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아직 채 걷히지 않은 새벽, 핏빛 여명이 희미하게 깔린 대지 위로 찬 서리가 소복했다. 전날 밤을 새워 이어진 긴급 회의 탓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새봄은 창밖의 풍경을 무거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창살 너머로는 폐허가 된 마을이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검게 그을린 지붕들, 무너져 내린 벽들, 그리고 그 잔해 위로 위태롭게 흔들리는 제국의 깃발. 검은 독수리가 붉은 바탕 위에서 교만하게 날개를 펼친 그 깃발은, 이곳 사람들의 희망을 짓밟고 영혼을 파먹는 피에 젖은 송곳니와 같았다.
“젠장… 또다시 이런 꼴이라니.”
나지막이 읊조린 그녀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이 뒤섞여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낡은 펜던트가 차갑게 느껴졌다. 밤마다 품에 안고 잠들던 이 펜던트가, 언젠가는 세상을 바꾸어 줄 마법의 열쇠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순진하고 어리석었던 믿음.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난 것은 불과 몇 달 전이었다. 제국군이 마을을 덮쳤던 그날, 어린 동생은 싸구려 인형 하나를 움켜쥔 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끌려갔다. 그때 새봄의 마음속에 타오른 것은 펜던트에 깃든 빛이 아니라, 제국에 대한 뜨거운 증오와 복수의 불꽃이었다.
“새봄, 아직 깨어 있었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에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반란군의 맏형이자 정신적 지주인 혁이었다. 그의 얼굴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지만, 강직한 눈빛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
“밤새도록 잠이 오지 않았어요. 저 깃발이, 저 독수리가 제 눈앞에서 사라지기 전까지는 편히 잠들 수 없을 것 같아요.”
새봄의 목소리에는 날 선 가시가 돋쳐 있었다. 혁은 묵묵히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래, 이해한다. 나 또한 그렇다. 그러나 분노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가운 이성과 불굴의 의지다.”
“차가운 이성으로 제국군을 막을 수 있나요? 불굴의 의지로 빼앗긴 아이들을 되찾을 수 있나요?”
새봄은 혁을 향해 따지듯이 물었다.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맺혔지만, 억지로 참아냈다. 혁은 한숨을 쉬며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결국엔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그전에, 네가 가진 힘을 제대로 다룰 줄 알아야 해. ‘빛의 수호자’여, 너의 힘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다. 너는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희망이다.”
빛의 수호자. 제국의 폭정 속에서 평범한 소녀였던 새봄이 마법의 힘을 각성하며 얻은 이름이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녀의 펜던트는 더욱 강렬하게 빛났고, 그녀의 몸에는 신비로운 마법 갑옷이 둘러졌다.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어둠을 찢어발기고, 희망을 심어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때,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빠르게 다가오는 기마병들의 그림자가 포착되었다. 제국군이었다.
“젠장, 또 온 건가!” 혁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혁 오빠! 이쪽은 제가 맡을게요. 다른 분들은 아이들과 노인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켜 주세요!”
새봄은 결심한 듯 혁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낡은 오두막집 문을 박차고 나서는 순간, 그녀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손에 든 펜던트가 강렬하게 빛나며 공중으로 떠올랐고, 그 빛은 이내 그녀의 전신을 감쌌다. 낡은 옷은 순백의 마법 갑옷으로 변했고, 머리에는 빛나는 보석이 박힌 티아라가 얹혔다. 그녀의 눈은 푸른빛으로 빛났고, 그 안에 깃든 의지는 어떤 강철보다도 단단해 보였다.
*나는 새봄, 빛의 수호자! 이 땅의 평화를 지키는 자!*
“멈춰라, 제국의 개들!”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며 황량한 대지를 흔들었다. 선두에서 달리던 제국군 기마병들이 당황하며 말의 고삐를 당겼다. 그들은 그녀의 모습을 알아본 듯했다. 제국군의 잔혹한 학살 속에서도 홀로 나타나 저항하는 소녀. 괴담처럼 떠돌던 ‘빛의 마녀’가 바로 그녀였다.
“저게 바로 그 마녀다! 붙잡아라! 산 채로 잡으면 황제 폐하께서 상을 내리실 것이다!”
