이 되어버린 것처럼.

“뭐… 뭐야?!” 미나가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권총을 쥔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훈 역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방금 전까지 덤벼들던 망자는 이제 움직이지 않는 시체가 되어 그들 앞에 나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나머지 망자들이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크아아아!”

망자들의 무리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절 마당에도 수십 마리가 더 몰려든 것 같았다. 대웅전 문턱을 넘어 들어오는 망자들의 수가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지훈아! 망자들이 계속 와!” 미나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녀는 망자 한 마리의 머리를 정확히 노려 쏘았다. 탕! 하는 총성이 좁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쓰러진 망자 위로 다른 망자가 달려들었다.

지훈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피 냄새와 썩은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이러다가는 끝장이다. 문득 그의 시선이 다시 두루마리에 박혔다. 그는 망자를 쓰러뜨렸을 때 느꼈던 그 차갑고도 따뜻한 기운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뭔가 다른 것을 느꼈다.

그래, 그건 마치… 기원의 힘 같은 것이었다. 오래되고, 깊은, 잊힌 염원.

지훈은 두려움 속에서도 두루마리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아까 망자를 향해 휘둘렀던 것처럼, 이번에는 그를 둘러싼 모든 망자들을 향해 두루마리를 높이 들었다.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그는 두루마리의 가장 큰 원형 문양에 손가락을 대고 집중했다.

그 순간, 두루마리 전체의 문양들이 동시에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더 강렬해져 지훈의 손을 타고 그의 몸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활성화되는 듯한 격렬한 감각이 밀려왔다. 그는 뜨거운 기운이 심장에서 솟아올라 팔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크으으으…!” 지훈은 고통과 희열이 뒤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이 대웅전 안을 가득 채웠다. 강렬한 빛의 파장이 모든 망자들을 덮쳤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일부는 몸이 굳어버렸고, 일부는 마치 햇빛을 맞은 밤의 괴물처럼 연기처럼 사라지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미나는 얼어붙은 채 지훈을 바라봤다. 망자들은 혼란에 빠져 이리저리 부딪히고 쓰러졌다. 그들의 썩은 몸뚱이가 푸른빛에 닿을 때마다 경련을 일으키며 재로 변해갔다. 지옥 같던 대웅전 안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망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돌처럼 굳어버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푸른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지훈은 휘청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온몸의 기운이 모조리 빨려 나간 듯한 허탈감과 함께 극심한 피로가 밀려왔다. 두루마리는 다시 빛을 잃은 채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지훈아! 괜찮아?!” 미나가 달려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지훈은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땀과 먼지로 범벅되어 있었지만, 눈빛은 이전과는 달랐다. 두려움 대신, 혼란과 함께 기묘한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그들은 살아남았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미나는 굳어버린 망자들의 잔해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대체… 뭐야? 저 두루마리… 네가 뭘 한 거야?”

지훈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낡고 오래된 종이 조각에서 느껴지는 신비로운 힘. 죽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우연히 발견한 고대의 숨겨진 마법의 힘.

이것은 그들에게 희망일까, 아니면 또 다른 저주일까?

그들의 앞에는 이제 망자들뿐만 아니라, 이 알 수 없는 힘의 진실을 파헤쳐야 하는 또 다른 여정이 펼쳐져 있었다. 지훈은 두루마리를 품에 안았다. 그의 심장이 다시금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미지의 힘이 주는 불안감과 함께, 어쩌면 이 절망적인 세상에 새로운 빛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들의 생존 투쟁은,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