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둑한 그림자가 짙게 깔린 건물 잔해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이서아는 한쪽 무릎을 굽힌 채 낡은 벽 뒤에 몸을 숨겼다. 손에 쥔 녹슨 철근 조각이 축축하게 땀으로 젖었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이 폐허 속에서, 작은 소리 하나도 예사롭지 않았다. 옆을 힐긋 보니, 강하준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었다. 이서아는 작게 혀를 찼다.

“강하준, 조용히 해.”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도 하준은 눈만 끔벅였다. 그의 얼굴은 잿빛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전투에 능한 생존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저 덩치만 큰 말썽쟁이 같았다.

“나, 나도 모르게… 다리가 저려와서….”

“어차피 죽을 거면 좀 멋있게 죽어봐. 저리 비켜.”

이서아는 하준을 등 뒤로 밀어내고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늘 그렇듯 처참했다. 유리 파편이 박힌 길가에는 쓰러진 가로등과 녹슨 차량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과거의 번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오늘의 목표는 식량이었다. 식량이라면 뭐든 좋았다. 한 달 전 겨우 찾아낸 통조림 콩조차 이제는 희귀한 진미가 되어버렸으니.

그녀의 시선이 한 건물에 멈췄다. 허물어진 외벽에 간신히 상호명이 남아 있는 곳. ’24시 슈퍼마켓’. 안쪽은 암흑이었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진열대들이 희망을 속삭이는 듯했다.

“저기, 서아. 저번에 저기 갔다가 쥐떼 봤잖아.”

하준이 뒤에서 칭얼거렸다. 그의 말에 이서아는 눈썹을 찡그렸다.

“그래서? 쥐 떼랑 같이 굶어 죽고 싶어?”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조용히 따라와. 쥐보다 무서운 건 없어, 이 세상에.”

이서아는 쥐보다 훨씬 무서운 것들이 세상에 널렸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하준을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일단 저 슈퍼마켓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생존의 매 순간은 선택과 직면의 연속이었다.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밑에서는 유리 파편이 바스락거렸다. 이서아는 손전등을 켜고 내부를 비췄다. 엉망진창이었다. 진열대는 쓰러져 있고, 물건들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약탈자들이 이미 한바탕 휩쓸고 간 흔적이 역력했다.

“흐읍… 역시 아무것도 없네.”

하준이 김 빠진 소리를 냈다. 이서아는 그를 무시하고 구석구석을 살폈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과자 부스러기나 썩어가는 음료수 병만이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눈이 한쪽 벽 구석에 고정되었다. 진열대가 덮쳐서 생긴 작은 틈새. 그 틈새 사이로 뭔가가 반짝였다.

“하준, 저기 좀 봐봐.”

이서아는 손전등을 틈새로 비췄다. 흙먼지로 뒤덮인 상자들 사이에, 온전히 보존된 듯한 물건이 하나 보였다. 그녀는 주저 없이 다가갔다. 힘껏 진열대를 밀어젖히자, 녹슨 금속이 삐걱거리는 비명을 질렀다. 그 안에서 드러난 것은… 찌그러진 과자 박스 더미 아래 깔려 있던, 작고 네모난 상자였다.

상자 위에는 익숙한 글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〇〇 커피믹스’

하준이 헉 소리를 냈다.

“커, 커피믹스? 서아, 저거 그거 맞지? 우리가 알던 그 커피믹스?”

이서아는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냈다. 먼지를 털어내자, 쨍한 색의 포장지가 드러났다. 겉보기에는 전혀 손상되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유통기한… 유통기한을 봐야 해.”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뒤집었다. 예상대로 유통기한은 훨씬 전에 지났지만, 그래도 온전히 밀봉된 상태였다. 이런 황량한 세계에서, 그 어떤 통조림보다도 귀한 보물이었다.

“대박… 이거 한 박스 다 있는 거야?”

