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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연의 맹서, 첫 번째 파문

밤은 찢어진 먹물처럼 대진국의 심장부를 삼키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 용정(龍井)의 상공에는 거대한 하늘 거울 프로젝트의 핵심, ‘천수각(天守閣)’이 위용을 뽐내며 솟아 있었다. 그 웅장한 실루엣은 달빛마저 집어삼킬 듯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지만 그림자 아래에는,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깊은 심연이 숨 쉬고 있었다.

강진우는 그 심연 속을 걷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그림자처럼 소리 없었다. 고도로 정밀하게 설계된 방호벽과 감시망을 무력화하며 천수각의 심장부로 향하는 길은 그에게 있어 수백 번을 되짚은 익숙한 경로였다. 낡은 작업복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체온은 서늘한 지하시설의 공기와 뒤섞여 미미한 수증기가 되었다 사라졌다.

“이태원….”

입술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한 이름이 그의 뇌리 속에서 핏빛으로 번뜩였다. 3년 전, 모든 것이 무너진 그날. 제국의 미래를 걸고 시작했던 ‘하늘 거울 프로젝트’의 완성을 목전에 두었을 때, 가장 믿었던 벗 이태원은 그의 등을 찔렀다. 광기 어린 탐욕이 서린 태원의 눈빛은 아직도 생생했다. 연구 성과는 모두 태원의 이름으로 발표되었고, 진우는 반역자로 낙인찍혀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날 이후, 강진우는 죽은 자가 되었다. 그리고 죽은 자는 산 자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계획할 수 있었다.

강철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은 희미한 푸른빛으로 가득했다. 천수각의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중앙 제어실, ‘천기의 방’이었다. 거대한 벽면을 가득 채운 투명 패널에는 복잡한 수식과 기호, 그리고 대진국의 영토를 표시하는 지도가 실시간으로 깜빡였다. 그 중심에는 아직 미완성된 하늘 거울의 구조도가 섬뜩하리만큼 완벽한 형태로 떠 있었다. 모든 것이 자신이 설계하고 구현했던 그대로였다. 역겨울 만큼.

진우는 익숙한 손길로 주변의 감시 장치를 무력화했다. 어차피 이 시설의 모든 보안 프로토콜은 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완벽하다고 자부했던 보안은, 이제 그에게 허물어져야 할 장벽일 뿐이었다. 그는 메인 제어 콘솔 앞에 섰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손끝에 닿았다.

“드디어….”

낮게 읊조린 목소리에는 서늘한 분노가 가득했다.
패널 위에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복잡한 명령어가 물 흐르듯 입력되고, 거미줄처럼 얽힌 제어망을 타고 깊숙이 침투했다. 그의 목표는 파괴가 아니었다. 파괴는 단순했다. 그는 이태원이 쌓아 올린 거짓된 탑을 가장 취약한 지점부터 서서히 붕괴시킬 참이었다.

진우는 ‘하늘 거울’의 핵심 운용 시스템 깊숙한 곳에 미세한 논리적 오류를 심었다. 완벽에 가까운 시스템 안에서 거의 감지되지 않을 만큼 작은 균열이었다. 당장은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어쩌면 수개월, 아니 수년 후에나 발현될지 모르는 치명적인 결함. 하지만 일단 발현되면, 그 결함은 걷잡을 수 없는 파동을 일으켜 시스템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것이었다. 그리고 그 혼란은, 오롯이 최고 책임자인 이태원의 책임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했다.

그는 태원이 자신의 천재성을 맹신하며 자신이 설계한 시스템을 깊이 파고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태원은 그저 진우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탑 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싶어 할 뿐이었다. 이 미세한 오류는 그 자만심에 쐐기를 박는 첫 번째 망치질이 될 터였다.

작업을 마치자, 진우는 모든 흔적을 지웠다. 침투 기록, 명령 로그, 심지어 공기 중에 떠도는 미세한 자신의 체취마저도 특수 장비로 소거했다. 마치 아무도 이곳에 다녀가지 않은 것처럼 완벽하게.

천기의 방을 나서며, 그의 눈은 다시 한번 천수각의 거대한 구조도를 훑었다. 불완전한 탑. 진우의 손에서 떠나 거짓된 영광으로 치장된 탑.

“기다려라, 이태원.”

그의 그림자는 다시 밤의 장막 속으로 녹아들었다. 천수각의 옥상, 바람이 휘몰아치는 난간에 선 진우는 멀리 용정의 불빛들을 내려다보았다. 불빛들은 마치 아무것도 모른 채 평화롭게 잠든 제국의 백성들 같았다. 곧, 저들은 혼란의 파문에 휩싸이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 파문 속에서, 강진우는 태원이 빼앗아 간 모든 것을 되찾을 것이다. 목숨까지도.

어둠 속에서 그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비틀렸다. 그것은 복수의 맹세를 시작하는, 심연의 첫 번째 파문이었다.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