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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일곱 번째 이슬비: 달빛 아래 드리운 그림자

초록 이음의 유리문 너머로 이슬비가 나직이 떨어지는 밤이었다. 지우는 카운터에 기대어 앉아 빗방울이 그리는 희미한 곡선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루 종일 손님들의 웃음소리로 북적였던 공간은 이제 차분한 어둠 속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 젖은 흙내와 싱그러운 풀꽃 향기가 섞여 아늑한 공기를 만들었다.

이언은 늘 그랬듯, 조용히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창가, 가장 오래된 올리브나무 화분 옆에 앉아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창밖의 비가 아니라 저 먼, 먹빛으로 물든 하늘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비록 인영은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지우는 알고 있었다. 이언의 눈빛이 흔들릴 때마다, 그 눈 속에는 지구의 것이 아닌, 아득한 별빛 조각들이 부유한다는 것을.

“이언아, 늦었다. 차가 식겠어.”

지우가 따뜻한 캐모마일 잔을 내밀었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잠시 후, 이언은 아주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어떤 슬픔이 엷게 드리워져 있었다.

“지우야.”

그의 목소리는 비 내리는 밤공기처럼 차분했지만, 평소와는 다른 무게를 담고 있었다. 지우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오늘 밤은 평범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그의 옆자리로 가 나란히 앉았다.

“무슨 일 있어? 안색이 안 좋아.”

이언은 긴 손가락으로 창가에 맺힌 빗방울을 쓸었다. 마치 그 작은 물방울 하나하나에 우주의 비밀이라도 담겨 있는 듯 신중하게.

“여기서 네 곁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꿈만 같아.”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여리고 아련해서, 지우는 순간 그가 이 자리에서 스르륵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지우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이언의 손은 항상 차가웠지만, 오늘은 유난히 서늘했다. 마치 얼어붙은 별 조각 같았다.

“꿈이 아니야. 여기, 내가 있잖아. 네 옆에.”

지우가 그의 손가락을 가볍게 얽었다. 이언은 지우의 손을 마주 잡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밤하늘을 헤매고 있었다.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아.”

지우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녀는 숨을 들이켰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왜… 몸이 아픈 거야?”

이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프지 않아. 그저… 내 고향 별이 날 부르고 있어. 점점 더 강하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가게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지우는 느꼈다. 창가에 놓인 선인장 잎사귀 끝에 아주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그 빛은 꽃잎을 따라 흐르며 잔물결처럼 반짝였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는, 마치 아주 먼 우주의 자장가처럼, 작고 고운 소리가 들려왔다. 이언과 함께한 시간 동안 지우는 이런 현상들을 여러 번 겪었지만, 오늘 밤은 그 강도가 확연히 달랐다. 빛은 더욱 선명했고, 소리는 더욱 또렷했다.

“이언… 이 빛….”

지우가 손가락으로 반짝이는 선인장을 가리켰다. 이언은 그제야 시선을 창밖에서 거두어 꽃들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자책과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내 존재 자체가 이 행성에는… 균열을 일으켜. 지우, 난 너와 같은 세상에 오래 머물 수 없어. 처음부터 그랬어. 난 언젠가 돌아가야 할 존재였으니까.”

“균열이라니… 대체 무슨 소리야? 너 때문에 꽃들이 더 아름다워졌잖아. 초록 이음의 식물들은 네가 온 후로 단 한 번도 시든 적이 없어.” 지우는 그의 말을 부정하듯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에도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이언은 지우의 눈을 깊이 들여다봤다. “그건 내가 이 행성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만약 내가 너를… 이 지상에 묶인 존재를 너무 깊이 사랑하게 되면….”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신, 그의 눈동자에서 별빛 조각들이 더욱 격렬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올리브나무 잎사귀들이 일제히 잔잔한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실내에는 바람 한 점 없었지만, 나뭇잎들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어루만져지는 듯 흔들렸다.

“그럼 어떻게 돼? 어떻게 되는데?” 지우는 울음을 참는 듯 목소리를 쥐어짰다. 이언의 말이 곧 자신들의 사랑이 가진 태생적인 한계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언은 한숨을 쉬었다. “난 사라질 거야. 네 세상의 균형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지우는 머리를 강하게 흔들었다. “안 돼! 안 돼, 이언. 난… 널 보낼 수 없어.”

“널 사랑할수록, 이 행성과의 연결이 더욱 강해져. 결국, 난 선택해야 해. 널 포기하고 돌아가거나… 아니면… 이곳에 흔적 없이 스며들어 사라지거나.”

이언의 눈가에 투명한 이슬이 맺혔다. 그것은 눈물 같았지만, 별빛처럼 반짝였다. 그 별빛 이슬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자, 그의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작은 자갈 하나가 순간적으로 푸른빛을 내며 뜨거워졌다. 지우는 그 미약한 열기에 손을 댔다가 깜짝 놀라 손을 뗐다. 평범한 돌멩이였던 것이 이언의 눈물 한 방울로 마법적인 힘을 얻은 것이다.

이언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그림자가 창밖의 비에 젖은 거리에 길게 드리워졌다.

“이제 더 이상 숨길 수도, 미룰 수도 없어. 지우. 난….”

바로 그때, 초록 이음의 유리문 바깥에서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명확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지우는 물론, 이언도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이 늦은 시각에 초록 이음을 찾아올 손님은 없었다. 그리고 저 노크는… 마치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던 이가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른 듯한, 그런 확신에 찬 소리였다.

이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속에 담긴 별빛 조각들이 불안하게 부딪히는 것을 지우는 똑똑히 봤다. 그는 재빨리 지우의 뒤로 몸을 숨기듯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그림자처럼 미끄러웠다.

지우는 두려움에 휩싸였지만, 이언을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적인 충동이 더 강했다. 그녀는 천천히 문 쪽으로 향했다. 유리문 너머의 그림자는 흐릿했지만, 어딘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누구… 세요?”

지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문 밖의 그림자는 답이 없었다. 다만, 어둠 속에서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어 오는 것 같았다. 지우의 등 뒤에서 이언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문 밖의 존재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이언의 ‘남은 시간’이라는 경고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슬비 내리는 밤, 지우의 심장은 격렬하게 울리고 있었다. 금지된 사랑의 가장자리에 선 두 연인에게, 이제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