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빛 숲의 그림자
첫걸음은 늘 그랬듯 망설임으로 시작되었지만, 이내 확신으로 변했다. 엘프들의 왕국, 아르테미시아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에메랄드 궁정에서 벗어나, 리라는 홀로 은빛 숲의 장막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녀의 찬란한 은빛 머리칼은 숲의 새벽 안개 속에서조차 희미하게 빛났고, 새벽 이슬을 머금은 녹색 로브는 나뭇잎 사이를 스치는 바람처럼 부드러웠다. 그녀의 수정 같은 눈동자는 고요한 숲을 탐색하며, 오랜 역사가 잠든 비경을 찾고 있었다.
은빛 숲은 아르테미시아와 야수 부족 연합, 베르세르크의 영토를 가르는 자연의 경계였다. 엘프들은 이곳을 ‘성스러운 수호림’이라 불렀고, 야수 부족민들은 ‘야생의 심장’이라 칭했다. 양쪽 모두에게 이곳은 침범할 수 없는 금기의 영역이자, 동시에 서로를 경계하는 최전선이었다. 평범한 엘프나 야수족이라면 발걸음조차 들이지 않을 곳이었지만, 리라는 평범한 엘프가 아니었다. 그녀는 아르테미시아의 세 번째 공주이자, 달의 마법을 다루는 젊은 현자였다. 그리고 오늘, 그녀는 선조들의 기록 속에서만 보았던, ‘시간의 눈물’이라 불리는 고대 유물을 찾아 이곳에 왔다.
숲은 겉보기와 달리 조용하지 않았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 이름 모를 짐승들의 낮은 울음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심장을 맴도는 묘한 위압감. 리라는 손에 든 월광석 지팡이를 꽉 쥐었다. 마법이 깃든 지팡이 끝에서 희미한 은색 빛이 뿜어져 나왔고, 주위의 마나 흐름을 감지했다. 무언가, 아니, *누군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것은 숲의 영혼이 아니었다. 좀 더 거칠고, 맹렬하며, 위험한 기운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낡은 석탑의 그림자 속으로 접어들었을 때, 숲의 정적이 산산이 부서졌다.
“크르르….”
어둠 속에서 덩치 큰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썩어가는 살점과 뒤틀린 뿔을 가진 숲의 타락한 짐승, 그림자 늑대였다. 녀석은 굶주린 눈으로 리라를 노려보며, 침을 흘렸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숲의 사방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솟아났다. 적어도 다섯 마리 이상. 리라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평소라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이곳은 마나의 흐름이 불규칙한 금단의 땅이었다. 게다가, 녀석들은 너무나 빠르게 그녀를 포위했다.
“물러서라!” 리라는 지팡이를 휘둘러 달빛 마법을 쏘았다. 은빛 섬광이 그림자 늑대 한 마리를 강타했지만, 녀석은 잠시 휘청거릴 뿐, 더욱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리라는 재빨리 방어막을 펼쳤으나, 놈들의 송곳니는 맹렬하게 방어막을 두들겼다. 틈을 노린 다른 늑대가 옆구리를 노렸고, 리라는 간신히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발톱의 감각, 로브가 찢어졌다.
위험했다. 마나가 고갈되고 있었다. 그녀는 지팡이를 땅에 박고 고대의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거대한 달의 빛줄기가 그녀의 머리 위로 모여들었다. 이것이 성공하면 놈들을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겠지만, 주문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늑대들은 그 시간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었다. 선두에 선 늑대가 입을 크게 벌려 그녀의 목덜미를 노렸다.
그때였다.
콰아앙!
폭풍처럼 거친 움직임이 숲을 갈랐다. 거대한 검은 형체가 그림자 늑대 무리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마치 거대한 늑대 그 자체인 듯한, 하지만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하며, 두 발로 서서 사냥하는 존재였다. 녀석의 강력한 주먹 한 방에 그림자 늑대의 머리가 박살 났고, 날카로운 발톱이 다른 놈의 심장을 꿰뚫었다. 야수의 맹렬함, 분노에 찬 포효가 숲을 울렸다.
리라는 주문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베르세르크 부족의 전사였다. 그것도 우두머리급으로 보이는, 털가죽 망토를 두른 건장한 야수족 남성. 늑대의 귀가 그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에서 뾰족하게 솟아 있었고, 손등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나 있었다. 특히 그의 눈동자는 숲의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금색이었다.
그는 무자비하게 그림자 늑대들을 짓밟았다. 한 놈 한 놈 쓰러트릴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진동했다. 리라는 이런 광경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들의 잔혹성과 야만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압도적인 힘과 속도로 사냥하는 모습은 경외심마저 불러일으켰다. 순식간에 그림자 늑대들은 전멸했다. 마지막 늑대가 절규하며 쓰러지자, 숲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야수족 전사는 천천히 몸을 돌려 리라를 향했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그녀를 꿰뚫는 듯했다. 리라는 지팡이를 다시 세우고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야수족은 엘프들에게 있어 야만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였다. 그들은 종종 엘프들의 영토를 침범했고, 서로 피 흘리는 전투를 벌여왔다. 지금 이 남자는 그녀를 구했지만, 언제 태도를 바꿀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야성의 기운이 리라를 압도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물러서라…!” 리라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남자는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더 큰 키, 단단한 근육질의 몸. 찢어진 로브 아래로 드러난 그녀의 어깨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피 냄새를 맡는 듯, 코를 살짝 씰룩거렸다.
