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회색빛 노을이 지는 서울의 잔해 속에서 김진우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밟고 서 있었다.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이제 거대한 유골처럼 앙상하게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고, 흙먼지와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바람에 쓸려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그의 눈은 지평선 끝에 솟아오른 거대한 강철 숲, ‘구역 7’이라 불리는 옛 도심을 향했다. 그곳은 위험으로 가득했지만, 동시에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젠장, 또 배고파지기 시작했군.”

진우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중얼거렸다. 허리춤에 찬 낡은 등산용 칼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목표는 구역 7 외곽에 있는, 반쯤 기울어진 백화점 건물이었다. 소문에 따르면, 그곳 지하 창고에 아직 마실 수 있는 물과 통조림이 남아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물론 소문일 뿐이지만, 그의 등 뒤에 걸린 낡은 배낭은 거의 텅 비어 있었고, 더 이상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진우의 뺨을 스쳤다. 피부에 닿는 감각이 바늘처럼 따가웠다. 세계가 ‘그 날’ 이후로 얼마나 변했는지 그는 매일같이 체감했다. 공기는 예전 같지 않았고, 보이는 모든 것은 녹슬거나 부패했다. 가장 큰 문제는,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것들이었다. 진우는 허리춤에 찬 작은 섬광탄 두 개를 확인했다. 비상용으로 아껴둔 최후의 수단이었다.

쿵, 쿵.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둔중한 발소리에 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낮췄다. 무너진 버스 차체 뒤에 숨어, 시선을 고정했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기 직전, 회색빛 잔해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키는 족히 3미터는 넘어 보였고, 뒤틀린 팔다리에는 울퉁불퉁한 근육이 흉측하게 솟아 있었다. 녀석의 머리는 원래 인간이었을 부위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형되어 있었고, 입에서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살자’. 생존자들이 붙인 이름이었다. 힘만 센 게 아니라, 밤눈이 밝아 어설픈 은신은 통하지 않았다.

진우는 숨을 죽였다. 그의 능력은 다른 생존자들에 비해 특별한 편은 아니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사물에 닿는 순간 아주 미약한 잔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는 정도였다. 그 능력으로 진우는 위험한 붕괴 직전의 건물을 피하거나, 숨겨진 물자를 찾아내곤 했다. 지금은 도살자의 기척을 느끼는 데 집중했다. 녀석의 발걸음에서 느껴지는 둔중한 ‘흐름’이 강했다. 살아있는 살덩어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혐오스러운 기운.

도살자는 잠시 멈춰 서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진우는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혹시 냄새라도 맡았나? 그는 최대한 숨을 들이쉬지 않고, 주변의 흙먼지 냄새와 녹슨 쇠 냄새에 집중했다. 다행히 녀석은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몸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진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도살자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진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이 등에 흘렀지만, 그는 평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살아남으려면 언제나 침착해야 했다. 그는 다시 백화점 건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는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밤이 완전히 찾아오면, 도살자 같은 거대한 변이체들뿐만 아니라 훨씬 작고 교활한 ‘그림자 추적자’들이 기어 나올 터였다.

백화점 건물 앞은 거대한 쇼핑 카트 무덤처럼 변해 있었다. 진우는 부서진 입구를 통해 안으로 들어섰다. 건물 안은 바깥보다 더 어두웠다. 낡은 플라스틱과 금속 파편, 찢어진 옷가지들이 뒹굴었다. 한때 화려했을 내부 장식은 곰팡이와 이끼에 뒤덮여 있었다. 진우는 등산용 칼을 손에 쥐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특수 능력, ‘잔류 감각’이 희미하게 빛났다. 바닥을 이루는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물에서 불안정한 흐름이 느껴졌다. 건물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한 상태였다.

“지하 창고… 지하 창고…”

진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층계를 찾았다. 계단은 대부분 붕괴되거나 잔해에 막혀 있었다. 그는 몇 개의 층을 더듬어 올라갔다가, 간신히 직원용 비상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은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고,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온 건물을 울리는 듯했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디뎠다. 그의 잔류 감각이 계단 구조물에서 느껴지는 불안정한 기운을 계속해서 경고하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문을 찾았다. 두꺼운 강철 문은 녹이 슬어 있었고,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었다. 아마도 다른 생존자들이 이미 다녀갔거나, 아니면 녀석들이 만들었을 흔적이었다. 진우는 문에 귀를 대고 잠시 기다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칼날로 문틈을 벌려보려 했지만, 굳게 잠겨 있었다.

“쳇.”

진우는 주변을 살폈다. 낡은 소방 도끼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도끼를 들어 올렸다. 무게감이 상당했지만, 충분히 쓸 만해 보였다. 그는 도끼로 문의 잠금장치 부분을 여러 번 내리쳤다. 꽝! 꽝! 둔탁한 소리가 지하 통로를 진동시켰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잠금장치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어둠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지하에서는 썩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훨씬 강하게 풍겼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디뎠다. 그의 잔류 감각이 발동했다. 이곳의 공기에서 느껴지는 ‘흐름’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수많은 생명체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복잡하고 불안정한 기운이 감돌았다.