하준이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었다. 이서아는 하준의 손을 찰싹 때렸다.

“만지지 마! 이 귀한 걸.”

“아파라! 귀한 건 알겠는데… 이게 왜 그렇게 귀한 건데? 그냥 커피인데.”

“그냥 커피? 강하준, 너 맑은 물에 뜨거운 물 끓여서 마시는 커피가 어떤 의미인지 알아? 이 얼어 죽을 세상에서!”

이서아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커피믹스는 단순히 카페인 덩어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라진 문명, 사라진 편안함, 사라진 일상의 작은 조각이었다. 사치품 중의 사치품이었다.

“그, 그러네… 물이 없지. 뜨거운 물은 더 없고…”

하준은 금세 풀이 죽었다. 그의 표정에서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본 이서아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방법은 찾아야지. 이거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어.”

그때였다. 건물 바깥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이서아와 하준은 동시에 몸을 움츠렸다.

“뭐, 뭐야? 쥐… 쥐는 저런 소리 안 내잖아?”

하준이 파르르 떨었다. 이서아는 심장이 발끝까지 곤두박질치는 것을 느꼈다. 쥐가 아니었다. 쥐는 이런 진동을 만들지 않았다.

“하준, 조용히 해.”

그녀는 손짓으로 하준을 옆구리 진열대 뒤로 숨게 하고, 자신은 재빨리 입구 쪽으로 향했다. 최대한 소리를 죽이며 바깥을 살폈다.

낡은 슈퍼마켓 앞, 길가에 쓰러져 있던 거대한 금속 조형물이 옆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면서 낡은 나사가 빠져버린 모양이었다. 안심하는 동시에 짜증이 치밀었다. 저 망할 금속 덩어리 때문에 심장이 몇 년은 더 늙은 것 같았다.

“서아, 아무것도 없어?”

하준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것도 없기는. 폐기물 덩어리가 떨어지는 소리였어.”

이서아는 어쩐지 힘이 빠졌다. 그 귀한 커피믹스 상자를 품에 안고 다시 하준에게 돌아갔다.

“그럼… 이 커피믹스 어떻게 할 거야?”

하준이 물었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불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어떻게든 해야지. 우리가 마실 수 있게.”

이서아는 비장하게 말했다. 그날 밤, 그들은 폐허가 된 병원의 옥상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주변의 쓰레기 더미에서 겨우 찾아낸 고철 조각들을 얼기설기 엮어 작은 모닥불을 피웠다. 불꽃은 위태롭게 흔들렸지만, 어둠 속에서 유일한 온기와 빛을 제공했다.

“근데 서아… 물은 어디서 구해?”

하준이 망루처럼 솟아있는 옥상 모서리에 앉아 물었다. 그의 말은 현실이었다. 이 도시에는 더 이상 깨끗한 식수가 없었다. 남아있는 빗물 웅덩이는 각종 오염물질로 탁했고, 지하수는 어디서 뽑아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이서아는 말없이 배낭을 뒤적였다. 낡고 찢어진 천 조각들을 꺼내 들었다.

“이거… 필터로 쓰려고. 며칠 전 비 왔을 때 겨우 모아둔 빗물 있어. 그거라도 걸러야지.”

그녀는 능숙하게 천을 여러 겹 겹쳐 작은 필터를 만들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배낭 속에 숨겨두었던 페트병을 꺼냈다. 투명한 페트병 안에는 흙먼지로 탁해진 빗물이 담겨 있었다.

“어차피 끓일 거니까 괜찮아.”

이서아는 스스로를 다독이며 필터를 통해 빗물을 걸렀다. 몇 번을 반복하자, 흙탕물이던 빗물은 훨씬 맑아졌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기적에 가까웠다.

하준은 신기한 듯 그 과정을 지켜봤다. 그의 얼굴에는 감탄과 함께 어딘지 모르게 미안함이 스쳐 지나갔다. 늘 이서아가 앞장서서 모든 일을 해결했다. 자신은 그저 짐만 되는 것 같았다.

