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의 서막
밤은 깊었고, 은신처 지하 공기는 눅눅했다. 류진은 낡은 철제 책상에 팔꿈치를 기댄 채 코앞의 모니터들을 응시했다. 빛바랜 화면들이 그의 얼굴에 푸른 그림자를 드리웠다. ‘야명단’이라는 이름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자들을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둠이 그들의 숨통을 조여오는 듯했다.
“젠장, 속도가 더 안 나.” 세라가 키보드를 격렬하게 두드리며 중얼거렸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려 콧등에 맺혔다. 그녀 앞에는 황궁 데이터 저장고에서 막 빼내온 암호화된 데이터 덩어리가 춤추고 있었다. 제국의 심장부를 꿰뚫는 데 성공한 건 기적에 가까웠지만, 그 기적의 대가가 무엇일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시간 없어, 세라. 제국 놈들이 눈치채는 건 시간문제야.” 류진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불안감을 내비치지 않으려는 필사적인 노력처럼 들렸다. 등 뒤에서는 한솔이 묵묵히 통신망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굳어 있었다.
“잠깐, 이거… 이상해요.” 세라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녀의 눈이 모니터 화면의 특정 코드 블록에 고정되었다. “해독된 데이터 안에… 뭔가 섞여있어요. 우리 것과 비슷한 암호화 방식인데… 설마.”
류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는 세라의 어깨 너머로 화면을 들여다봤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틀리는 법이 없었다. 화면에는 야명단 내부에서만 쓰이던 특유의 통신 프로토콜 흔적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제국군 정보부의 정교한 데이터 필터링 태그가 따라붙었다.
“맙소사…” 한솔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놈들이… 우리 통신망을 타고 들어왔던 건가? 대체 언제부터?”
세라가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번에는 해독이 아니라, 침입 경로를 역추적하는 작업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건… 우리가 황궁 서버에 접속한 순간부터가 아니에요. 훨씬 이전부터… 침투해 있었어요.” 세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내부에… 제국 놈들의 첩자가 있었던 거야.”
그 순간, 지하 은신처 전체를 뒤흔드는 진동이 느껴졌다. 멀리서부터 쿵,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지하로 울려 퍼졌다. 발소리가 아니었다. 중장비, 아니면… 무언가 거대한 것이 지상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젠장! 한솔, 차단막 올려!” 류진이 소리쳤다.
한솔은 망설임 없이 벽에 박힌 비상 레버를 잡아당겼다. 육중한 강철문이 굉음을 내며 내려오기 시작했지만, 이미 늦었다.
지상에서 터져 나온 굉음이 은신처의 철근과 콘크리트를 뒤흔들었다. 천장에서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흙먼지가 떨어졌다. 그리고 세라의 모니터들이 일제히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외부 통신망에서 울리는 비상 경고음이 지하를 가득 채웠다. 제국군 특수부대의 신호였다. 그들이 사용하는 특유의 암호화된 주파수가 스피커를 통해 지직거렸다.
“붉은 눈동자… 그놈들이 벌써 여기를 포위했어!” 세라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화면에는 주변 구역에 빠르게 배치되는 제국군 특수부대의 열영상 잔상들이 포착되고 있었다. 완벽한 봉쇄였다.
“이 쥐새끼들, 이번엔 잡았다!”
은신처 입구를 지키던 감시병의 다급한 비명이 통신망을 타고 들려왔다. 잠시 후, 섬광과 함께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젠장! 후방 통로로 이동한다!” 류진이 외쳤다. “한솔, 세라! 자료는?”
세라가 급히 손에 쥔 데이터 칩을 들어 보였다. “핵심 자료는 옮겼어요! 하지만 전부 해독하려면 시간이…!”
“이걸 들고 빠져나가야 해. 이건 제국 놈들이 감추려던 진짜 정보야. 단순히 반란군 동향이 아니라고!” 류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들 내부에 첩자가 있었다는 사실이 뼈아팠지만, 지금은 그것을 곱씹을 때가 아니었다.