“젠장, 설마…”

진우는 손에 든 소방 도끼를 고쳐 쥐었다. 그는 지하 창고 내부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의 발소리는 먼지 쌓인 바닥에 부딪혀 희미한 메아리를 만들었다. 이내 그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졌고, 창고 내부의 풍경이 드러났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거미줄처럼 뒤엉킨 촉수들이 사방을 뒤덮고 있었다. 촉수들은 벽과 선반, 그리고 낡은 상자들을 감싸고 꿈틀거렸다. 촉수들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것은 인간의 것으로 보이는 해골들이었다. 섬뜩한 광경에 진우는 저절로 침을 삼켰다. 그리고 그 촉수들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덩어리가 맥박치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심장처럼 꿈틀거리는 그것은, 끈적이는 점액질로 뒤덮여 있었다. ‘부패한 핵’. 진우는 그 이름을 떠올렸다. 세계 붕괴 이후 나타난 기이한 생명체 중 하나로, 주변의 생명 에너지를 흡수하고 변이체를 만들어내는 존재였다.

부패한 핵 주변에는 수십 마리의 ‘지하 거미’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녀석들은 거미라기보다는 거대한 게와 흡사했다. 단단한 껍질에 여섯 개의 다리가 달렸고, 등에는 날카로운 가시들이 솟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녀석들의 수많은 눈들이 진우를 향해 일제히 빛났다.

“빌어먹을…”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이곳에 물자가 있긴 했지만, 이렇게 위험한 곳일 줄이야. 하지만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물은 생명이었고, 그는 물이 절실했다. 그는 소방 도끼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퇴로는 이미 막혀 있었다.

쾅!

지하 거미 중 한 마리가 진우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의 다리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했다. 진우는 재빨리 몸을 옆으로 피했다. 거미의 다리가 그가 서 있던 자리를 찍어 눌렀다. 바닥이 움푹 파였다. 진우는 그대로 몸을 돌려 도끼를 휘둘렀다. 날카로운 도끼날이 거미의 다리 하나를 정확히 내리쳤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거미의 다리 하나가 잘려 나갔다. 녀석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다른 거미들이 사방에서 진우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많은 수를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진우는 잠시 망설였다. 배낭 속에 남아있는 섬광탄을 써야 할 때인가? 그는 물자를 찾아내야만 했다.

갑자기 그의 잔류 감각이 한쪽 선반에서 강렬한 ‘흐름’을 감지했다.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른, 깨끗하고 안정적인 흐름. 그는 그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촉수와 거미들 사이, 겨우 손이 닿을 만한 선반 위에 놓인 낡은 금속 상자. 그곳에서 흐름이 느껴졌다. 물, 혹은 식량일 가능성이 높았다.

“좋아, 저거다!”

진우는 결심했다. 그는 섬광탄 하나를 꺼내 안전핀을 뽑았다. 동시에 가장 가까이 있는 거미에게 달려들었다. 거미는 거대한 집게발을 휘둘렀지만, 진우는 놀라운 민첩성으로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는 거미의 등껍질을 밟고 뛰어올라, 촉수들이 뒤엉킨 천장 쪽으로 몸을 날렸다.

거미들은 혼란에 빠져 진우를 쫓아 위로 뛰어오르려 했지만, 진우는 이미 섬광탄을 던진 뒤였다. 섬광탄은 부패한 핵 근처에서 터졌고, 폭발과 함께 눈을 멀게 하는 강력한 빛이 지하 창고를 가득 채웠다.

크아악!

수십 마리의 지하 거미들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빛에 익숙지 않은 녀석들은 방향 감각을 잃고 서로에게 부딪히거나, 벽에 부딪혔다. 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섬광으로 눈을 가린 채, 잔류 감각에 의지하여 금속 상자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촉수들을 칼로 베어내며 상자까지 도달했다. 끈적이는 촉수들이 그의 팔에 감겨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상자를 붙잡았다.

상자는 꽤 무거웠다. 그는 상자를 품에 안고 다시 몸을 돌렸다. 섬광탄의 효과는 길지 않았다. 지하 거미들이 서서히 눈을 뜨기 시작했고, 분노로 가득 찬 붉은 눈이 다시 진우를 향했다.

“젠장, 이제 탈출이다!”

진우는 다시 섬광탄 하나를 꺼내들고, 이미 한 번 폭발했던 곳, 즉 부패한 핵 근처로 다시 던졌다. 꽝! 두 번째 폭발이 지하를 뒤흔들었고, 거미들은 다시금 고통에 몸부림쳤다. 진우는 이 틈을 이용해 지상으로 향하는 문으로 달려갔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닫힌 문을 부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숨을 헐떡이며 지상으로 올라온 진우는 백화점 건물 밖으로 달려 나왔다. 밤은 이미 깊어졌고, 도시의 잔해는 암흑 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가까스로 안전한 폐건물 지붕으로 몸을 숨겼다. 손에 든 금속 상자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그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작은 유리병들이 가득했다. 병마다 맑은 액체가 담겨 있었고, 뚜껑에는 ‘정화수’라고 적힌 낡은 라벨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얇은 금속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그는 케이스를 열었다. 안에는 깨끗한 비상 식량 바와, 작은 디지털 기록 장치가 들어 있었다. 디지털 장치는 여전히 희미하게 불빛을 내고 있었다.

진우는 한 병의 정화수를 따서 목을 축였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온몸에 생기가 돋는 듯했다. 그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살았다.”

그는 어둠 속의 도시를 내려다봤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자신을 쫓던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밤은 아직 길고, 위험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오늘 밤을 살아남았다. 그리고 작은 희망을 찾았다.

손에 든 디지털 기록 장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작은 기기 안에 무엇이 담겨 있을까? 어쩌면 이 황폐한 세계의 비밀, 혹은 살아남을 수 있는 또 다른 단서가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으며, 진우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은 여전히 냉정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