“내가… 불 더 피울게.”

하준이 어색하게 말하며 허둥지둥 주변의 잔해를 모아 불에 던져 넣었다. 불꽃이 ‘화르륵’ 소리를 내며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이서아는 피식 웃었다. 그게 하준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래, 고마워.”

그녀는 작은 냄비에 겨우 정수한 빗물을 담았다. 냄비는 과거 어떤 의무실에서 굴러다니던 의료용품 같았다. 깨끗하게 씻어 말렸지만, 그 낡은 모습은 이 세계의 황폐함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냄비를 불 위에 올리자, 작은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물방울이 냄비 가장자리를 톡톡 치며 끓기 시작했다. 이서아는 조심스럽게 커피믹스 한 봉지를 꺼냈다. 금색 포장지가 불빛에 반짝였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봉지를 뜯어 따뜻한 물이 담긴 냄비에 내용물을 털어 넣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향기가 삭막한 옥상에 퍼져나갔다. 하준은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향기 봐. 미쳤다….”

이서아는 나뭇가지로 냄비 안의 커피를 휘저었다. 갈색 물이 맴돌며 따뜻한 김을 뿜어냈다. 그녀는 낡은 금속 컵 두 개를 꺼내 그 안에 커피를 조심스럽게 따랐다.

“자.”

한 컵을 하준에게 내밀었다. 하준은 떨리는 손으로 컵을 받아 들었다. 뜨거운 온기가 손을 통해 전해져 왔다. 그 온기는 단순한 커피의 온기가 아니었다.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위안과 평화의 온기였다.

하준은 한 모금 마셨다.

“크읍…!”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한 충격이었다. 설탕의 달콤함과 커피의 쌉싸름함, 그리고 아주 미미하게 느껴지는 우유의 부드러움까지. 완벽하게 재현된 맛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 황폐한 세상에서는 더욱 완벽하게 느껴지는 맛이었다.

“서아… 이거 진짜….”

하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가에 옅은 물기가 맺혔다. 이서아는 그런 하준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녀도 자신의 컵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뜨거운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가자, 얼어붙었던 몸과 마음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너무 달지도 않고… 적당히 쓰지도 않고… 완벽해.”

이서아는 눈을 감고 커피 향을 음미했다. 온몸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러게… 우리, 진짜 이거 마시는 날이 올 줄이야.”

하준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격과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어쩌면 그는 이 커피 한 잔에서 과거의 모든 것을 떠올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안전했던 집, 따뜻한 가족, 친구들과의 웃음소리…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기억들.

“우리… 이걸로 건배할까?”

이서아가 조용히 말했다. 하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불꽃처럼 흔들렸지만, 그 안에 강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뭐에다?”

“음… ‘살아남음에 대하여.’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의미에서.’”

이서아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녀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하준은 그녀의 말을 듣고 활짝 웃었다. 그의 미소는 흙먼지로 뒤덮인 얼굴에도 불구하고,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하게 빛났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살아남음에 대하여!’ ‘앞으로도 잘 부탁해, 서아!’”

하준은 자신의 컵을 들어 이서아의 컵에 가볍게 부딪쳤다. ‘쨍’ 하는 맑은 금속음이 폐허의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커피믹스 한 잔이 가져다준 작은 행복은, 어쩌면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들이 살아갈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앞날은 여전히 불확실했지만,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두려움보다 따뜻한 온기가 더 크게 느껴졌다.

강하준은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어둠 속에서 이서아를 바라봤다. 불빛에 비친 그녀의 옆모습은 강인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위태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는 문득,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큰 생존 미션은 다름 아닌 그녀를 지키는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은 그저 어설픈 동료애일 뿐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서아는 그런 하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듯, 그저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모든 피로를 녹여내고 있었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또 다른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