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각인된 복수
김현우는 익숙한 샴페인 잔을 든 채, 그 빌어먹을 미소를 짓고 있는 이진호를 응시했다. 심장이 얼음물에 담긴 듯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 잔인한 유희가 시작된 지 고작 3년, 아니, 현우의 시간으로는 무한에 가까운 절망의 나락에서 허우적대던 수십 년이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숨조차 쉴 수 없던 지옥에서 기적처럼 되돌아온 시간.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성공했구나, 진호야.”
현우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너무나 담담해서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3년 전, 아니, 현우에게는 미래에서 돌아온 지금. 이진호는 여전히 그 ‘혁신적인’ 아이템으로 투자자들을 현혹하고 있었다. 현우의 모든 것을 강탈해 만든, 그의 아이디어와 피와 땀으로 얼룩진 아이템이었다. 이 고급스러운 연회장, 반짝이는 샹들리에, 가식적인 웃음소리들. 모든 것이 현우의 복수를 위한 완벽한 무대였다.
멀리서 현우의 시선을 느낀 이진호가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의아함이, 이내 놀라움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계산된 반가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표정이 연출되었다. 저 가면. 현우는 저 가면 뒤에 숨겨진 탐욕스러운 이빨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현우… 김현우? 네가 어떻게 여기에…!”
진호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다. 두 팔을 벌려 현우를 안으려는 시늉까지 했다. 역겨웠다. 그의 숨결조차도 역겨움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현우는 아무렇지 않은 듯 가볍게 어깨를 감싸는 진호의 손길을 받아냈다. 이 순간을 위해 수없이 연습하고, 수없이 자기 자신을 다그쳐왔다. 감정은 사치였다.
“놀랐나? 나도 네가 이렇게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을 줄은 몰랐네. 하긴, 네가 나섰으니 당연한 결과겠지.”
현우의 말에는 미묘한 비아냥이 스며 있었지만, 진호는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걸지도 모른다. 진호는 원래 그런 인간이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철저히 외면하고, 필요한 것만 쏙쏙 빼먹는 기생충 같은 존재.
“하하, 별말을! 다 네 덕분이지, 현우야. 너의 그…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아니었다면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겠어?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 그때 내가 너무 바빠서 네 옆에 있어주지 못했잖아. 네가 힘들어할 때… 정말 마음 아팠어.”
진호는 진심 어린 척, 그러나 단 한 줌의 진심도 없는 가증스러운 연기를 펼쳤다. ‘네 아이디어’라는 말에 현우의 눈동자가 순간 섬뜩하게 빛났지만, 이내 냉정한 가면으로 덮였다. 진호가 말하는 ‘네가 힘들어할 때’는 정확히 현우가 모든 것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지던 순간이었다. 그때 진호는 현우의 아이디어를 훔쳐 거액의 투자금을 유치하고, 현우의 모든 인맥을 가로채 제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현우는…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모든 것을 잃었다.
“덕분이라니. 그 말은 내가 해야지. 덕분에 깨달은 게 많아.”
현우의 시선이 진호의 손목에 채워진 값비싼 시계로 향했다. 저 시계도, 저 슈트도, 저 잘난 연회장도, 모두 현우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아, 요즘 너무 바빠서 연락도 못 했네. 정말 미안하다. 술 한잔 하자고 했는데 그것도 못 하고… 네가 잘 지내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다.”
진호의 얼굴에 능글맞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현우가 자신을 원망할 힘조차 없는 폐인으로 전락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현우의 비참한 몰락이 그의 성공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테니까.
“이제야 시간이 좀 생겨서 말이야. 덕분에 네 소식도 듣게 됐네.”
현우는 잔에 담긴 샴페인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탄산이 혀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지금 현우의 심장처럼.
“진호야. 너 혹시… 요즘 사업 확장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사실이야?”
현우의 질문에 진호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아직 외부에 정식으로 발표한 건 아닌데… 현우, 너 정말 정보력이 빠르구나! 맞아. 중국 시장 진출을 준비 중이야. 아주 큰 프로젝트가 될 거야.”
진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오만함이 뒤섞여 있었다. 마치 자신의 성공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어리석은 자의 그것이었다.
“그래. 중국 시장이라… 쉽지 않을 텐데. 내가 아는 한, 그쪽 시장은 꽤 까다롭다고 들었어. 특히 요즘 같은 시기에는 더더욱.”
현우는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말에 진호의 얼굴에서 순간 미소가 사라졌다. 현우의 눈에는 진호의 불안한 눈빛이 선명하게 읽혔다. 진호는 자신의 성공에 너무 도취되어 있었다. 불안은 그를 잠식하고 있었다. 현우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미래에서 온 현우는 진호가 바로 이 중국 시장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러 한순간에 몰락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음… 뭐, 물론 쉽지는 않겠지. 하지만 우리 팀이 워낙 뛰어나서 말이야. 그리고 이미 유력한 투자처도 확보해 뒀어.”
진호는 애써 평온한 척했지만, 그의 눈은 현우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우는 씨익 웃었다.
“그래? 다행이네. 그런데 말이야, 진호야.”
현우는 진호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어두웠다.
“내가 최근에 아주 흥미로운 투자 제안을 하나 받았거든. 중국 시장과 관련된 건데… 네가 하는 프로젝트랑 혹시 관련이 있을까 해서 말이야.”
진우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그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현우의 정보력에 놀란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하는 것일까?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현우, 너 설마…?”
“하하. 내가 뭘? 그냥 궁금해서. 하지만 네가 괜찮다면, 그 투자처와 한번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좋겠네. 내가 아는 몇몇 사람들은 이미 그쪽 프로젝트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것 같던데.”
현우는 일부러 모호하게 말했다. 진호는 완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현우의 말에 그의 중국 진출 프로젝트에 대한 불확실성과 경쟁 심리가 뒤섞여 폭발했을 것이다. 현우의 ‘아는 사람들’은 누구이며, ‘그쪽 프로젝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호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불확실성이 그의 심장을 갉아먹기 시작할 것이다.
“아니, 현우.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대체… 뭘 아는 거지?”
진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가면 뒤에 숨겨진 균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시작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준비한 복수의 서막이었다. 그는 진호의 가장 큰 야망이자 약점인 중국 진출 계획에 첫 번째 칼날을 꽂아 넣었다.
“글쎄.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지. 하지만 알게 되겠지, 진호야.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을.”
현우는 마지막 한 모금의 샴페인을 마저 들이켰다. 그의 눈빛은 섬뜩할 정도로 차가웠다. 진호는 마치 거대한 심연을 마주한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그의 화려한 성공의 표면에 현우가 던진 작은 돌멩이가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현우는 말없이 뒤돌아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잔혹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래, 진호야. 너는 이제 막 시작된 이 게임의 규칙조차 모르겠지.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너는 네가 쌓아 올린 모래성 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을 때,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게 될 거야. 내가 겪었던 절망보다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복수는, 이제 시작되었다.
두 번째 기회, 첫 번째 칼날은 정확하게 박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