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눈 뜨니, 검과 피의 전장이었다**
어둠이었다.
짙고, 끈적하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절대적인 어둠.
그리고… 차가웠다.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심장까지 파고들어 숨통을 조였다. 이대로 죽는 건가. 아니, 이미 죽은 건가? 어렴풋한 기억 속, 퇴근길 횡단보도에서 나를 향해 돌진하던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마지막 이미지였다. 통증조차 느낄 새 없이 모든 것이 끝나버린, 허무하고도 비참한 죽음.
‘하아… 기껏 살아온 인생이 고작 이렇단 말이야?’
억울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서른두 해를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보람 한번 느껴보지 못하고 이렇게 끝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 애인도 없이 홀로 떠나는 길. 외로움이 뼛속까지 시렸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빛이라기보다는… 어렴풋한 형태였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흙먼지가 흩날리는 땅,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마치 먹으로 그린 듯한 산봉우리들.
‘이게 대체… 뭐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아까보다 훨씬 선명했다. 차가웠던 몸은 이젠 온기에 젖어 있었다. 끈적한 어둠은 사라지고,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숨을 쉬었다. 가슴 가득 폐가 부풀어 오르는 감각.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내 몸이 아니었다.
손을 들어 올렸다. 매끄럽고 하얀, 잔 근육이 선명한 손이었다. 나는 분명 스무 살 이후로는 꾸준히 운동과 거리가 멀었던 전형적인 사무직 직장인이었다. 이런 손은 내 손일 리가 없었다. 더듬더듬 팔을 만져보았다. 탄탄한 근육이 느껴졌다.
‘설마… 전생?’
흔히 읽던 판타지 웹소설에서나 보던 설정이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내가 전생이라니? 그것도 이런 몸으로? 혼란스러움 속에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낡고 해진 옷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주위는 숲속 깊은 곳인 듯, 키 큰 나무들이 빽빽했고 풀과 덤불이 우거져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오른쪽 옆구리에서 섬뜩한 통증이 덮쳐왔다.
“크윽!”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옆구리를 더듬자, 축축하고 끈적한 액체가 손에 묻어났다. 피였다. 붉고 뜨거운 피. 핏덩이가 응고된 채 굳어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누가 나를 공격한 건가?
그때였다.
“일어나거라, 어리석은 놈!”
머리 위에서 들려온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 들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억지로 고개를 젖힌 시야에 거대한 그림자가 들어왔다. 새까만 무복을 입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거대한 철검이 들려 있었다.
“네놈의 무공은 고작 이 정도냐? 천신문(天神門)의 이름에 먹칠도 유분수지. 쯧쯧.”
사내는 혀를 찼다. 나는 그의 손에 매달린 채 바들바들 떨었다. 옆구리의 통증이 다시금 미친 듯이 솟구쳤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자는 나를 해치려 하고 있다. 아니, 이미 해친 상태다!
“죽음이 목전에 닥쳐도 깨닫지 못하는가. 네놈은 애초에 그릇이 아니었다. 고작 약관의 나이에 겨우 삼류 초식이나 익힌 주제에… 감히 천하제일 쟁탈 무림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나섰으니.”
천하제일 쟁탈 무림 대회? 무림?
사내의 말에 혼란스러움은 극에 달했다. 이세계! 무협 세계! 나는 지금 무협지에 나오는 세상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죽기 직전의 몸으로!
“허나 괘념치 마라. 네놈이 죽는다고 해도, 어차피 대회의 흐름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을 것이니. 어차피 천신문에서는 그저 빈 자리 하나 채우는 용도였을 뿐.”
사내는 비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잔혹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살아야 한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다시 한번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어!
몸부림쳤다. 그러나 사내의 완력은 압도적이었다. 내 빈약한 몸뚱이는 마치 실오라기처럼 그의 손에 흔들릴 뿐이었다.
“흥, 발버둥 쳐 보았자 소용없다. 약자는 죽어야 마땅한 법. 그것이 무림의 진리이자 순리다!”
철검이 번쩍였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살기가 뼈를 파고들었다. 나는 직감했다. 이번 공격은 피할 수 없다. 그대로 당하면 내 목은 몸통에서 분리될 것이다.
‘젠장! 겨우 다시 살아났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라고?’
생존 본능이 마지막 발악을 했다. 눈앞이 번쩍이면서, 뇌리 속에서 뭔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수십 년간 수련한 무인의 움직임처럼 보였다. 칼날을 피하는 법, 상대의 빈틈을 파고드는 법, 역공을 가하는 법…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무공도 익힌 적이 없었다. 어릴 때 태권도 도장을 다니다 말고, 스무 살 이후로는 헬스장 회원권만 끊어놓고 잠만 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사내의 손목을 잡고 휘두르던 손에 마치 스프링이라도 달린 것처럼 튕겨져 나갔다. 엉망진창인 자세였지만, 죽음의 칼날을 간발의 차이로 피할 수 있었다. 철검은 허공을 갈랐고, 그 충격에 내 머리채를 잡았던 사내의 손아귀가 살짝 풀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옆구리에서 격렬한 고통이 덮쳐왔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머릿속은 백지장 같았지만, 몸은 그 순간에도 뭔가를 기억하려는 듯 미세하게 움직였다.
“흥, 겨우 그것이 네놈의 비장의 수인가? 쓸데없는 발버둥이다!”
사내는 비웃음을 흘리며 다시 철검을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더욱 빠르고 사납게, 마치 거대한 뱀이 먹이를 덮치듯 아래로 내리꽂았다. 피할 틈이 없어 보였다.
‘이대로는 안 돼…!’