“내가 엄호할 테니, 너희는 먼저 도망쳐!” 한솔이 허리춤의 폭약 벨트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의 표정은 이미 결의에 차 있었다.
“안 돼! 팀은 함께 움직인다!” 류진이 그의 말을 끊었다. “여기서 우리가 흩어지면, 잡힐 거야. 우리가 아는 탈출로는 전부 차단되어 있을 테니, 역으로 움직인다!”
그는 벽에 걸린 도시 지하 배수로 지도를 뜯어냈다. 제국 놈들이 쥐새끼처럼 자신들의 지하를 파고들었다면, 류진은 그 쥐들이 파놓은 길을 역이용할 생각이었다.
“세라, 이 데이터 칩 절대 잃어버리지 마. 이 안에 놈들의 진짜 얼굴이 담겨 있어. 한솔, 폭약을 터뜨려! 이 은신처는 놈들의 무덤이 될 거야.”
둔탁한 폭음이 이어졌다. 은신처의 구조가 흔들리고 일부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폭연과 먼지가 순식간에 시야를 가렸다. 혼란을 틈타 세 사람이 미리 파놓은 비상 통로로 몸을 던졌다. 좁고 축축한 통로, 하수구의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것은 자유의 냄새와 다름없었다.
“젠장, 저들이 우리가 여기로 올 줄 알았나 봐!”
앞서 달리던 세라의 외침이 들렸다. 좁은 통로 끝, 희미한 비상등 불빛 아래로 제국군 특수부대원 두 명이 차가운 눈빛으로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놈들의 갑옷은 지하의 먼지 속에서도 붉은색 제국 문장을 선명히 드러내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라, 야명단의 잔당들!”
류진은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정면 돌파는 불가능했다. 놈들은 이미 모든 길목을 읽고 있었다. 어쩌면 그 첩자가 이 모든 계획의 핵심을 넘겼을지도 모른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통로 벽면에 흐르는 녹슨 파이프와 그 너머의, 불확실한 어둠이었다.
“한솔! 세라! 파이프 타고 올라가! 난 놈들의 시선을 끌겠다!”
“류진! 안 돼!” 한솔이 외쳤지만, 류진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섬광탄을 꺼내 던졌다. 동시에 총을 뽑아들고 제국군 특수부대원들을 향해 난사했다. 놈들의 엄폐 사격이 류진이 서 있던 통로를 갈가리 찢었다.
“빨리! 이 자료는… 이 자료는 꼭 지켜야 해!”
그는 다시 한 번 외쳤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진동은 은신처가 완전히 붕괴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류진은 마지막 남은 총알을 발사하며, 무너져 내리는 콘크리트 잔해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눈은 불확실한 어둠 속에서 사라지는 한솔과 세라의 희미한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통로가 완전히 붕괴되기 직전, 류진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제국군 특수부대원의 교신 소리를 들었다.
*…야명단 지도부, 생포 성공. 일부 잔당, 추격 중. 코드네임 ‘뱀’의 정보가 정확했다…*
류진의 눈에 섬광이 스쳤다. 뱀. 그 이름은 제국 놈들의 입에서 나오지 않아야 할 이름이었다. 그것은 야명단 최고위층만이 알고 있는, 내부 정보 교환용 코드네임 중 하나였다.
천장이 완전히 무너지며 그의 시야가 어둠에 잠겼다. 류진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으려 했지만, 닿은 것은 차갑고 단단한 바위뿐이었다. 그의 몸은 거대한 힘에 짓눌려 깊은 어둠 속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한 조각의 의문과, 놈들의 심장부에 박힌 뱀의 존재에 대한 끔찍한 확신뿐이었다.
그리고 멀리서, 세라가 품에 꼭 쥐고 달아나는 데이터 칩 속에서, 제국의 검은 그림자가 조용히 미소 짓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