제국군 장교의 목소리가 터지자, 기마병들은 일제히 창과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수십 명에 달하는 기마병의 돌격은 거대한 파도와 같았다. 하지만 새봄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우리를 짓밟게 두지 않을 거야!”
그녀의 손에서 눈부신 빛의 창이 형성되었다.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농부들의 땀과 피, 어린아이들의 눈물이 응축된 절규의 빛이었다. 새봄은 가볍게 몸을 회전하며 빛의 창을 던졌다.
쉬이이익-!
빛의 창은 공기를 가르며 맹렬한 속도로 날아갔고, 선두에 서 있던 제국군 병사들의 방패를 산산조각 냈다. 연이어 터져 나오는 빛의 폭발이 기마병들의 대열을 흐트러트렸다. 말들이 놀라嘶고, 병사들이 낙마하며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제국군은 숫자가 많았다. 곧바로 정신을 차린 병사들이 사방에서 그녀를 포위하려 들었다. 그들의 창끝과 검날은 살벌한 빛을 반사했다.
“겨우 이 정도로는 나를 막을 수 없어!”
새봄은 몸을 낮게 숙이며 순식간에 적진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몸에서 빛의 파동이 터져 나오자, 주변의 병사들이 충격에 휩싸여 나가떨어졌다. 그녀는 마치 춤을 추듯이 우아하게 움직이며, 적들의 공격을 회피하고 반격했다. 손짓 한 번에 빛의 칼날이 형성되어 적들의 무기를 부러트리고, 발차기 한 번에 빛의 방패가 생겨나 공격을 막아냈다.
“크아악!”
“내 눈이!”
병사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그녀의 빛은 단순히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눈을 멀게 하고 정신을 교란시키는 효과도 있었다.
어느새 제국군 장교가 뒤에서 거대한 양손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감히 건방진 계집이!”
날카로운 검날이 새봄의 옆구리를 향해 맹렬하게 내려찍혔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새봄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녀의 펜던트가 더욱 강렬하게 빛을 뿜었고, 그녀의 몸을 감싼 마법 갑옷이 순식간에 두터워졌다.
콰아앙!
강철과 강철이 부딪히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장교의 검은 갑옷에 깊은 흠집만 남긴 채 튕겨 나갔다. 새봄은 아픔을 참고 반격했다. 그녀의 주먹에 빛의 기운이 모여들었고, 그 빛은 마치 작은 태양처럼 빛났다.
“이건, 동생의 눈물이다!”
그녀의 주먹이 장교의 안면을 강타했다. 억겁의 세월이 응축된 듯한 충격이 장교의 몸을 관통했다. 장교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수십 미터를 날아가 거대한 바위에 처박혔다.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바위가 깨지고, 장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전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남은 제국군 병사들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교만함이나 잔혹함이 아닌, 순수한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돌아가라. 그리고 전해라. 빛의 수호자는 이 땅에서 제국의 독수리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새봄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다. 병사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채 말에 올라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숨을 헐떡이며 지쳐 쓰러진 새봄은 자신의 몸에서 빛의 기운이 빠져나가며 마법 갑옷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낡은 옷으로 돌아온 그녀의 몸은 여기저기 멍들고 긁혀 있었다. 그래도 그녀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적어도 오늘은, 마을 사람들이 안전했다.
혁이 황급히 달려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나, 새봄! 무리하지는 않았느냐?”
“네, 오빠. 이 정도는… 아직 괜찮아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멀리 보이는 제국의 수도, ‘검은 성’을 바라보았다. 검은 독수리 문양이 박힌 거대한 성벽은 마치 불길한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만… 저 성을 무너뜨리려면 아직 갈 길이 멀어요. 우리는 고작 작은 승리 하나를 얻었을 뿐이잖아요.”
혁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래, 아직 멀다. 하지만 이 작은 승리들이 모여 거대한 파도를 만들 것이다. 너는 그 파도의 시작이다, 새봄. 너의 빛은 결코 꺼지지 않을 테니까.”
새봄은 혁의 말을 들으며 펜던트를 꽉 움켜쥐었다. 여전히 차갑고 낡은 펜던트였지만, 이제는 그녀의 손바닥 안에서 희미하게나마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의 심장 속에서,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가 다시금 타오르고 있었다. 제국의 어둠 속에서, 한줄기 희망의 빛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