내 눈은 사내의 움직임을, 그의 철검이 그리는 궤적을 쫓았다. 찰나의 순간, 나는 그가 검을 휘두르기 위해 무게 중심을 옮기는 아주 미세한 동작을 포착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그의 팔과 어깨에 잠시나마 빈틈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마치 내가 원래부터 그 이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것은 착각인가, 아니면 이 몸의 기억인가?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내 몸은 반응했다. 죽을힘을 다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내 발은 비틀거리면서도 땅을 박차고 사내의 옆구리를 향해 움직였다.
“뭐… 뭐냐?!”
사내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가 휘두른 철검은 내 옆구리를 스치며 흙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나는 그 짧은 순간, 온몸의 힘을 모아 그의 옆구리에 어설프게나마 발을 내질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옆구리에 충격이 가해졌다. 물론 그에게는 솜털처럼 가벼운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검이 비껴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 가해진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 사내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건방진 놈! 감히 약해빠진 주제에…!”
사내는 격분하여 눈을 부릅떴다. 그에게는 치명타가 아니었지만, 이 몸의 주인이었던 ‘나’의 실력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반격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시선에서 당혹감과 함께 끓어오르는 살의가 느껴졌다.
‘젠장, 긁어 부스럼 만들었잖아!’
내 어설픈 반격은 사내의 분노만 키웠을 뿐이었다. 그는 한 발자국 내딛으며 다시 철검을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망설임조차 없었다. 일격에 나를 끝장내려는 기세였다.
“크아아악!”
절규에 가까운 기합성과 함께 철검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몸이 한계에 다다른 듯 움직이지 않았다. 끔찍한 죽음의 순간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때였다.
파아앙!
어디선가 날아온 기척이 사내의 철검을 강타했다. 쇠가 부딪히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푸른색 검기가 번개처럼 솟아올라 철검을 튕겨냈다.
“무례하구나. 정정당당한 겨루기라 생각했거늘, 비열하게 이미 쓰러진 이를 습격하다니.”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하얀 도포를 걸치고, 허리에는 푸른 검을 찬 남자였다. 그의 얼굴은 차분하고 고요했지만, 눈빛만은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날카로웠다. 그가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주변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사내는 순간 굳어버렸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아닌, 경악과 함께 두려움이 스쳤다.
“용… 용검존(龍劍尊)!”
용검존?
그의 이름에 사내는 뒷걸음질 쳤다. 마치 거대한 맹수 앞에 선 작은 짐승처럼.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지? 저 사나운 철검을 한순간에 막아낸 그는… 이 무림에서 어떤 존재인 걸까?
용검존은 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다시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신문에서는 무림 대회를 앞두고 벌써부터 이런 비열한 수작을 부리는가? 약자를 상대로 무위를 뽐내고, 그것도 모자라 암습이라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나?”
“그… 그게 아니라… 놈이 먼저 도발을…” 사내가 변명하려 했지만, 용검존의 차가운 시선에 말끝을 흐렸다.
“변명은 필요 없다. 어서 물러나거라. 다음번에는 이런 장난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용검존의 말에 사내는 감히 반항할 생각도 못 하는 듯, 부들부들 떨며 급히 철검을 거두고 도망치듯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너는… 괜찮으냐?”
용검존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가 내 옆구리의 상처를 잠시 살피더니 말했다.
“상처가 깊군. 이대로 두면 피를 너무 많이 흘릴 것이다. 움직이지 마라.”
그리고는 주저 없이 품에서 작은 백색의 약병을 꺼냈다. 약병의 뚜껑을 열자, 시원하면서도 향긋한 약초 향이 코를 찔렀다. 그는 조심스럽게 약초 가루를 내 상처에 뿌려주었다.
화끈거리는 고통과 함께 차가운 기운이 상처 부위로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피가 멎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약이 아니었다. 분명 무림의 영약 같은 것이리라.
“고맙습니다…”
“천만에. 약자를 외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그는 빙긋 웃었다. 그의 미소는 차가운 외모와는 달리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보다, 너는 천신문의 제자인가?”
천신문. 아까 그 사내가 나에게 말했던 문파의 이름이다.
“아… 그게…” 나는 말을 더듬었다. 나는 그저 전생한 일반인일 뿐. 천신문의 제자라는 것도, 이 몸의 주인이었던 원래 ‘나’에 대한 정보도 전혀 알지 못했다.
용검존은 내 반응을 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양이군. 큰 충격을 받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신문의 제자라면, 어째서 이런 깊은 숲 속에서 혼자 쓰러져 있었는가? 곧 천하제일 쟁탈 무림 대회가 시작될 터인데.”
천하제일 쟁탈 무림 대회!
다시 그 이름이 나왔다. 천하의 운명을 건 무림 고수들의 무술 대회. 그리고 나는 그 대회의 참가자였고, 약해빠진 실력 때문에 같은 문파 동료에게조차 살해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곳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죽음이 일상처럼 여겨지는 냉혹한 무림.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 몸에 빙의해버린 불운한 전생자였다.
무림 대회를 앞두고 쓰러진 천신문의 이름 모를 제자.
내 앞에는 과연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이미 피와 검이 난무하는 무림의 거대한 흐름 속에 던져져 버린 것이다.
용검존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일어나거라. 대회가 열리는 벽하곡(碧霞谷)까지는 아직 멀었다. 이대로 지체하다가는 너의 차례가 오기 전에 기권해야 할지도 모른다.”
벽하곡? 그곳이 대회가 열리는 장소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숲의 장막, 그리고 그 너머에 펼쳐질 피비린내 나는 승부의 전장이었다.
나는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 끔찍한 무림에서 살아남아 원래의 나를 죽이려 했던 자에게 복수해야 했다.
무림의 거대한 서막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