“엘프.”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지만, 예상외로 또렷했다. “금단의 숲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냐.”
리라는 침을 삼켰다. 그의 눈빛은 맹렬하면서도 어딘가 깊은 지혜가 담겨 있었다. 야만적인 사냥꾼의 눈이라기보다는, 숲의 군주의 눈에 가까웠다.
“그것은 그대에게 답할 이유가 없다. 나는… 아르테미시아의 공주, 리라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남자는 낮게 웃었다. 그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그의 가슴에서 울렸다.
“공주라… 엘프의 공주가 어째서 홀로 이곳까지 왔는가. 이곳은 너희 엘프들에게 ‘불경한 땅’이 아니었나?” 그의 시선이 그녀의 부상당한 어깨에 머물렀다. “게다가, 이리 약해 빠진 공주였던가.”
리라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굴욕감과 함께,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나는 약하지 않다! 그리고 내게는 이곳에 올 이유가 있었다. 그대야말로… 야수 부족의 전사라면, 어째서 금단의 숲에 있는가?”
“이 숲은 ‘야생의 심장’이라 불린다. 나의 부족의 오랜 터전과 맞닿아 있는 곳. 나는 이 경계를 지키는 자다.” 그의 금색 눈동자가 숲의 깊은 곳을 훑었다. “이름은 카엘. 늑대 부족의 수장이다.”
카엘. 늑대 부족의 수장이라니. 리라의 심장이 다시 한 번 철렁했다. 늑대 부족은 베르세르크 연합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이고 용맹하기로 소문난 부족이었다. 그들의 잔혹함은 엘프들의 전설에도 자주 등장했다. 그런데 그런 자가 그녀를 구해주었다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날… 구해준 건가?” 리라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엘은 대답 대신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타락한 그림자 늑대들은 이 숲의 균형을 깨뜨린다. 내 영역을 침범하는 것들은 용서치 않는다. 엘프든, 짐승이든.”
그의 말은 왠지 모르게 리라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마치 그녀가 숲의 균형을 깨뜨린 한 요소라도 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흔들림 없는 단호함만 있었다.
“어깨… 치료해야 한다.” 카엘이 불쑥 말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뻗어왔다. 그의 손은 크고 거칠었지만, 이상하게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묘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리라는 순간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야수족의 손길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괜찮다. 나는…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그녀는 월광석 지팡이 끝에서 희미한 치유 마법을 발동시켰다. 푸른 빛이 상처를 감쌌고, 찢어진 살점이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카엘은 그런 리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 상처, 그리고 그녀의 은빛 머리칼을 스쳤다. 그 시선에 왠지 모를 끈적임이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깊은 본능이 담긴 응시였다.
“엘프의 마법은 섬세하군.”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이 숲은 너희들의 섬세함으로는 지킬 수 없는 곳이다.”
“이 숲은 엘프들의 땅이 아니다.” 리라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들의 소유도 아니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야수족의 전사와 엘프의 공주. 태어날 때부터 적대적인 존재로 교육받았고, 서로의 종족을 야만적이거나 오만하다고 치부해왔던 두 존재가 금단의 숲 한가운데서 마주 서 있었다. 서로를 죽여야 마땅한 원수 관계라고 배워왔음에도, 방금 전의 싸움과 이어지는 이 묘한 대치 속에서 리라는 카엘에게서 알 수 없는 끌림을 느꼈다. 그의 금색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 깊은 슬픔과 함께, 잊혀진 고독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카엘의 눈에도, 섬세하고 우아한 리라의 모습이 오랫동안 그가 봐왔던 엘프들과는 다른, 묘한 매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리라가 먼저 침묵을 깼다. 이 이상 이곳에 머무는 것은 위험했다. 그녀의 부족이 그녀를 찾기 시작할 것이고, 카엘의 부족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카엘은 그녀의 말을 듣고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리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리라가 겨우 입을 열었다.
카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 속에서 리라는 자신이 마치 숲의 한 부분처럼,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의 야성적인 본능이 그녀의 존재를 통째로 받아들이려는 듯했다.
리라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숲의 깊숙한 곳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공주.”
카엘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리라는 멈춰 섰다.
“이 숲은… 너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리라는 고개를 돌려 카엘을 다시 보았다. 그의 모습은 숲의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지만, 그의 금색 눈동자만은 여전히 맹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답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말임을 직감했다. 그저 긴 침묵 속에서, 서로 다른 두 심장이 묘한 울림을 주고받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리라는 마지막으로 그를 바라보고는, 아르테미시아 왕국의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숲의 안개가 다시 그녀의 은빛 머리칼을 감쌌다. 그녀의 심장에서는 방금 만났던 야수족 전사의 금색 눈동자가, 그리고 그에게서 풍기던 흙과 나무, 그리고 맹수 특유의 강렬한 체취가 지워지지 않고 맴돌았다.
카엘은 리라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향한 곳을 응시했다. 그의 손에 묻은 그림자 늑대의 피는 여전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는 천천히 그 피를 문질러 지우며 생각했다. 엘프. 오만하고 나약한 존재라 여겼던 그들이, 이렇게 강렬한 빛을 품고 있을 줄이야. 그의 늑대 심장이 낯선 예감으로 울렁였다.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었다. 금지된 불꽃이, 이제 막 은빛 숲의 그림자 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